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자이니치, 한국에 투표하다

내년 최초 부여되는 재외선거 투표권에 술렁이는 재일동포 표심… ‘총련 개입설’ 흘리는 민단과 발끈하는 총련 뒤로 적극적인 홍보 나선 한통련
등록 2011-09-22 08:47 수정 2020-05-02 19:26
» 일본 오사카 쓰루하시역 부근 재일동포 거주지역의 전봇대에 붙은 재외선거 홍보 포스터.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에서 붙였다. 현재 한국 법원에서는 한통련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과거 선고에 대한 재심이 진행 중이다. 한겨레21 정용일

» 일본 오사카 쓰루하시역 부근 재일동포 거주지역의 전봇대에 붙은 재외선거 홍보 포스터.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에서 붙였다. 현재 한국 법원에서는 한통련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과거 선고에 대한 재심이 진행 중이다. 한겨레21 정용일

“의도적으로 특정 인물을 미는 움직임도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인물 본위로 뽑고 싶다.”(신정의·65·도쿄)
“(한국에) 자신의 의견을 발신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다. 우리의 존재 의의를 나타내기 위해서라도 본국의 일을 더 알아야 한다.”(이양미·32·도쿄)
“나의 한 표가 어느 정도의 영향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반드시 투표하겠다. 일본에서는 한 번도 투표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기대된다.”(장도현·42·도쿄)
“한국인으로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기쁘다. 내게는 굉장히 무거운 한 표다. 한국이 좋아지길 바라며 투표하겠다.“(조도지·71·오사카)
“5년에 한 번 실시하는 (한국의) 대통령 선거 개표 속보를 항상 주목했다. 언젠가 나도 내 손으로 투표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박효자·49·도쿄)
“처음 하는 선거라 매우 기대된다.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체험하게 되면 (일본) 지방참정권 운동에도 활기가 붙을 것으로 생각한다.”(김진효·47·도쿄)

47만여명에게 투표권 주어줘
» 한통련이 재일동포들에게 재외선거 투표권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안내문과 설문지(왼쪽).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에서 발행하는 <민단신문>은 북한과 연계된 세력이 ‘친북정권 수립’을 위해 재외선거에 개입하려 한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한겨레21 정용일

» 한통련이 재일동포들에게 재외선거 투표권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안내문과 설문지(왼쪽).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에서 발행하는 <민단신문>은 북한과 연계된 세력이 ‘친북정권 수립’을 위해 재외선거에 개입하려 한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한겨레21 정용일

일본에 귀화하지 않은 자이니치(재일동포)들에게는 참정권이 없다. 일본 민주당 집권 뒤인 2009년, 영주외국인 지방참정권 부여가 본격적으로 추진됐지만 여전히 답은 나오지 않고 있다. 수십 년간 지방참정권 싸움을 해온 재일동포들에게 한국에서 먼저 날아온 투표권 부여 소식은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2012년 4월11일 치러지는 제19대 총선은 재외국민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지는 첫 선거다. 일본에서의 ‘삶’보다 한국인이라는 ‘피’에 무게를 두고 살아온 이들은 제19대 총선에 이어 6개월 뒤인 12월19일 제18대 대통령 선거에도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이런 이들이 어림잡아 47만여 명이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국정 투표에 대한 기대를 담은 몇몇 한국국적 재일동포들의 의견이 올라와 있다. 참여 자체에 의미를 둔다는 이도 있지만, 제한된 정보나마 인물이나 정책을 얘기하며 자못 진지하게 한국 정치를 들여다보는 이도 많다. 정신없이 요동치는 선거 판세에 넋을 놓게 될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축제처럼 흥겨운 선거판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일부 보수세력과 민단 중앙에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등 이른바 ‘반국가단체’에 소속된 이들의 조직적 선거 개입이 우려된다며 벌써부터 이념적 어깃장을 놓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재일동포 사회의 고민을 어떻게 선거에 반영할지는 뒷전에 놓인 느낌이다. 이미 민단-총련으로 이념적으로 분열된 재일동포 사회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선거판을 거치며 또 다른 균열을 맞닥뜨리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선거인 등록을 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투표하도록 해야 한다. 선거권을 행사하는 데 걸맞은 재외국민으로서의 자각을 키우고 재일동포 사회에 정치적 갈등을 가져오지 않고 건전한 선거가 이뤄질 수 있는 토양을 배양해야 한다.” 지난 8월15일 민단 중앙본부의 정진 단장은 광복절 축사에서 재외선거 참여운동을 벌이겠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민단의 ‘책무’로 ‘불순한 정치공작 배제’를 들고 나왔다. “한국에는 당연히 여당·야당이 있고 다양한 이념과 정책을 내세우는 정당·정치인이 존재한다. 이뿐만 아니라 북한 독재에 추종하는 세력도 재일 종북세력과 연계를 강화해 얕볼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다. 각각의 처지에서 재일 유권자에 대한 활동이 분명 강화될 것이고, 재일 사회에 정치적 당파성이 생겨 새로운 불씨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정 단장의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우리가 견지해온 불편부당이란,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헌법질서를 준수하는 범주에서만 적용되는 원칙으로, 북한 독재와 그 추종 세력을 결단코 용인하지 않는다. 본단의 전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런 조직적 입장은 재외국민 선거권을 행사하는 시대에 더 철저히 해야 한다.”

