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권이 부를 편법으로 물려주는 데 쓰일 수 있을까? 중견기업인 귀뚜라미그룹의 사례는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가늠자 노릇을 할 수 있을 듯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최근 서울시의 전면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와 관련해 직원들에게 투표 참여를 독려해 논란을 빚은 귀뚜라미그룹의 최진민(70) 회장은 공학박사로 보일러 관련 발명을 많이 해왔다. 이런 공로로 2006년에는 서울대·한국공학한림원이 발표한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에 선정됐다. 최 회장은 보일러 분야에서 220건의 특허와 실용신안을 보유해왔다. 시간이 흘러 소멸된 것을 빼도 96개나 된다. 최 회장뿐만 아니다. 그의 아들 성환(33)·영환(30)씨도 아버지 뒤를 이어 각각 수십 개의 특허를 갖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특허 부자(富者)’다. 부전자전이다. 하지만 이들이 보유한 특허가 직접 개발한 것이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18살 아들, ‘보일러 공기자동조절댐퍼’ 특허 신청
장남 성환씨는 2003년 귀뚜라미에 입사해 현재 본사가 있는 경북 청도에서 공장장(관리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처음으로 특허출원을 신청한 것은 1998년인 20살 때다. 철학을 전공한 대학생 시절에 ‘보일러의 순간 수압 평형장치’라는 아이디어를 근거로 특허출원을 신청했다. 성환씨는 이듬해에도 ‘가스보일러용 가스연소장치’ 등 3개의 특허를 아버지인 최 회장과 함께 신청했다. 병역 특례 근무를 마친 2004년 이후에도 해마다 2~4건을 신청했다. 시간이 지나자 신청 분야도 보일러를 넘어 에어컨까지 확대됐다. 2005년 ‘하향 송풍 방식을 이용한 에어컨 실내기’ ‘상하 송풍 방향 전환이 가능한 히트펌프형 에어컨’ 등의 특허출원을 신청했다. 성환씨가 이렇게 확보한 특허·실용신안권이 24건이다.
차남 영환씨도 특허 분야에서 출중한 ‘능력’을 보여왔다. 그는 성년이 되기도 전부터 특허를 신청하기 시작했다. 19살 때인 2000년 아버지가 발명했다는 ‘가스보일러의 버너’를 형과 함께 공동 권한을 가진 출원인으로 등록했다. 20살 때에는 단독으로 ‘벽걸이형 가정용 온수보일러’ ‘온돌 난방용 배관호스’ 등을 발명해 특허출원을 신청하는 등 계속 특허권을 획득했다. 영환씨가 지금껏 확보한 특허와 실용신안권은 19건이다.
이와 관련해 귀뚜라미 쪽은 “모두 자격과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라고 밝혔다. 방혜정 귀뚜라미 홍보팀장은 “(성환·영환씨가) 어렸을 때부터 발명가인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은 결과일 것”이라며 “장남인 성환씨는 대학 재학 시절 보일러산업기사 자격증을 땄고 2000년부터 병역특례를 귀뚜라미에서 마쳐 보일러 관련 지식과 실력이 있다”고 말했다. 방 팀장은 차남인 영환씨에 대해서도 “대학 시절 공학을 전공했고, 현재도 공학 분야에서 박사 과정을 밟는 등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귀뚜라미에 몸담았던 연구원들의 설명은 전혀 다르다. 최근 귀뚜라미그룹을 퇴사한 김민호(가명)씨는 “(성환씨가 권리를 갖고 있는) 분젠식 버너·연료전지 폐열 회수 시스템 등은 실제로 내가 보일러개발팀에서 일할 때 동료와 함께 개발한 것”이라며 “연소기술·유체기술 등 기계와 관련한 기술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특허까지 출원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10년간 귀뚜라미에서 일하다 퇴사한 연구원 최성식(가명)씨도 “귀뚜라미에서 일하는 동안 성환씨가 보일러 연구·개발에 참여한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며 “연구원들이 개발한 것에 최성환 실장의 이름만 얹은 것”이라고 말했다.
