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달서구에 사는 권아무개(68)씨 부부의 월소득은 15만원이 조금 넘는다. 도시 2인 가구 최저생계비(85만원)의 17%에 불과한 수준이다. 유복했던 가계 사정은 부부가 하던 사업이 부도나자 급격하게 기울었다. 3년 전 법원에서 파산선고와 빚에 대한 면책 결정까지 받았다. 생계가 막막해지자 지난해 4월 대구 달서구청에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해달라고 신청서를 냈다. 월 15만원의 수입으로는 부부의 식료품비를 대기도 빠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청은 2주 뒤 권씨 부부에겐 수급자 자격이 없다며 부적합 결정을 내렸다. 권씨의 두 아들 가운데 장남의 월소득이 700만원이 넘고 재산도 6천만원에 육박해 노부부를 부양할 능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조세 등으로 급여 사후 징수할 수 있어
그러자 권씨는 구청이 내린 사회복지서비스 및 급여 부적합 결정처분을 취소해달라며 대구지법에 소송을 냈다. 장남과 큰며느리의 사유서도 첨부했다. 권씨 부부의 사업이 부도난 뒤 빚을 갚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이미 상당한 돈을 지출했고, 이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부모와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더 이상 정상적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권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사유서만으로는 장남 부부가 부양을 거부한다고 인정하기 어렵고, 이를 뒷받침할 뚜렷한 증거도 없다는 이유였다.
권씨는 항소했다. 2심 재판부인 대구고법 제1행정부는 1심 판결을 뒤집어 달서구청에 사회복지서비스 및 급여 부적합 결정처분을 취소하라고 선고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목적과 법에 규정된 급여의 기본 원칙, 수급권자의 범위 등을 살펴보면 부양능력이 있는 부양의무자가 어떤 이유로든 실제로 명백히 부양을 기피하거나 거부하고 있는 사실이 인정되면 수급권자의 자격이 있다는 요지였다.
재판부가 이런 판결을 내리며 눈여겨본 것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 46조(비용의 징수)였다. 국가에서 사회복지 급여를 제공받은 사람에게 부양능력을 가진 부양의무자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 경우, 일정한 심의를 거쳐 지급한 비용의 전부나 일부를 국가가 부양의무자로부터 조세 등의 형태로 사후 징수할 수 있다는 규정이다. 재판부는 이 조항을 포괄적으로 해석했다. 나중에 부당 지급된 급여를 환수할 기회가 법적으로 보장된 만큼, 아직 급여가 지급되기 전이라도 당장 생계보호가 필요한 빈곤층에겐 국가가 급여를 지급해 곤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게 옳다고 판결한 것이다.
법의 형식성, 행정의 경직성 풀어
김창종 판사는 지난 12월13일 과 한 통화에서 “법률에 별도의 징수 규정이 있으니, 우선 급여를 지급한 뒤 사후 국가가 부양능력이 있는 아들 부부로부터 그 비용만큼 환수하면 국가도 손해 보는 것이 없다”며 “빈곤층 노인의 부양과 관련해 국가의 책임과 피부양자의 책임을 다 같이 인정하고 각자의 역할을 합리적으로 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일수 심사위원장은 “법의 형식성에 얽매여 있는 행정의 경직성을 판결로 풀어줬다”며 “약자와 빈곤층에게 실질적인 사회보장이 이뤄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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