투표권이 있는지 잘 몰라

부분부분 뜯어보면 옳은 듯이 들리지만, 묶어서 보면 재외선거 참여운동 자체를 이념적 기반에 놓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앞서 민단에서 주간 발행하는 은 “친북정권 수립 조준… 북한, 한국 2대 선거 개입 공작” 등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즈음 한국에서도 보수신문을 중심으로 “총련 ‘내년 대선-총선 투표’ 한국국적 취득 움직임” 등의 기사를 찍어냈다. 민단의 이름을 빌려 쓴 추측성 기사는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과 북한, 총련이 연관돼 있고 이들이 투표권을 얻기 위해 조직적으로 국적 취득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투표권이 있는지 잘 모른다. 알아도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있어도 (투표를 위한) 여권이 없는 사람이 많다.” 재외선거를 앞둔 현 재일동포 사회의 단면은 ‘반국가단체’라는 들씌움을 아직 벗지 못한 한통련 쪽에서 들을 수 있었다. 지난 8월23일 한통련 부사무총장 겸 국제국장인 박남인씨를 일본 도쿄 아키하바라에 있는 한통련 사무실에서 만났다. 한통련은 재외선거를 홍보하는 인터넷 홈페이지와 안내문에 이어 설문지까지 만드는 등 민단보다 더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박 국장은 “일본에 흩어져 있는 지방본부 8곳을 중심으로 선전물 배포, 설문조사, 호별 방문 등을 하고 있다”며 “하지만 호별 방문을 나가면 ‘한국 국정이나 정치, 내부 문제에 관심 없다’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재일동포들이 발붙이고 사는 곳이 바다 건너 한국이 아닌 일본 사회인 만큼 ‘지금-여기’의 생활에 더 관심을 가진다는 얘기다. 박 국장은 “다만, 조선반도의 평화 문제에 대해서는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한통련이 만든 설문지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재일 한국인도 투표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투표할 생각이 있나 △총선에서 투표할 정당은 △대선에서 지지할 정당·인물은 △선거를 통해 어떤 분야의 정책이 실현되기를 바라나(재일동포 권익, 평화·통일, 한-일 관계, 기타) △한국 정부는 선거 홍보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등이다. 박 국장은 “투표권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재일동포가 굉장히 많다. 지난 1월 한통련 대의원대회에서 2012년을 ‘정치결전의 해’라고 보고 투표권 홍보 활동을 하자고 결정했다”며 “우리가 반국가단체로 규정돼 있는 탓에 특정 정당 지지·반대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우선적으로 선거홍보 활동에 힘을 쏟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내년 선거에서 민주·민생·평화를 파탄 낸 책임을 물어 정권 교체를 실현해야 한다”는 뜻은 분명히 했다. 그는 “선거가 다가오면 오히려 조직이 큰 민단 쪽이 보수정당 등에 투표하라고 조직적으로 움직일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총련 쪽은 재외선거 관련 질문에 손사래를 쳤다. “우리는 그런 질문에는 아예 답변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떤 말을 해도 북한이 조직적으로 남한 선거에 개입하려 한다고 그러지 않겠나.” 한 재일동포는 “총련 쪽은 한국국적자 자체가 많지 않다. 물론 개인적으로 투표하는 사람이 일부 있겠지만,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한다는 것은 이상한 얘기로 들린다”고 했다.