경쟁사들은 모두 법인 명의 특허
사실 최 회장의 특허도 회사 연구원들의 특허를 가로챘으리라는 의혹을 전부터 받아왔다. 최 회장이 공학박사 출신이기는 하지만, 워낙 광범위한 분야의 개발을 홀로 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보일러가 1990년대 들어 기계식에서 전자공학·기계공학·연소공학·재료공학 등 여러 분야 전문가가 한데 모여 머리를 맞대야만 만들 수 있게 되면서 의혹은 더욱 커졌다. 보일러업계의 한 연구원은 “귀뚜라미에도 연구진이 있어 발명을 하고 있는데 오너 일가의 이름으로 대부분의 특허가 출원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간다”며 “최 회장이 과거 연탄보일러 시절 많은 발명을 했던 것을 고려하더라도 인터넷으로 보일러를 제어하는 등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첨단 기술이 나와 여러 전문가들이 함께해야 발명할 수 있는 것을 회장 혼자서 다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업체의 연구원도 “고체와 액체 연료를 모두 사용하는 다목적보일러나 화목보일러, 전기보일러 등 다양한 보일러를 혼자서 개발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귀뚜라미에서 함께 일했던 연구원들도 최 회장 혼자 모든 것을 발명하지는 않았다고 증언한다. 귀뚜라미에서 일하다 최근 퇴사한 강형우(가명)씨는 “2007년 경북 청도공장으로 연구소가 합쳐지기 전까지는 최 회장이 2주에 한 번씩 인천·청도·아산 공장을 돌아다니며 개발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보고를 듣고 조언했다”며 “아이디어를 내거나 조언을 했지만, 실제로 개발 활동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1962년 창업한 귀뚜라미는 2007년 경북 청도에 연구소를 마련하기 전까지 인천·청도·아산공장 등에 개발팀을 뒀다. 최 회장은 이들 공장을 2주에 한 번씩 방문해 기술회의를 열었다. 강씨는 “특허가 출원된 것 중에는 직원들이 낸 아이디어로 특허까지 간 경우도 많고, 최 회장이 직접 아이디어를 냈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디어를 가지고 제품을 설계하고 이를 상품화하기 위한 수많은 세부 조정을 해 제품화한 것은 모두 연구실 직원”이라고 말했다.
현재 최 회장과 아들들은 수백 건의 특허와 실용신안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 귀뚜라미그룹이 법인 명의로 갖고 있는 것은 38건에 불과하다. 유사 사례를 찾기 어려운 경우다. 귀뚜라미의 경쟁 업체들과 비교해보면 상황을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경쟁 보일러업체인 경동나비엔이 324개, 린나이코리아가 808개(가스레인지 등 다른 분야 포함)에 이르는 특허와 실용신안을 법인 명의로 갖고 있다. 경동나비엔은 개인 명의 특허나 실용신안이 1건도 없다. 린나이코리아도 전직 직원 명의의 특허 1건이 개인 명의로는 유일하다. 이처럼 대부분의 기업들은 연구원이 개발한 ‘직무 발명’의 경우 특허 신청 때 발명자에 해당 연구원의 이름을 넣고, 사용권한을 갖는 출원인에 회사 이름을 넣는다. 대신 발명자에게는 일정한 보상을 해준다. 하지만 귀뚜라미는 직무 발명과 관련해 아무런 보상이 없었다. 이에 대해 귀뚜라미 임원은 “어차피 그 사람들은 그런 것을 하라고 뽑은 사람들”이라며 “회장의 아이디어가 바탕이 된 것이어서 그들에게 보상해줄 필요까지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최 회장은 귀뚜라미로부터 막대한 특허권 사용료를 받았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사이트에서 귀뚜라미 계열사들의 1999년 이후 감사보고서를 살펴보면, 최 회장은 2005년을 제외하고 매해 특허권 사용료를 받아왔다. 귀뚜라미(옛 귀뚜라미보일러)를 비롯해 귀뚜라미가스보일러, 귀뚜라미홈시스 등이 거의 매년 수십억원의 특허권 사용료를 지불해왔다. 귀뚜라미 등 3개사는 특허권 사용료로 최 회장에게 매년 15억~44억원을 지불했다.
