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올해의 판결을 선정해 발표해온 지도 수년이 경과했다. 연륜에 따라 사회적 영향력도 커졌고, 그만큼 독자들의 관심도 깊어졌다고 본다. 올해도 지난 12월7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8층 회의실에서 최종 심사가 진행됐다.
먼저, 올해 최고의 판결 선정에서부터 심사위원들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대체로 올해에는 예년보다 작황이 신통치 않다는 의견이 많았고, 심지어 일부 위원은 올해 최고의 판결을 뽑지 않는 것도 한 방안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파장이 큰 판결일수록 사안을 법정으로 끌고 간 당사자들의 법적 요란(Legal Noise)이 선행돼야 한다는 점과 올해의 판결은 올해 우리네 시민 생활의 반사경이라는 점에 주목해 올해 최고의 판결을 뽑자는 데 무게가 실렸다.
정부 책임 묻는 스케일 높이 평가
대상은 세 가지였다. 서울광장 통행저지 위헌 결정(2011년 6월30일 선고, 2009헌마406), 위안부 대일배상청구권에 관한 외교통상부의 부작위 위헌 결정(2011년 8월30일 선고, 2006헌마788), 그리고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무죄판결(2010년 12월16일 선고, 2010도5986)이 그것이다. 그중에서 마지막 대법원 판결은 지난해 12월 중순에 선고된 것이어서 올해의 판결로서 자격이 있는지가 논의되었다. 의 올해의 판결 선정을 매해 12월 초순께 하다 보니, 선정 이후 연말까지 사이에 선고된 주목할 만한 판결은 간과된다는 점 때문에 선정 기준일을 중심으로 올해의 판결을 뽑는 것도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올해 선고된 판결들이 나름대로 비중을 가질 때는 그것을 우선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자연히 앞서 본 헌재의 두 위헌 결정에 초점이 옮겨졌다. 서울광장 통행저지 위헌 결정은 통행의 자유권에 관해 헌법재판소가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점에서 몇몇 위원들이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위안부 배상 부작위 위헌 결정에 무게를 싣는 위원들이 더 많았다. 법리적으로 국제협약 이행 여부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묻는, 스케일이 큰 결정이었고, 위안부들의 생존 여명이 점점 짧아진다는 긴박감 속에서 그들의 고통에 국가가 이런 결정으로나마 귀기울였다는 점 등이 이 결정에 방점을 찍게 했다.
노동 부문 올해의 판결로는 철도공사 파업 사건(2011년 3월17일 선고, 2007도482)과 장애인콜택시 사건(2011년 4월14일, 2007도1729)이 뽑혔다. 전자는 형법상 업무방해죄의 ‘위력’에 쟁의행위로서 파업이 포함되느냐에 관해 종전 대법원 입장보다 노조활동에 더 유리하도록 판결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후자는 장애인콜택시 운전자들에 대한 서울시의 근로기간 갱신 거절을 갱신기대권 침해라는 이유에서 부당해고로 본 점이 주목을 끌었다. 이 판결은 1·2심을 다 뒤집은 것으로 비정규직 판결 중 가장 선명하게 돋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제정의 부문에서는 임대주택 분양전환 사건(2011년 4월21일 선고, 2009다97079)이 뽑혔다. 임대주택자들이 분양전환을 할 때 적정 가격 초과 부분을 무효로 취급해 국민의 주거권 안정에 기여했고, 주택임대차 영역에서 사회정의 실현을 추구했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생활 속 권리 부문에서는 기초생활수급 사건(2011년 4월29일 선고, 2010누2549)이 뽑혔다. 기초생활 수급 여부 판단에서 종전에는 형식적으로 부양의무자가 있는지를 따졌으나, 이 판결에서는 부양의무자가 있더라도 실질적인 부양을 할 수 있는지를 따졌다. 법의 형식성에 얽매여 있는 행정의 경직성을 판결로 풀어줌으로써 실질적인 사회보장의 지평을 모색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유령집회를 유령으로 취급한 판결
형사사법 부문에서는 올해 최고의 판결 후보로 올랐던 긴급조치 위반 사건(2010년 12월16일 선고, 2010도5986)이 뽑혔다. 긴급조치 사건의 관할을 두고 대법원과 헌재가 대립각을 세우는 상황이어서, 그에 대한 법리구성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과거의 체제적 불법의 청산이라는 데 큰 의미를 부여했다. 여성 부문에서는 서울YMCA 사건(2011년 1월27일 선고, 2009다19864)이 뽑혔다. 사회적 차별 철폐와 여성의 인권 신장이라는 점이 주목을 끌었다. 환경 부문에서는 두물머리 사건(2011년 2월15일 선고, 2010구합10427)이 선정됐다. 이 판결은 수원지법 행정3부 판결이긴 하지만, 두물머리에서 유기농을 해온 원고들이 경기도 양평군의 하천점용허가 취소를 취소해달라는 요구에 신뢰이익 및 법적 안정성 유지 이익을 들어 원고 쪽 손을 들어준 판결이다. 행정 부문에서는 친일 판사 유영 사건(2011년 11월10일 선고, 2010누38082)이 뽑혔다. 재판 업무라 하더라도 법 왜곡과 정의 관념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는 행위는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단죄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집회의 자유 부문에서는 서울광장 통행저지 위헌 결정(2011년 6월30일 선고, 2009헌마406)과 유령집회 사건(2011년 11월30일 선고, 2011구합34122)을 뽑았다. 전자는 올해 최고의 판결로 꼽아도 손색 없다는 의견이 많았던 터라 집회의 자유 부문에서 올해의 판결로 뽑는 데 문제가 없었다. 후자는 앞서 신고된 집회가 형식적으로 신고된 유령집회라면, 경찰이 집회 시간·장소가 겹친다는 이유만으로 집회를 불허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새로운 선례라는 점에서 선정했다. 표현의 자유 부문에서는 삼성 X파일 사건과 관련해 검사 실명을 공개한 노회찬 전 의원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묻지 않은 서울고법 판결(2011년 12월9일 선고, 2007나1526)이 최종 심사가 끝난 뒤 추가 선정됐다.
