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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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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의 가시관 쓴 대체복무제

등록 2001-07-12 00:00 수정 2020-05-03 04:21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반발로 국회 공청회 무기한 연기… 인권이냐 종교갈등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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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차원에서 도입을 추진했던 대체복무제가 종교갈등의 양상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한 차례 연기를 거쳐 오는 7월20일로 예정돼 있던 대체복무제 도입을 위한 국회 공청회가 무기한 연기됐다. 입법을 추진해오던 장영달 의원과 천정배 의원은 7월2일 홈페이지에 공동으로 발표한 입장글을 통해 “대체복무제 논의가 교리를 둘러싼 종교간의 갈등과 분쟁의 양상으로 비화되고 있다”며 “이에 대한 교계의 자율적 논의와 연구결과가 나올 때까지 공청회를 무기한 연기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빠르게 진전되던 대체복무제 도입이 무산될 위기에 놓인 것이다. 공청회 연기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지난 6월1일 발표된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반대성명이었다.

정부를 사탄의 조직으로 본다?

한기총은 성명을 통해 “여호와의 증인이 집총을 거부하고 병역을 기피하는 이유는 국가와 정부를 사탄의 조직으로 보기 때문”이라며 “대체복무제 도입은 그들을 위한 특혜입법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여호와의 증인의 수혈거부 등을 언급한 뒤 “종교의 자유와 소수의 인권보장을 내세워 여호와의 증인이 끼치는 폐해는 간과하고 마치 양심적인 종교인으로 포장하고 미화하는 발상은 위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여호와의 증인쪽은 “우리가 국가를 사탄으로 본다는 논리는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을 잡아갈 때 쓰던 논리”라며 “우리는 국가를 부정하지 않으며, 다만 국가의 명령과 종교적 신념이 배치될 때, 종교적 신념을 우선시하는 것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한기총은 성명발표 사흘 뒤인 6월4일 장영달 의원실과 천정배 의원실에 항의서한을 전달하기도 했다. 한기총은 53개 교단, 3만7천여 군데의 교회가 속해 있는 교회연합조직이다. 한국기독교회협의회(KNCC)가 진보적 성향을 띠는 데 반해 한기총은 보수적인 교단들의 연합조직 성격이 강하다.

대체복무제 법안의 초안이 공개되고 한기총의 반대성명이 나온 뒤, 장영달 의원 홈페이지는 찬반 양론으로 들끓었다. 인권적 차원에서 대체복무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과 이단종파에 대한 특혜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선 것이다. 6월 내내 이어졌던 논쟁은 점점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양상을 보였다. 장 의원은 “인터넷 사이트뿐 아니라 기독교 신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항의전화도 적지 않았고, 지역구의 기독교 인사들도 우려를 표시했다”고 전한다. 결국 기독교계의 압력이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정치인들을 위축시켜 공청회 무산으로 이어진 것이다. 국회의 입법 열기도 급격히 식어갔다. 장 의원은 “처음 입법이 추진되자 먼저 전화를 걸어 ‘나도 입법안에 서명하겠다’고 나섰던 의원들이 기독교계의 반발이 이어지자 모두 발을 빼더라”고 전한다.

한기총이 반대입장을 명확히 밝힌 상황에서 기독교계의 다른 한 축을 대표하는 KNCC의 입장이 주목된다. KNCC는 한기총과 함께 한국 교회연합운동의 양대 산맥일 뿐 아니라, 70년대부터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앞장서왔기 때문이다. 두 의원이 발표한 입장글에도 공청회 연기의 한 이유로 “KNCC에서 대체복무제에 대한 논의를 진행중이기 때문”을 들고 있다. KNCC 인권위원회 황필규 목사는 “대체복무제 도입에는 인권문제뿐 아니라 이단종파, 국방의 문제가 얽혀 있어 입장을 정하기가 쉽지 않다”며 “인권위 실무자들만으로는 결론을 내리기 어려워 KNCC 차원의 설문조사를 진행중이다”고 밝혔다.

KNCC 인권위원회는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하기 위해 현재 여성위원회, 교회와사회위원회 등 5개 위원회 150여명의 위원들에게 설문지를 발송한 상태다. 7월 중순까지 설문지를 취합한 뒤 입장이 발표할 예정이다. 현재 KNCC 내부에서는 찬성입장과 반대입장, 입장표명 유보 등 다양한 견해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 목사는 “이해 당사자들이 이단인 여호와의 증인만 아니라면 좀더 결론을 내리기가 쉬웠을 텐데…”라며 입장 정리의 곤혹스러움을 내비쳤다. KNCC의 입장은 앞으로 정치인들이 대체복무제 입법화를 추진화는 과정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곤혹스런 KN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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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총이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나섰지만, 기독교 내 의견이 ‘반대’로만 모아지는 것은 아니다. 한기총과 KNCC 등 여러 기독교 사이트에 “종교문제가 아니라 인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기독교 신자들의 의견도 상당수 올라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기총의 반대성명이 나오기 전인 지난 3월15일 부산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는 대체복무제에 대한 지지입장을 밝혔다.

부산 기윤실은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이단들의 문제로만 취급하고 마는 게 현실”이라며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의 인권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것과 같은 존귀한 인권”이라고 지적한다. 이어 “그들도 명백히 종교적 양심 때문에 감옥에 가는 양심범”이라며 대체복무제 도입에 찬성입장을 표명했다. 최근 기독교 내부의 반대입장 표명에 대해 부산 기윤실쪽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인이 아니라 기독교인 입장에서만 이 문제를 바라보는 일부 기독교인의 풍토가 안타깝다”고 말한다.

지난 6월 열린 시민사회단체의 양심적 병역거부 토론회에 참석했던 정진우 목사(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회원)도 “이단의 인권도 인권”이라며 “오히려 이단의 인권을 보장해줘야 그들을 비판할 자유도 생기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또한 정 목사는 “국가안보와 반공 이데올로기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한국 교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며 “빠른 시일 안에 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차원에서 대체복무제 도입 추진을 촉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기독교 내의 찬반양론이 엇갈리는 가운데 천주교와 불교계의 입장은 아직 유보적이다. 천주교 인권위쪽은 “종교간 갈등양상으로 비칠 우려가 있어 천주교 인권위 차원의 입장 표명은 어렵다”면서도 “천주교 인권위 소속 단체인 ‘군의문사 진상규명과 군폭력근절을 위한 가족모임’ 차원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사회단체 모임에 참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불교 인권위도 “현재로서는 뭐라 말하기 조심스럽다”는 입장을 밝혔다.

입법 추진이 좌초될 위기에 놓이자 시민사회단체가 적극 입법화 운동에 나서고 있다. 우선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활동을 벌여온 시민사회단체와 변호인단은 기독교계 원로와 시민사회단체 대표 등 각계의 견해를 모아 의견서를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제로 한 토론회 개최를 결정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제 도입운동을 펼쳐온 평화인권연대, 인권운동사랑방,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등 시민단체들은 “일부 기독교계의 반발 탓에 공청회가 연기된 것은 심히 유감”이라며 “시민사회의 여론 형성을 통해 다시 입법화를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제연합(UN) 인권위원회는 97년 결의를 통해 “종교적 이유든 정치적 이유든, 어떤 종교이든, 종교 내 어떤 교파이든 신념의 이유로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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