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동두천의 이름은 물에서 유래한다. 남북으로 길게 ‘신천’이 흐른다. 북으로 한탄강과 만난다. 서울시청 지하철역에서 1호선을 타면 소요산에 닿는다. 멀다. 1시간 넘게 걸린다. 동두천은 그 직전에 있다. 동두천시는 1호선 지행역~동두천중앙역~보산역~동두천역에 걸쳐 있다. 근처에는 소요산이 있다.
윤금이씨를 살해한 마클 이병
보산역 1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브라질 음식점 간판이 보인다. 영어 간판이다. 그 앞에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크라운클럽’(Crown club) 간판이 눈에 띈다. 11월2일 정오엔 아직 문이 닫혀 있었다. 간판 앞에서 미 2사단 캠프 케이시 방향으로 천천히 걷는다. 1992년 한 미군도 똑같은 길을 걸었다. 그때도 크라운클럽은 북적였다. 1992년 10월28일 0시30분 만취한 미군은 클럽에서 나왔다. 미 2사단 1연대 의무병 이병 케네스 리 마클 3세는 클럽에서 혼자 맥주 5병을 마셨다. 클럽에 오기 직전인 10월27일 밤 10시30분까지 그는 막사에서 맥주 16병과 진 2잔을 마셨다. 20살 청년 미군의 주량을 넘은 양이었다. 비틀거렸다. 조금 뒤 그는 길에서 자신보다 더 취한 한 한국 여성을 만났다. 그는 크라운클럽 종업원이었다. 5분 정도 걸어 그의 집까지 함께 갔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계란 1개를 사먹었다. 집 앞에서 또 다른 미군을 만났다. 702정비지원대대 제이슨 램버트 상병은 마클에게 “이 여자는 내가 아는 여자이니 두고 떠나라”고 말했다. 램버트는 이틀 전 윤금이씨와 돈을 주고 성관계를 했다. 마클은 거부했다. “난 의무병이니 성관계를 가지려는 것이 아니고 그녀가 아파서 데려다주러 왔다.” 램버트는 화내고 욕하며 대문 밖으로 나갔다. 윤금이씨는 마클을 못 가게 붙들었다. 마클은 방에 있던 빈 콜라병으로 그의 이마를 두 번 내리쳤다. 피가 흘렀다. 윤금이씨의 온몸과 장판을 적셨다. 마클의 운동화에도 피가 튀었다. 윤금이씨는 실신했다. 마클은 실신한 윤금이씨의 머리를 두 번 더 콜라병으로 내리쳤다. 윤금이씨는 이때 거의 숨졌다.
10월28일 오후 4시30분 집주인은 방문을 열고 경찰에 전화했다. 윤금이씨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자궁에 콜라병이 꽂혀 있었다. 항문에는 우산대가 꽂혀 있었다. 주검과 방에는 흰색 가루세제가 뿌려져 있었다. 범인은 현장에 없었다. 의정부경찰서 강력계와 미군수사대(CID)가 수사에 나섰다. 10월30일 오전 미군 수사대는 케네스 마클을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했다. 1991년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 경찰은 미군에 마클의 신병을 넘기라는 요청을 하지 않았다. 당시 SOFA에 대해 불평등하다는 비판이 많았다. 미군이 주둔할 당시 서독이나 일본 정부가 미군과 맺은 협정에 비해 불평등하다는 취지였다. 한국의 경찰·검찰·법원은 마클에 대해 아무 권한이 없었다. 마클은 경기도 평택의 미8군 구치소와 서울 서초동의 서울형사지방법원 법정을 오고 갔다. 당시 SOFA에 따르면 재판이 끝나 형이 확정된 뒤에야 범죄 미군을 한국 정부가 넘겨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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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가석방, 다음날 미국행
마클은 법정에서 일부 혐의를 부인했다. 1993년 2월17일 오후 2시 서울형사지방법원 417호 대법정에서도 그랬다. 그는 두 가지를 주장했다. 윤금이씨를 4회 가격한 것은 맞지만 우발적이었다. 둘째 국부와 항문에 이물질을 넣은 것은 본인이 아니다. 자신을 질투한 램버트 상병의 행위라고 마클은 주장했다. 마클과 램버트 둘 다 경찰·검찰·법정 진술을 여러 번 번복했다. 램버트의 진술도 믿기 어려웠지만 마클도 마찬가지였다. 마클과 같은 방을 쓰는 존 글린 중위는 법정에서 마클의 도벽을 증언했다. 마클의 별명은 ‘막사구두’였다. 동료의 물건이 마클의 사물함에서 발견돼 붙은 별명이었다. 마클은 상관과 싸운 일 때문에 상관에게 징계를 받았다. 비 오는 날 잔디를 깎는 징계였다. 마클은 칼을 들고 자살하겠다고 말했다. 사건 다음날 마클은 글린 중위에게 “만약 화요일날 내가 어떻게 했는지를 다른 사람이 안다면 영원히 날 못 볼 거다”라고 말했다.
