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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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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막히는 지하노동자의 건강권

라돈·매연·석면으로 위협받는 지하시설 노동자… 저임금, 불안정 고용 등 열악한 노동조건이 유해물질 노출 거들어
등록 2011-10-25 07:11 수정 2020-05-02 19:26
» 지하시설 노동자들은 1급 발암물질 등에 항시적으로 노출될 위험에 처해 있다. 비정규 청소 직원이 지하철 전동차 바닥을 물청소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 지하시설 노동자들은 1급 발암물질 등에 항시적으로 노출될 위험에 처해 있다. 비정규 청소 직원이 지하철 전동차 바닥을 물청소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최근 건물의 지하 주차장에서 청소 업무를 수행하던 여성 노동자가 폐암으로 사망한 것이 업무상 재해에 해당된다는 의미 있는 판결이 행정법원에서 있었다. 7여 년 지하 주차장 청소를 하는 동안 노출된 자동차 매연과 라돈, 석면 등 유해물질에 장기간 노출된 것이 노동자에게 폐암을 발생시켰고, 이로 인해 사망하게 되었다는 판결이다.

지하시설의 1급 발암물질 라돈

지하시설은 건강에 좋지 않은가? 만약 위험하다면 무엇이 위험한가? 실제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지하시설이 위험하다는 데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하시설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지 않는 지하시설, 머무는 시간이 짧은 지하시설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런 시설은 사람들이 적게 이용하기 때문에 유해한 물질을 제거하고 안전과 건강을 보호하려는 투자가 적기 때문이다.

도시가 거대화되고 건물이 고층화될수록 지하시설이 많아지고, 지하시설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늘어난다. 28만 명에 이르는 청소 노동자가 있고, 통계조차 없어 그 수를 알 수 없는 주차요원과 주차관리인이 그들이다. 지하철 터널 안에서 일하는 수만 명의 지하철 노동자도 사람들이 적게 이용하는 지하시설에서 일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지하시설에는 어떤 위험이 존재할까? 대표적인 것이 바로 라돈이다. 라돈은 지각의 암석이나 토양 중에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우라늄(U-238)이 몇 단계의 방사성 붕괴를 거듭한 뒤 생성되는 불활성 기체다. 라돈은 땅속에서 쉽게 이동해 공기 중으로 방출된다. 라돈 가스와 라돈이 붕괴돼 나오는 입자가 공기 중에 먼지처럼 떠돌다가 사람의 폐에 들어와 방사선을 방출함으로써 폐암을 유발한다. 토양이나 암석에서 생성된 라돈은 그 틈새로부터 공기 중에 나오므로 지구상 어느 곳에나 존재하지만, 한국처럼 화강암과 화성암이 풍부한 지질에서 농도가 높고, 특히 지하수가 많이 유입되고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해 환기가 불량한 밀폐 공간일수록 높아진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한국의 지하철 터널이나 깊은 지하 주차장은 지하시설 중 가장 라돈이 많이 노출되는 공간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오랫동안 장시간 일한다면 라돈에 많이 노출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라돈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1급 발암물질이다. 문제가 많은 장소에 많은 노동자들이 일하지만 주무부서인 노동부는 이들을 보호하는 법안이나 라돈의 노출 기준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지하시설에서 또 다른 위험은 자동차 매연이다. 자동차 매연은 이미 알려진 대로 대기오염 물질의 38%를 차지하는 등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유해물질 중 하나다. 자동차 매연은 연료나 윤활유의 완전 또는 불완전 연소로 인해 발생되며, 포름알데히드·벤젠 등이 포함돼 있어 WHO에서는 2급 발암물질로 규정하고 있다. 자동차 매연은 저속 운전의 경우 더 심하게 발생해 환기가 불충분하고 운행 속도가 낮은 지하 주차장 등에서 그 정도가 심할 것임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앞의 여성 노동자 폐암 사망 사례를 보면, 청소 노동자가 휴식을 취하는 지하 4층 휴게실조차 자동차 매연 농도가 지상 환기구보다 3배 이상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자동차 매연 역시 라돈처럼 노출되는 노동자를 보호하는 정책이나 노출 기준은 없다.



한국의 지하철 터널이나 깊은 지하 주차장은 지하시설 중 가장 라돈이 많이 노출되는 공간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오랫동안 장시간 일한다면 라돈에 많이 노출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라돈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1급 발암물질이다.

보호할 법적 장치 거의 없어

법원에서 판단하는 유해물질 중 하나는 석면이다. 석면의 유해성은 이미 많이 알려져서 설명은 생략하지만, 독자가 모르는 사실 중 하나는 지하 주차장에도 석면이 많이 쓰였다는 것이다. 비교적 오래된 건물의 주차장 천장에는 방화도포제(뿜칠·천장에 우툴두툴하게 덮인 물질)가 많이 있는데, 이 뿜칠에 석면이 자주 사용된다. 또한 천장을 지나는 환기 덕트, 온수 파이프 등을 감싼 보온재에도 석면이 사용된다. 최근 지하철 승강장에 석면이 발견됐다는 보도는 바로 뿜칠에 있는 석면을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뿜칠이나 덕트, 파이프는 미관상의 문제로 이들을 덮는 천장을 만들어 보이지 않게 밀폐하는데, 사람들이 자주 다니지 않는 지하 터널이나 지하 주차장에는 비용 문제로 밀폐하지 않고 그대로 노출하는 경우가 많다. 지하시설에서 석면 문제는 뿜칠이나 덕트, 파이프에 있는 석면이 자주 떨어진다는 것이다. 뿜칠은 원래 잘 떨어지고, 자동차의 진동이 있을 때 더 심하다. 떨어진 석면은 고체로 공기보다 무거워 가라앉기 때문에 강력한 환기시설이 없는 한 지하시설에 머물게 된다. 자동차나 지하철이 운행해 바람을 일으키면 이 석면은 공기 중으로 날려 사람의 호흡기로 들어갈 수 있다. 정부에서는 이제야 석면안전관리법을 제정해 건축물의 석면을 규제하고 있지만, 지하시설 노동자들은 법 시행 전 수십 년간 석면에 노출됐다.

지하시설의 또 다른 환경문제는 이렇게 많은 유해물질과 먼지를 외부로 배출하는 환기장치를 충분히 가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울의 한 지하철에서 전기료를 절감하려고 환기를 줄였다는 언론 보도는 이를 잘 증명해준다. 이처럼 지하시설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유해물질을 호흡하며 지내고, 이들을 보호할 법적 장치가 미미함을 알 수 있다.

환경문제 이외에도 지하시설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특성 중 하나는, 이들의 노동조건이 열악하다는 것이다. 이는 유해물질에 더 많이 노출되는 근본적 원인이다. 현재 사회적으로 문제되는 원청과 하청의 관계가 지하시설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와 9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 고용 불안정 문제가 이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노동자의 건강권이라는 기본적 권리는 행사되지 못한다. 게다가 이들이 식사하고 쉬는 공간도 지하에 있어 유해물질의 노출 가능성을 더욱 높인다.

정부가 지하 노동자 보호에 나서야

지하시설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은 보호돼야 한다. 정부는 지하시설에서 일하는 노동자 문제를 단순히 저임금 노동시장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누려야 할 기본적 인권과 복지 문제로 접근해야 하고 전체적 노동조건 개선과 작업환경을 개선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정부가 이들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원청과 용역회사의 무책임 속에 노동자가 피해를 당하는 사례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임상혁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소장·직업환경의학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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