국가상대 소송 부문에서는 울산 보도연맹 국가 배상 사건(2011년 6월30일 선고, 2009다2009다72599)이 뽑혔다. 국가 쪽 소송수행자의 소멸시효 항변을 법리적으로 극복하고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빈발한 인권침해 사례에 대해 사후적 권리 구제의 문호를 넓혔다는 이유에서다. 소수자 인권 부문에서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예비군 훈련을 거부한 이의 반복 처벌을 줄여준 청주지법 판결(2011년 10월7일 선고, 2010고단2475 등 병합사건)과 동성애 영화 에 대한 청소년 관람 불가 취소 판결(2011년 4월20일 선고, 2010누32237)이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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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평등한 사회로 한 걸음
올해의 판결들을 뽑으며 헌재와 법원이 민주화와 법치주의 확립에 얼마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새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올해에는 일상적인 시민의 삶 속에서도 민주적이고 인권친화적인 판결이 눈에 많이 띄었다. 우리 사회가 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는 경향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유와 인권의 최후 보루인 사법기관들의 더욱 치열한 정신적 노력을 기대한다.
김일수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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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손에 꼽을 만한 판결이 적었던 것 같다. 법치가 후퇴한다는 염려가 많다. 사법부에서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데 완전히 만족할 수 없어 아쉽다. 그래도 나름대로 좋은 판결이 있어 짚어보니 의미 있는 내용들이었다.
김진 변호사
올해는 노무현 대통령 때 시도한 대법원 구성 다양화를 한 번쯤 정리하는 시기다. 그러다 보니 대법원 판결문을 봐도 알록달록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소수 의견이 많이 나오지 않아 섭섭하다. 앞으로 6년은 더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이 시점에서 올해의 판결 선정뿐만 아니라, 대법원 구성 다양화가 가져온 순기능에 대한 평가와 함께 구성 다양화를 다시 준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2008~2009년에 비해 긴장감·역동성·진정성이 떨어진다. 단순히 대법원 구성원의 변화 때문인지, 아니면 중요한 사건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사법부 역할 측면에서 봤을 때 전반적으로 사법에 의한 통제가 잘 안 되고 있어 유감스럽다. 법원이 좀더 분발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국운 한동대 법학부·국제법률대학원 교수
사건번호들에서 알 수 있듯, 2011년은 이명박 정부 초기 2년 동안 벌어진 각종 논란에 대한 사법적 정리가 시작된 한 해였다. 사필귀정이라기보다는 민주정치의 당연한 원칙들이 사법부에서 재확인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최고의 판결로 꼽힌 위안부 헌법소원 사건 역시 수십 년 묵은 아픔이다. 사법적 정리가 필요한 사건들이 몰려올 2012년을 생각하니 왠지 착잡하다.
이상원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인권을 지향하는 형사사법 시스템을 계속 추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사법부는 정치적 세력이 아니다. 정치적 지형 변화를 따라가기보다는 정치 지형이 변했을 때 거기서 소수로 남게 된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정치적 다수자에 반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의지와 강인함이 있었으면 한다.
이상훈 변호사
전체적으로 집회·표현의 자유나 정치적 자유 등 자유권과 관련해서는 의미 있는 판결이 여럿 선고되었다. 그러나 사회권이나 경제정의와 관련한 판결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자유권에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재판부의 성향으로 볼 수 있지만, 아무래도 현 정부가 이와 관련한 사건을 많이 발생시킨 것도 원인일 것이다. 내년에는 환경 분야에서 좋은 판결이 나오길 기대한다.
이재근 참여연대 시민감시팀장
2008~2009년에는 이명박 정부의 불법이나 인권 탄압, 공권력 남용을 법원이 일정하게 견제해줬는데, 점점 이런 역할을 못하고 있다. 대법원 구성이 바뀌면서 사법부 보수화가 경향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번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를 제기한 판사들처럼 행정부의 권력 남용을 최종적으로 견제하는 사법부의 모습을 찾았으면 한다.
장서연 변호사
소수자 인권 부문에서는 칭찬하고 싶은 판결보다 최악이라고 꼽을 만한 판결이 많았다. 소수자 기본권 보호에 앞장서야 할 헌법재판소가 병역거부·군형법 사건에서 합헌 결정을 했다. 논리가 과거보다 더 후퇴해 실망스러웠다. 위안부 헌법소원 사건의 경우 그나마 헌재가 최소한의 책임을 이행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재홍 변호사
언론 보도도 마찬가지지만 사법적 판단도 시의성이 중요하다. 시기적으로 너무 늦게 판결해 국민이 사법적 판단을 통해 명예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명박 정부 들어 자유권 문제가 사법부로 몰리는 상황인데, 자유권에 대한 적극적인 판단을 사법부에서 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한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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