검사가 법정에서 추궁했다. “피고인은 몸과 방바닥에 세제를 뿌리고 피해자의 항문에 우산대를, 음부에 콜라병을 찔러넣었죠?” “아뇨.” 마클은 부인했다. 검사는 “세 가지 모두 안 했다는 겁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마클은 다시 부인했다. “예, 모두(안 했습니다).” “피해자는 두부 및 안면부에 손상을 입고 피를 많이 흘려 사망했는데 그건 알고 있죠?”라는 검사의 질문에 마클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1993년 3월10일 열린 두 번째 공판에는 윤금이씨의 어머니가 참석했다. 그는 마클이 혐의를 부인하자 법정에서 울었다. 재판장은 “어머니라고 해서 이 법정에서 시끄럽게 굴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딸이 죽었다고 생각해보세요”라고 누군가 외쳤다. 윤금이씨의 어머니는 잠시 법정 밖으로 나갔다.
대검찰청 유전자감식실에서 마클의 운동화에 묻은 혈흔을 분석했다. 윤금이씨의 몸에 묻은 피와 일치했다. 마클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변동걸 당시 부장판사는 1994년 4월14일 오전 마클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검찰의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1993년 12월16일 항소심 재판부도 마클의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그러나 윤금이씨의 유족에게 미국 정부가 배상금을 지불한 것을 이유로 징역 15년형으로 감형했다. 1994년 4월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비로소 마클은 한국의 감옥에 갇혔다. 마클은 잔여 형기를 1년여 앞둔 2006년 8월 가석방됐다. 마클은 다음날 곧장 미국으로 출국했다. 법무부 가석방심사위원회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 이 사실은 그해 10월 노회찬 전 진보신당 대표가 자료 요구를 하고서야 알려졌다. 마클이 웨스트버지니아로 돌아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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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범죄자 가석방 뒤 엄격 관리
한국인 범죄자는 가석방 뒤에도 엄격한 보호감독을 받는다. 대통령령인 ‘가석방자 관리규정’을 보면, 가석방된 죄인은 주거지를 관할하는 경찰서장의 보호와 감독을 받는다. 관할 경찰서장은 6개월마다 가석방자의 품행, 직업의 종류, 생활 정도, 가족과의 관계 등 참고사항에 관해 조사서를 작성하고 관계기관의 장에게 통보해야 한다. 가석방 중 금고 이상의 형의 판결을 받으면 가석방 처분은 효력을 잃는다. 감옥에 도로 갇힌다.
미군 범죄자는 그렇지 않다. SOFA에 따라, 미군 범죄자가 가석방되면 미국 정부가 그를 관할한다. 마클처럼 죄를 저지른 미군이 출국 비행기에 올라도 한국 정부가 이를 막을 권한이 없다. 미군 범죄자에게는 가석방과 석방이 다르지 않다. 미국 정부는 가석방된 미군 범죄자의 소재지나 생활태도 등 기초적 정보도 고지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가석방되는 순간 새사람이 된다. 케네스 리 마클은 끝까지 ‘난행’에 대한 혐의를 부인했다. 한국 영자지에 SOFA 개정을 주장하는 시민단체를 비판하는 글도 실었다. 그의 아버지 케네스 리 마클 주니어는 아들의 주장을 믿었다. 아들 마클의 형이 한국 법원에서 확정되자 1994년 미국 대법원에 탄원서를 냈다. 아들이 미군 구치소에서 한국의 감옥으로 이송되는 것을 막아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윌리엄 렌퀴스트 미 대법원장은 이를 기각했다. 마클 부자는 한국 사법부의 판단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전히 그런지 묻고자 했다.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케네스 마클 주식회사’(Kenneth Markle Inc) 번호가 검색되었다. 마클의 고향인 웨스트버지니아의 카이저시에 있다. 전화해보니 다른 회사였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직전 회사의 연락처나 주소는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미국 전화번호부인 ‘화이트페이지’(www.whitepages.com)에도 케네스 마클이 검색된다. 여러 차례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가석방된 미군은 고국에서 그저 새사람이 된다. 마클도 그렇다. 미국 법무부가 운영하는 성범죄자 검색 사이트(www.nsopw.gov)에서도 케네스 마클은 검색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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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우호의 광장’으로 바뀐 사건 현장