최 회장, 특허 사용료로 10년간 286억 받아
2001년에는 3개사가 최 회장한테 지불한 특허권 사용 대가만 44억4083만원이나 됐다. 특히 귀뚜라미가스보일러는 2001년 24억7034만원을 최 회장에게 지불해 전체 매출(987억8037만원)의 2.5%를 특허권 사용료로 사용했다. 상황이 이렇게 이상하게 흐르자 2003년 국세청은 최 회장의 ‘특허 수입’에 제동을 걸었다. 당시 중부지방국세청이 관련 조사를 한 뒤 최 회장이 매출의 2.5%까지 특허 수입을 받는 건 과하다고 결정한 것이다. 방혜정 홍보팀장은 “2003년까지 최 회장이 관계 매출 수익의 2.5%를 특허권 사용료로 받았지만 이후 1.25%만 지급하고 있다”며 “국세청의 결정은 아이디어를 최 회장이 냈다더라도 신뢰성 테스트, 제품화 과정을 거쳐 수익이 발생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디어만으로 특허료 100%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최 회장의 특허 수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최 회장은 지난해 귀뚜라미로부터 18억원의 특허권 사용료를 받았다. 그렇게 최 회장이 받은 돈이 지난 10년간 총 286억6686만원에 이른다.
남희섭 변리사는 “첨단 제품을 만드는 삼성전자와 LG전자에서도 특허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기는 하지만 중견기업이 매출의 2.5%까지 특허권 사용료를 지불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귀뚜라미의 한 임원은 “최 회장이 본인의 재산을 불리려는 욕심이 있었다면 주식배당을 통해 받아갔을 것이다. 회장의 특허권이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받은 것일 뿐이다”라며 관련 의혹을 부인했다.
최 회장 아들들은 특허권과 관련해 사용료를 아직은 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특허권과 관련한 상품이 출시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품이 개발된다면 이들도 회사로부터 돈을 받게 된다. 귀뚜라미의 한 임원은 “향후 관련 특허와 연계해 상품이 개발된다면 회장님의 아들들도 특허권 사용료를 받게 된다”고 말했다. 그럴 경우 아들들도 회사 매출이 날 때마다 꼬박꼬박 특허 사용료를 받게 된다. 아버지와 회사가 도와준 특허를 매개로 ‘부의 편법 증여’가 이뤄질 수도 있는 셈이다.
“회사 이익 편취해도 견제장치 없어”
하지만 최진민 회장 일가가 다른 사람의 특허를 도용했으리라는 일각의 의혹 제기가 사실로 확인된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현행법상 ‘특허 도용’의 경우, 발명 당사자가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면 손해배상은 물론 특허권을 돌려줘야 한다. 법무법인 KCL의 김범희 변호사는 “특허는 기본적으로 발명한 사람에게 권리가 있고, 권리가 승계될 때도 발명진흥법에 따라 적절한 보상을 하도록 하고 있다”며 “정당한 특허 승계 절차 없이 발명자가 아닌 사람이 특허를 모의 출원했을 때는 특허를 찾아오는 소송을 하면 특허의 출원권을 찾아올 수 있고 부당이득도 돌려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귀뚜라미의 전직 고위 임원은 “귀뚜라미그룹이 비상장기업인데다 중견기업이어서 사회적 감시로부터 자유로운 편”이라며 “최진민 회장 일가가 특허를 이용해 회사의 이익을 사실상 편취하는데도 이렇다 할 견제장치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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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박수진 기자 한겨레 디지털뉴스부 jin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