민단에도 총련에도 속하지 않은 오사카 코리아엔지오센터의 곽진웅 대표이사는 “어느 정당을 지지하자, 이런 정치활동 차원이 아니라 권리 차원에서 투표권을 적극 행사해야 한다”고 했다.

총련 개입 가능성 낮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외교통상부, 법무부, 대검찰청 등은 지난 9월8일 재외선거 관계기관협의회를 열어 총련계 한국국적자 등의 재외선거권 제한 방안을 논의했다. 외교통상부는 2000년부터 올해 7월까지 한국국적을 취득한 재일동포가 5만여 명이라고 설명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그렇다고 이들 모두가 총련계라는 말은 아니다. 총련 소속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했다.

중선관위 쪽은 중립적으로 진행돼야 할 선거관리 업무가 정치적 색깔을 띠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반응이다. 중선관위 관계자는 “정치권이나 언론 등에서 염려하는 취지는 알겠는데, 그렇다면 북한에서 탈북해 한국국적을 얻은 사람과 총련계 한국국적 취득자의 형평성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되물었다. 중선관위 쪽은 “반국가단체·이적단체 소속원의 선거권 제한도 사법적으로 판단이 이뤄져야 가능하다. 우리 국민이라는데 선거 참여를 막을 방법은 사실상 없다. 헌법적으로도 맞지 않다”고 했다. 9월8일 회의는 결국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났다. 9월14일에는 한나라당 윤상현 의원이 “해외에서 북한을 지지하는 세력이 국내 선거에 개입해 민의가 왜곡될 수 있다”며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다고 했지만 구체적 방안은 전혀 내놓지 못했다. 검찰 관계자는 “북한이 선거 국면에 적극 개입할 것이라는 정보기관의 첩보가 있다”며 “하지만 총련도 응집력 있게 움직이는 사람은 한정돼 있고, 총련 안에서도 ‘한쪽’으로만 투표가 이뤄질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부정적으로 봤다. 이 관계자는 “과거 군사독재 시절 일본 유학생 등이 한국에서 간첩으로 몰려 호되게 당했던 경험 탓에, 한국 정치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재일동포들의 정서가 강하다”면서도 “총련 개입 가능성이 낮을 수는 있지만 ‘오염된 표’가 한 표라도 들어오면 선거 직후 공정성 시비 등 한국 사회에 소모적 갈등이 빚어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첫 재외선거다. 일단 한번 선거를 치러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민단이든 한통련이든, 긍정적이든 이념적이든 재일동포 사회에서 재외선거가 조금씩 이슈가 되고는 있지만 투표율로 곧바로 이어지기 힘든 지점이 여럿 있다. 재미동포 사회는 1·5~2세가 중심이고 여전히 한국과도 가깝게 지낸다. 반면 재일동포 사회는 3세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는데, 3세만 해도 한국과의 거리감을 크게 느낀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 정부의 재일동포 정책도 걸림돌이다. 곽진웅 대표이사는 “1990년대 초반까지는 재일동포 정책이라는 게 북한과 총련에 대항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솔직히 말해 한국 정부가 재일동포에게 뭘 해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3·4세 젊은 재일동포들이 찾지 않는 민단의 영향력에도 회의적 시선이 많다고 한다.

한일 양쪽 참여 모색해야

재일동포들의 재외선거 투표권 행사를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일본에서 경험한 철저한 차별의 기억과 일본 내 우익보수 세력의 준동 때문이다. ‘일본에서 살고 지방참정권까지 요구하고 있지만 결국 너희는 한국인이다’라는 인식을 일본 사회에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곽 대표이사는 “한국과 일본 양쪽에 참여하는 열린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뿌리는 한반도에 둔다는 의미에서 재외선거 투표권을 행사하면서도 일본에서는 지방참정권을 모색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쿄·오사카(일본)=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