은 한국 법무부에 지난 10월11일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물었다. “법무부 등 한국 정부가 마클이 가석방된 2006년 8월15일 이후 형이 만료되는 2008년 2월까지 제임스 마클의 미국 내 거주지, 그의 추가 범법행위 등 여부를 미국 검찰·법원·주정부 등 미국 정부기관에 질의하기 위해 보낸 공문을 공개하라.” 법무부는 10월20일 답변을 보내왔다. “법무부에서는 가석방 관련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나, (미군) 가석방 출소자의 출소 후 소재지 및 출소 후 범법행위 등에 관하여 관리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이에 대하여 미국 정부와 공문을 주고받은 사실이 없음. 귀하께서 청구하신 ‘가석방 후 제임스 마클의 소재지 및 미국 정부와 주고받은 공문’은 존재하지 않는 정보로 공개할 수 없음을 알려드리니 양지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같은 질문을 경찰청에도 보냈으나, 경찰청도 같은 취지의 답변서를 보냈다. 외교통상부 SOFA 담당 부서도 관련 정보를 알지 못했다. 법무부는 과의 통화에서 “SOFA에 따라 가석방된 뒤 미국 정부가 죄인을 관할한다. 한국 정부가 가석방된 미군의 출국을 막을 방법이 없다. 마클은 미국에서 형이 만료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케네스 마클은 새사람이 됐다. 웨스트버지니아의 어딘가에 살아 있다면, 아마 올해 6월7일 39번째 생일파티를 치렀을 것이다.
이마에 피를 흘리고 몸에 이물질이 박힌 상태로 윤금이씨가 누워 있던 동두천시 보산동 431-50번지는 지난 11월2일 현재 ‘상패로’로 이름이 바뀌었다. 흰 페인트칠로 새 단장을 했다. 바로 옆 ㅍ레스토랑에서 고기가 익는다. 지금 보산동은 ‘외국인 관광특구’다. 20살의 술 취한 미군이 26살의 한국 여성을 들러업고 걷던 길은 지금 ‘보산동 한미우호의 광장’이 됐으며, 그 길 위에는 ‘제13회 동두천락페스티발-락경연대회 참가를 환영합니다. 장소: 보산동 한미우호의 광장’ 따위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고, 길가에서 보이는 ‘클럽딥’ ‘클럽오션’ ‘크라운클럽’ 간판은 오후 1시의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바뀐 것은 또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동두천 클럽에선 한국 여성 대신 필리핀 여성들이 춤춘다. 동두천시 자료를 보면, 지난 10월31일 현재 동두천에 등록된 2615명의 외국인 가운데 필리핀 여성만 585명이다. 공연 비자로 입국해 접대를 한다. 2위 재중동포 여성(253명), 3위 중국 여성(184명)에 비해 압도적이다. 나머지 국가 여성은 두 자릿수다.
2010년, 한국인 폭행 미군 154명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미군 범죄는 끊이지 않는다. 경찰청 자료를 보면, 피해자가 한국인인 ‘SOFA 사범’은 계속 나온다. 2009년 한국인을 성폭행한 미군이 5명, 2010년엔 11건이었다. 2009년 한국인을 폭행한 미군이 130명, 2010년 154명이었다. 미군 범죄 초동수사가 잘 안 되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범죄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2사단 소속 미군이 지난 9월24일 새벽 고시텔에 침입해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지내는 18살 청소년을 여러 차례 성폭행했다. 동두천시 전체 면적 95.66㎢의 42%인 40.63㎢가 미 2사단 캠프 케이시에 제공된 공여지다. 파주·의정부 등 19곳의 2사단 기지 가운데 하나다. 9만6246명의 동두천 시민은 공여지를 뺀 나머지 땅에서 산다. 미 2사단이 재배치된 1965년 이후 46년간 그렇게 살아왔다. 평택으로의 기지 이전은 양국 정부에 의해 다시 2016년으로 미뤄졌다. 그 이후엔 평택 주민들이 동두천 시민들의 삶을 산다. 플래카드에 표현된 ‘한-미 우호’의 삶이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참고 문헌 중 공판 기록(주한미군범죄 근절을 위한 운동본부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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