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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야간노동

WHO, “다이옥신보다 위험한 발암 요인”… 양으로 승부하는 한국의 노동 관행과 값싼 심야 전기요금 등이 야간영업 부추겨
등록 2011-07-14 07:08 수정 2020-05-02 19:26
» 심야의 값싼 전기요금은 유통·외식 업계의 24시간 영업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심야영업을 하는 맥도널드 매장 모습. 한겨레 박미향

» 심야의 값싼 전기요금은 유통·외식 업계의 24시간 영업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심야영업을 하는 맥도널드 매장 모습. 한겨레 박미향

“원고의 수면장애가 주야간 교대근무로 인해 발병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지난 1월 서울행정법원은 주목할 만한 판결을 냈다. 기아자동차의 생산직 노동자인 장호철(36)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불승인처분취소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놓은 것이다. 말하자면, 장씨가 낸 산업재해 신청을 거부한 공단의 결정이 틀렸다는 판결이었다. 장씨는 기아자동차에서 주야 2교대 근무를 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설사와 불면 등 질환을 앓았다. 보통 67kg이던 장씨의 몸무게는 당시 54kg까지 떨어졌다. 검진을 받아보니, 장씨는 수면무호흡증·수면각성리듬장애·불안장애 등을 겪고 있었다. 이 결과를 들고 장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공단의 결정은 소송의 시발점이 됐다.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은 우리나라 법원에서는 처음으로 업무 때문에 생기는 수면장애를 인정한 것이었다. 장씨는 “우리나라에서 야간노동이 노동자의 건강에 끼치는 영향을 확인한 만큼, 회사에서도 하루빨리 야간노동을 없애기 바란다”고 말했다.

유통 분야 24시간 영업 확산 추세

우리나라 노동자의 살인적인 노동시간은 국제적으로도 악명이 높다. 장씨가 일하는 기아자동차의 주야 2교대 근무도 노동자들이 주야로 1~2시간씩 초과노동을 할 때 가능한 것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를 보면, 2009년 기준 우리나라 노동자의 연간 노동시간은 2243시간으로 OECD 회원국 평균인 1766시간보다 477시간이 더 길다. 한국 노동자들은 미국(1681시간), 일본(1714시간), 독일(1390시간)의 노동자보다도 훨씬 오래 일했다. 그렇다고 효율이 높은 것도 아니다. 지식경제부가 OECD 자료를 재가공한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25.1달러로 OECD 회원국 중 28위를 기록했다. 1위인 룩셈부르크(73.9달러)와 비교하면 생산성은 고작 34% 수준에 불과하다.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노동 관행은 뿌리가 깊다. 화학섬유연맹·화학섬유노조로부터 지난 7월8일 넘겨받는 자료를 보면, 조사 대상이 된 35개 사업장 가운데 25개 사업장이 야간노동을 포함한 교대근무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조상 대상이 된 노동자 6302명 가운데 3775명(60%)이 야간노동을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미 야간노동을 없애기로 노사가 합의했지만 실행은 지지부진한 경우도 있다. 다름 아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업장인 현대자동차의 이야기다. 현대자동차 노사는 2005년 야간노동을 없애고 낮 시간 근무를 나눠 하는 주간 연속 2교대 시행 원칙에 합의했지만 6년째 시행을 미루고 있다. 이 회사의 부품 납품업체인 유성기업의 노사 갈등으로 야간노동 문제가 떠올랐지만, 현대자동차는 아직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유통·서비스 분야에서는 오히려 야간영업이 늘어나는 추세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편의점의 수는 올해 사상 처음으로 2만 개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편의점협회 자료를 보면, 지난해에만 3687개 편의점 점포가 문을 연 반면 문을 닫은 편의점은 880개에 불과했다. 지난해 말 기준 우리나라에는 1만6937개 편의점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커피 전문점들도 밤 시간을 공략하고 있다. ‘탐앤탐스’는 24시간 매장을 해마다 10개꼴로 늘려 전체 50곳이 넘는 24시간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카페베네, 엔제리너스 등 커피 전문점들도 24시간 매장을 점차 늘리는 추세다. 대형마트들도 야간 매출을 노리고 영업시간을 늘리고 있다. 홈플러스의 30여 개 매장과 이마트의 10개 매장도 밤샘영업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업체들이 야간영업에 쉽게 뛰어드는 원인으로는 값싼 심야전력 요금도 한몫한다. 우리나라 심야 산업용 전기요금은 낮 시간의 40% 수준에 불과하다. 값싼 전기요금이 야간노동을 부추기는 구조인 셈이다.

유럽, 야간노동 적극 규제

국내의 흐름은 노동자의 건강권을 강조하는 국외의 경향과는 대조를 이룬다. 특히 유럽국가들은 유통업계를 중심으로 야간노동을 적극적으로 규제하고 있다. 독일은 유통업체 종업원 휴식권 보장과 가정생활 보호를 목적으로 ‘상점영업시간규제법’을 1956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평일에는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30분까지, 토요일은 아침 7시부터 오후 4시까지만 영업하고, 일요일과 공휴일은 폐점하도록 하고 있다. 프랑스도 노동자의 휴식권을 위해 주중 영업시간을 밤 10시까지로 규제하고 있다. 물론 일요일에는 영업을 할 수 없다.

이런 규제는 야간노동이 노동자에게 끼치는 해악이 크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독일 수면의학협회의 자료를 보면, 야간 교대노동자의 80%가 수면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또 협회는 일반적인 노동자의 평균수명이 78살인 데 견줘, 야간 교대근무를 하는 노동자의 평균수명은 65살이라고 보고했다. 2007년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암연구소(IRAC)는 생체리듬을 교란하는 야간노동을 자동차 유해가스나 유해물질인 다이옥신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발암 요인이라고 보고했다.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게 야간노동이었다.

한국 정부는 야간노동에 대해 아직 표피적인 통계치만 내놓고 있을 뿐이다. 4년마다 한 번씩 이뤄지는 ‘근로시간 실태조사’가 근거가 되는 자료다. 이를 보면, 2003년에는 전체 사업장에서 일반적인 노동시간 가운데 밤 10시~아침 6시의 야간노동을 포함한 사업장의 비율이 21.6%이고, 이 사업장들에서 야간노동을 맡은 노동자의 비율은 42.7%인 것으로 집계됐다. 2007년에는 야간노동을 하는 사업장의 비율은 16.47%, 또 야간노동 사업장 가운데서 야간노동을 하는 노동자의 비율은 38.6%로 나타났다. 전반적으로 야간노동 사업장과 야간노동 노동자의 비율이 크게 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2003~2007년 야간노동이 이뤄지는 사업장의 월평균 야간근로 일수는 11.36일에서 17.14일로 오히려 늘어났다. 야간노동이 전반적으로 줄어들었지만, 정작 야간노동이 남아 있는 사업장의 노동강도는 더 높아졌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자료다. 고용노동부의 한 관계자는 “경기 흐름에 따라 사업장들이 야근 일수를 늘리는 등 변수가 있을 것으로 본다. 통계 조사가 간헐적으로 이뤄져서 신뢰성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6월부터 야간노동을 포함한 교대제 실태조사를 다시 벌이고 있다.

인력 충원 등 보완책 마련돼야

최명선 민주노총 안전보건국장은 “최대한 야간노동을 줄인다는 원칙에 따라, 야간노동이 불가피한 공공서비스 사업장이나 일부 산업 분야에 대해서는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해 인력을 늘리거나 쉬는 시간을 충분히 제공하는 등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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