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면 안다.”
이른바 ‘음란물’에 대한 법적 판단 기준을 웅변해주는 표현이다. 미국 대법원이 1964년 ‘제코벨리스 대 오하이오주’ 사건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등장한 말인데, 사연은 대충 이런 식이다.
미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하이츠 지역의 한 극장에서 간만에 프랑스 영화를 걸었다. 루이 말 감독이 1958년 발표해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거머쥔 (연인들)이다. 남편과 애인까지 있는 주인공이 우연히 만난 제3의 남성과 사랑에 빠져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요즘 ‘막장 드라마’에 견줘 지극히 평범한 내용이다.
20대 남-남 커플, 보면 안다
하지만 오하이오주 당국의 판단은 달랐다. ‘간통’이 유행이라도 할까 걱정된 걸까? 이 영화를 ‘음란물’로 규정하고, 이를 상영한 극장주 니코 제코벨리스를 ‘공연음란죄’로 기소했다. 주 법원의 판단도 마찬가지여서, 제코벨리스에겐 벌금 2500달러가 선고됐다. 그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며 사건을 연방 대법원으로 가져갔다. 당시 포터 스튜어트 대법관은 다수 의견에서 “이른바 ‘하드코어 포르노’라는 짤막한 수식에 부합하는 표현물이 어떤 것인지 정의하려는 시도까지는 하지 않겠다”며 “다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보면 알 수 있는데, 이 사건 해당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썼다.
“이 사건 영화는 성적 정체성이 미숙한 청소년의 일반적인 지식과 경험으로 수용하거나 소화하기 어려워, 건전한 인격체로 성장하는 것을 저해한다. 또 건전한 사회윤리와 선량한 풍속, 사회통념 등에 비춰봐도 청소년이 이 사건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김조광수 감독이 2009년 발표한 영화 를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으로 분류한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주장이다. ‘보면 안다’는 기준으로 보면, 이 영화는 특별할 게 없다. 주인공이 군 복무 중인 애인의 면회를 가며 벌어진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20대 초반 연인들의 현실을 그린 게 줄거리다. 면회신청서의 관계란에 ‘애인’이라고 적었다가 지우고 ‘친구’라고 적거나, 같은 날 면회를 온 애인의 어머니에게 ‘애인’이라고 밝히지 못하고 ‘친구’라고 소개하는 장면에선 슬며시 웃음이 새나온다.
일부 ‘애정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맞춰 어김없이 등장하는 어머니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 비슷한 시기 영등위가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내린 김용균 감독의 영화 에 나오는 알몸 성행위 장면에 견줄 바가 아니란 얘기다.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네티즌들의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이 대체로 ‘풋풋하고 예쁜 사랑 이야기’라는 식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받은 사연이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남-남’ 커플이란 점이다. 법원의 판단은 어땠을까? 지난 4월20일 서울고등법원 제5행정부(재판장 김문석)는 “15세 이상 관람가 및 청소년 관람 불가 기준에 관한 관련 규정 등을 종합해보면, 선정성에 관한 청소년 관람 불가 기준은 성적 행위에 대한 묘사가 구체적이라는 것만 가지고는 충족되지 않고, 신체 노출 및 성적 행위에 대한 묘사가 성적 욕구를 자극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며 노골적이어야만 충족된다”고 판시했다.
유해성 소신 굽히지 않는 영등위
앞서 서울행정법원 제7부(재판장 이광범)도 지난해 9월 영화사 쪽에서 낸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 분류 결정 처분 취소’ 소송에서 같은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두 차례의 패소에도 영등위는 동성애의 ‘유해성’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영등위의 상고로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장서연 변호사(공익변호사그룹 공감)는 “영등위가 이 영화에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내린 것은 성적 표현의 수위가 높아서가 아니라, ‘동성애가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편견 때문”이라며 “동성애를 다룬 영화든 이성애를 다른 영화든, ‘19금’의 기준은 같아야 한다는 법원의 판단은 사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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