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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책임져야 한다는 거지요?”

- 한국전쟁 당시 좌익으로 몰려 집단 총살 당한 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 손배소에 국가 배상 책임 인정한 대법원 판결
등록 2011-12-22 13:17 수정 2020-05-03 04:26

대절한 관광버스에 앉은 김정호(64)씨는 창밖을 바라봤다. 흑백의 결혼 사진 속 아버지(1950년 숨짐, 당시 25살) 모습이 어김없이 떠올랐다. 울산을 출발한 버스는 5시간 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 도착할 것이다. ‘상고 기각과 파기 환송.’ 정반대 결과에 대비해 쓴 두 개의 성명서가 그의 품에 있었다. 버스에 앉은 머리 하얀 노인들은 제각기 창밖을 내다봤다. 법원을 향한 11번째 상경길이었다.

50년이 넘도록 인정 받지 못한 진실
그의 아버지는 1950년 8월5일에서 같은 달 26일 사이, 경남 울산군 온양면 운화리 대운산 골짜기의 17개 구덩이와 청량면 삼정리 반정고개의 6개 구덩이 앞 어딘가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모두 10번의 집단 총살이 확인됐다. 그것은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이라 불렸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좌익 관련자를 통제하려고 설립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정부가 집단 학살한 것이었다.
김정호씨는 당시 3살이었다. 13살이 되던 1960년, 4·19 혁명이 발생하자 동네 어른들은 유족회를 결성했다. 같은 해 8월, 구덩이에서 두골 825구가 발견됐다. 김씨의 할머니는 “교육이 있다고 해서 내가 새벽에 도시락까지 싸서 보냈는데…” 하며 가슴을 쳤다. 학살자 처벌을 주장하고 합동위령제를 지냈다. 그런데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군부는 합동묘를 해체하고 유족을 처벌했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숨진 지 오래인 2007년 1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유족 508명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9부(재판장 지영철)는 2009년 원고 승소 판결했다. 민간인 학살의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었다.
그런데 같은 해 8월18일, 서울고법 민사8부(재판장 김창보)는 1심을 뒤집고 원고 패소 판결했다. “국가 책임이 인정돼 이제라도 다행”이라는 내용의 성명서 하나만 준비해온 노인들은 말문이 막혔다. 유족들을 대리한 김형태 변호사 얼굴만 봤다. 김 변호사 역시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소멸시효’가 문제라고 했다.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소멸시효는 사건 발생으로부터 5년, 알게 된 날로부터 3년이다. 고법은 유족들이 진작 알았고, 그때 소송을 냈어야 한다고 봤다. “1960년 유족회가 결성돼 진실 규명을 지속적으로 요청했다”는 이유였다.
1심의 판단 근거와 차이가 있었다. 1심은 “전시 중 경찰이나 군인이 저지른 위법행위를 객관적으로 외부에서 거의 알기 어렵다”며 진실화해위 결정일을 ‘안 날’로 봤다. 그 판단이 합리적으로 보였다. 근거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서울중앙지법에서는 ‘민간인 피학살자 유족회’ 재심 사건이 진행 중이었다. 유족회 활동으로 처벌받은 이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50여 년 만에 낸 재심이었다(지난 3월 이들에 대한 첫 무죄가 대법원에서 확정됐고, 민사소송에서 국가 배상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유족회를 만들었다고 처벌받던 시대에 국가를 상대로 어떻게 소송을 내겠느냐”는 항변은 당연해 보였다.
이제 관심은 대법원에 집중됐다. 청주·청원 보도연맹 사건 등 유사 사건을 맡은 하급심의 관심도 그랬다. 재판부들은 심리를 중단하곤 “대법원 판결을 먼저 보겠다”고 했다. 결과를 보고 소송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다른 지역의 유족들도 있었다.
그리고 지난 6월30일 대법원 선고 기일이 잡혔다. 고법 선고 뒤 2년 만이었다. 그사이 20여 명은 소를 취하했다. “고법에서 안 된다는데 되겠느냐”는 실망감에, 인지대 부담이 겹쳐서였다. 원고 5명은 고령으로 숨졌다.

“소멸시효 이유로 거부는 부당”
그날 오후 2시, 대법원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이제 와서 뒤늦게 ‘유족들이 집단 학살의 전모를 어림잡아서 미리 소송을 제기하지 못했다’는 취지로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해 채무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1심과 같은 판단이었다. “나라가 책임져야 한다는 거지요? 이제 맞지요?” ‘파기환송’이라는 주문을 들은 노인들은 거듭 물었다. 법정 복도를 빠져나오기도 전에 노인들은 끄억끄억 울기 시작했다. 눈물을 참으며 김씨는 품속에 지닌 두 가지 성명서 중 하나를 꺼냈다.
송경화 기자 탐사보도팀 freehwa@hani.co.kr




심사위원 20자평
금태섭 지연배상 삭감. 손이 다 떨린다
오창익 억울한 간첩 만들어 피눈물 쏟게 한 자들은 어떻게 하나?
이상원 책임 있는 나라, 성숙한 국가
장서연 과거사 청산을 위한 최소한의 양심



울산 사건, 1심 판결과 달라진 것
국가배상 지연손해금은 대폭 깎아
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대법원 판결 뒤 경남 김해·창녕·창원 등 다른 지역의 유족 모임 40~50곳은 같은 취지의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손해배상 금액을 어느 정도로 청구해야 할지 몰라 울산 사건의 서울고법 파기환송심 선고(12월23일)를 기다리고 있다.
사정은 이렇다. 울산 사건에 대해 1심은 희생자 1명에 대해 2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했다. 그리고 1950년부터 선고일인 2009년까지 연 5%의 이자를 지급하라 했다. 국가의 위자료 지급이 늦어진 데 따른 지연손해금을 불법행위가 발생한 때부터 산정해줘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 1월 대법원3부(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지연손해금 산정 기준일을 대폭 당기는 것으로 판례를 변경했다. “불법행위시부터 장시간이 경과해 통화가치에 상당한 변동이 생겼는데도 덮어놓고 그때부터 지연손해금이 발생한다고 보는 경우에는 합리적 이유 없는 현저한 과잉배상의 문제가 제기된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예외적으로 손해배상 청구소송 변론 종결 당일”부터 산정해야 한다고 했다.
학살사건 유족의 경우 대법의 ‘소멸시효 항변 불인정’ 판결로 피해 회복의 길이 뒤늦게 열렸지만, ‘지연손해금 예외’ 판결로 기존 과거사 국가 배상 판결에 비해 대폭 줄어든 배상금을 받게 됐다. “피해 회복을 해야 할 피해자보다는 국가의 관점에서만 봐 예외를 둔 정치적 판결”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를 고려해 이후 1심 법원들은 위자료 자체를 증액해 판결하고 있다. 지난 9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2부(재판장 서창원)가 청주·청원 보도연맹 사건에서 희생자 1명에 대해 8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게 그 예다. 그러나 대폭 줄어든 지연손해금에 비하면 그 증액은 아주 적다. 울산 사건 파기환송심은 고등법원의 첫 판단이라 주목된다.
그나마 소송을 낼 수 있는 유족들은 운이 좋은 편이다. 소송 근거가 되는, 진실화해위의 규명을 받은 희생자는 4934명에 불과하다. 학계에선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가 5만~10만 명이라고 추정한다. 지난해 진실화해위 활동이 종료됐기 때문에 남은 유족들은 특별법 제정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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