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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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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만에 위헌 선고된 긴급조치

- 박정희 정권 보위하고 기본권 탄압하던 ‘긴급조치 1호’의 덫에 걸려 3년간 징역 살았던 오종상씨, 대법원서 무죄 판결
등록 2011-12-22 04:05 수정 2020-05-02 19:26

“긴급조치는 국민의 기본권을 탄압하는 부당한 조치다. 이럴 수 있느냐, 국민이 대통령에게 개헌청원도 못한단 말인가?” “이렇게 탄압하는 법이 어데 있느냐, 개헌이란 ‘개’자만 말해도 잡혀가게 되어 있으니 이런 놈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런 조치는 대통령이 더 오래 해먹겠다는 이야기이니 나는 15년 징역을 살고 나면 백옹이 되겠구나.”

권력에 굴종했던 유신 시절의 사법부
‘긴급조치 제1호’의 첫 번째 희생자는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주도한 장준하·백기완 선생이었다. 육군 중장이 재판장을 맡았는데, 공소 제기에서 선고까지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1974년 1월31일 검찰관이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을 구형하자 재판부는 하루 뒤 징역 15년을 그대로 선고했다. “대한민국의 정찰제는 백화점의 상관행이 아닌 군법회의 판결에서 최초로 확립됐다”는, 한승헌 변호사의 그 유명한 말은 여기서 나왔다. 그해 8월 대법원은 하급심 판결을 확정했다.
1974년 1월8일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가 공포됐다. 내용은 이렇다.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앞서 금한 행위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을 금한다 △긴급조치 제1호를 위반한 자와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여기서 말하는 ‘대한민국 헌법’은 박정희 장기집권을 획책하려고 1972년 11월에 만들어진 유신헌법을 이른다. 말이 헌법이지 국민의 기본권은 어디로 내다버린 ‘초헌법적’ 내용을 담고 있다. 심지어 긴급조치는 사법적 심사 대상이 되지 않는다(제53조)고까지 했다. 초월적 지위를 부여받은 긴급조치 제1호는 그런 유신헌법과 박정희 정권을 보위하는 전위였다.
긴급조치 제1호를 위반한 이들은 정치인, 재야인사, 대학생에 그치지 않았다. 일반인들도 유언비어 유포와 긴급조치 비방 혐의로 걸려들었다. 오종상(70)씨가 그렇다. 경기도 평택에 살던 오씨는 33살이던 1974년 5월, 평택읍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한 여고생에게 “수출 증대란 선량한 노동자의 피를 빨아먹는 일이다” “정부에서는 분식을 장려하는데 정부 고관과 부유층은 분식이라 하여 국수 약간에다 순계란과 육류가 태반인 분식을 한다” “유신헌법 체제하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가 긴급조치 제1호가 엄금하는 ‘대한민국 헌법’을 비방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대법원은 1975년 2월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확정했고 오씨는 꼬박 형기를 채우고 출소했다.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시대의 사법부는 권력 앞에 굴종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치욕의 시기다. 당시 민복기 대법원장은 1973년 신년사에서 “우리나라가 통일과 번영을 이룩하기 위하여는 국가 정치권력의 구조가 구헌법과 같아서는 안 되고 가장 집중적이고 가장 효율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유신헌법의 본질인 이상 사법권의 존재 양식도 이에 맞추어야 함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말했다. 이런 사법부에 대한 불신으로 긴급조치 위반자들은 상당수가 상고를 하지 않았다. 판결에 승복해서가 아니라 어차피 뻔한 선고가 예상됐기 때문이다.

» 긴급조치 제1호를 위반한 오종상씨는 1975년 2월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옥살이를 했다. 지난해 12월16일 대법원은 오씨의 재심 사건에서 26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판결을 받고 대법원 대법정을 나서는 오씨. <한겨레> 이종근 기자

» 긴급조치 제1호를 위반한 오종상씨는 1975년 2월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옥살이를 했다. 지난해 12월16일 대법원은 오씨의 재심 사건에서 26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판결을 받고 대법원 대법정을 나서는 오씨. <한겨레> 이종근 기자

대법관 12명 만장일치로 위헌 판결

참여정부 들어 ‘재심을 통한 과거사 청산’ 작업을 꾸준히 해온 사법부가 긴급조치 제1호의 위헌성을 36년 만에 뒤늦게 인정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차한성 대법관)는 2010년 12월16일 오씨의 재심에서,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 대해 ‘면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심리에 참여한 대법관 12명 전원 일치로 무죄를 선고했다. 처벌 근거인 긴급조치 제1호가 이미 해제됐기 때문에 그동안 무죄라고 판단하지 않고 면소 판결을 해온 ‘관행’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대법원은 “긴급조치 제1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전면 금지함으로써 이른바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 현행 헌법은 물론, 당시 유신헌법상의 긴급조치 발동 요건조차 갖추지 못한 채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밝혔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2007년 초 긴급조치 위반사건 선고에 관여한 판사의 실명이 공개되자 “나에 대한 정치 공세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하필 왜 (판사 실명을) 지금 발표하는 것이냐”라고 했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심사위원 20자평
금태섭 수업 거부한 학생을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법’을 없애는 데 걸린 시간 40년
오창익 인권침해는 긴급하게, 바로잡는 건 36년 만에 전혀 긴급하지 않게
이상원 기본권 따라 경계선에 들어서는 용감한 발걸음


긴급조치 위헌 심사 놓고 대법-헌재 갈등
심판권은 누구의 몫?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긴급조치 제1호는 위헌이라고 판단하자 헌법재판소가 발칵 뒤집혔다. 우리 헌법은 법률에 대한 위헌성 판단은 헌재에, 법률보다 아래인 명령·규칙 등의 위헌성은 대법원이 판단하도록 했다. 대법원은 오종상씨 재심에서 ‘긴급조치의 위헌심판기관’이 왜 대법원인지를 자세히 밝혔다. “긴급조치는 국회 승인 조치가 없었고 국회의 입법권 행사라는 실질을 전혀 가지지 못해 헌재의 위헌 심판 대상이 되는 ‘법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씨는 대법원 판결이 있기 전 서울고법에 유신헌법 제53조와 긴급조치 제1·2호의 위헌 여부를 헌재에서 가려달라는 신청을 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오씨는 2010년 2월 직접 헌재에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헌재 쪽은 “자체적으로 위헌성 여부를 적극 검토하고 있었는데 대법원이 선수를 쳤다. 대통령 긴급명령 등은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는데도 대법원이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반면 헌법학계 일부에서는 “헌재가 너무 늦게 나선 측면도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해당 재심 사건에 대해서만 구제가 가능한 대법원 선고와 달리, 소송을 내지 않은 피해자들도 구제가 가능한 헌재가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에 대한 위헌성을 적극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대법원의 긴급조치 제1호 위헌 선고가 나온 뒤 국가폭력에 대한 반성을 모르는 검찰의 ‘퇴행’도 어김없이 이어졌다. 검찰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서아무개씨 등 3명의 재심에서 무죄가 나오자 “긴급조치 위헌 판단은 헌재에서 해야 한다”는 항소이유서를 제출했다. 법률 전문가로서의 ‘판단’일 수도 있지만, “당시 북한의 위협이 계속되는 시대적 상황을 감안할 때 긴급조치 발령 상황이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검찰의 주장은 ‘판단’이 아닌 ‘반동’에 가깝다.
헌재는 지난 10월13일 오종상씨 등 6명이 유신헌법 제53조와 긴급조치 제1·2·9호의 위헌성을 따져달라며 청구한 헌법소원 사건의 공개변론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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