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몰상식한 시대, 이것이 법이다

[특집] 나머지 디딤돌 판결…

권세 믿고 설치는 자들을 상식의 이름으로 혼내준 다윗 같은 판결들
등록 2010-12-09 14:15 수정 2020-05-03 04:26


형사사법 부문- 검찰의 용산 참사 수사기록 비공개에 대해 국가가 배상하라는 서울중앙지법 판결

지난 12월1일 서울 용산 참사의 현장 ‘남일당’이 철거됐다. 유족들은 “남편이 저기에 있는 것 같다. 한 번만 들어가게 해달라”며 울부짖었다. 용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 9월28일 서울중앙지법 민사33단독(고연금 판사)은 검찰이 용산 참사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않은 것은 위법이라며 국가는 철거민 이충연씨 등 원고 4명에게 3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검찰이 수사기록을 공개하라는 법원의 결정마저 무시하면서 철거민들은 끝내 수사기록을 보지 못한 채 1심 재판을 받았다. 서울중앙지법은 법원의 결정을 거부한 검찰의 행위에 대해 “고의 내지 과실이 인정된다”며 이로 인해 “철거민들이 공정하게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밝혔다. 검찰의 오만함에 내려진, 늦었지만 반가운 법원의 꾸짖음이었다.

심사위원 20자평

한택근 검사님, 형사소송법 좀 지키세요. 국고 낭비하지 말고

임지봉 피고인의 수사기록 열람 등사권을 실질화한 판결

» 지난 12월1일 서울 용산구 남일당 건물이 철거되자 현장에서 숨진 고 윤용현씨의 아내 유영숙씨가 건물에 한 번만 들어가게 해달라며 울부짖고 있다. 연합

» 지난 12월1일 서울 용산구 남일당 건물이 철거되자 현장에서 숨진 고 윤용현씨의 아내 유영숙씨가 건물에 한 번만 들어가게 해달라며 울부짖고 있다. 연합



노동 부문- 교원노조 가입 현황 자료는 민감한 정보로 보호돼야 한다는 서울남부지법 판결

모든 일은 한 국회의원의 ’돌출 행동’으로 시작됐다. 지난 3월 조전혁 한나라당 의원이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전교조 조합원 명단을 제출받아 개인 홈페이지에 공개한다고 밝혔다. 전교조는 발칵 뒤집혔고, 전교조와 소속 교사 16명이 서울남부지법에 ‘전교조 교사 명단 공개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지난 4월15일 서울남부지법 민사합의51부(재판장 양재영, 배석판사 이종기·이혜민)는 “교원단체 및 교원노조 가입 현황 자료를 인터넷에 공시하거나 언론에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 재판부는 “일반 개인정보보다 높게 보호되어야 할 노조 가입 정보를 합리적 기준없이 공개하면 조합원의 권리가 부당하게 침해될 수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에 불복한 조 의원은 법원의 결정이 국회의원의 권한을 침해했다며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지만, 지난 7월29일 헌재는 재판관 9명의 전원 일치 의견으로 이를 각하했다. 또 법원의 결정에도 명단 공개를 강행한 조 의원에게 법원은 강제이행금 1억5천만원 지급 결정을 내렸다. 조 의원이 이행금 지급을 미루자 전교조는 지난 9월 직접 조 의원의 세비 압류에 착수했다. 가만히 있었으면 당하지 않을 망신이었다. 이런 걸 사서 고생한다고 한다.

심사위원 20자평

최은순 이념공세용 정보공개 남용의 차단

정연순 세상에는 알아야 할 것만큼 알려지지 말아야 할 것도 있음을



여성·가족 부문- 성과 본의 변경을 복리 차원에서 허가한 대법원 판결

이아무개(47)씨는 1982년 구아무개씨와 결혼해 이듬해 아들을, 1985년엔 딸을 낳고 이후 이혼했다. 아들은 아버지와, 딸은 이씨와 지냈다. 이씨는 2001년 4월 정아무개씨와 재혼하면서 살림을 합쳤고, 딸은 새아빠 밑으로 입양했다. 이씨는 “딸이 계부인 정씨와 성이 달라 이력서나 주민등록등본 제출 때 불편을 겪고 있다”며 “딸의 성과 본을 재혼한 남편의 것으로 바꿔달라”고 소송을 냈다.

지난해 12월28일 대법원 1부(주심 이홍훈)는 “이씨 딸의 친아버지가 변경을 반대하고 있고 성·본을 바꾸지 않은 친오빠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더라도, 범죄를 숨기는 등의 불순한 의도가 아니라면 당사자의 복리와 재혼 가족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원칙적으로 성·본 변경을 허가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씨의 청구를 기각한 원심을 뒤집은 것이다. 재판부는 “당사자가 변경을 원하고 있고, 양자로 입양돼 양아버지와 가족으로서의 귀속감을 느끼고 있는데도 성·본이 달라 취업 등에 불편을 겪고 있는 점이 인정된다”며 “성·본 변경을 남용한다는 이유로 이씨의 청구를 기각한 원심은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성·본 변경도 당사자 복리를 우선하라는 판결이었다.

심사위원 20자평

정연순 가부장제 전통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인간의 존엄

김태규 아버지 성만 고집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교육 부문- 특목고 출신 지원자를 우대한 고려대에 손해배상 선고한 창원지법 판결

2008년 11월 공아무개(21)씨는 고려대 수시모집에 지원했다. 고교 학교생활기록부 교과성적(내신)이 1등급인 공씨는 내신 위주로 학생을 선발한다는 고려대의 모집요강을 보고 기대를 걸었다. 결과는 불합격. 그 뒤 이상한 점이 드러났다. 자신보다 내신등급이 낮은 학생들이 합격을 한 것이다. 그들은 특수목적고 출신이었다. 이런 사실이 잇따라 드러나자 공씨를 비롯해 고려대 2009학년도 수시 2-2 일반전형에 지원했다 떨어진 학생 24명의 학부모는 지난해 3월 고려대 재단인 고려중앙학원을 상대로 각각 1천만~3천만원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지난 9월15일 창원지법 민사6부(재판장 이헌숙, 배석판사 김경희·박용근)는 고려대가 특수목적고 출신 지원자를 우대하기 위해 학교별 학력 차이를 전형에 반영하는 이른바 ‘고교등급제’를 적용했다며 “1인당 700만원씩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현행 법령은 고교등급제를 금하고 있다. 재판부는 또 “고려대가 영업 비밀이라는 이유로 구체적 전형 방법을 밝히지 않고, 탈락한 원고들에 관계된 전형 자료조차 제출하지 않고 있다”며 “따라서 이 전형 방법과 원고들의 탈락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 정부 들어 급증하는 교육 차별에 제동을 건 판결이었다.

심사위원 20자평

안진걸 사람에게 등급 매긴 민족고대 너무했네~

김태규 특목고 학생들만 골라 뽑으려는 편법 전형에 ‘철퇴’



환경 부문- 환경영향평가 절차의 중요성을 강조한 서울고등법원 판결

더 이상의 논의도, 의견 수렴도 없이 속도전으로 진행되는 ‘4대강 사업’의 굉음 속에서 환경 부문에 작지만 의미 있는 판결이 나왔다. 경북 문경시 주민 정아무개씨는 동네에 들어오기로 한 군사시설이 주민의 동의나 의견 수렴 절차도 없이 사업 승인이 나고 공사가 진행되자 국방부 장관을 상대로 국방·군사시설사업실시계획승인처분일부취소 소송을 냈다. 주민의 의견을 무시한 공사라는 것이다.

지난 9월2일 서울고법 행정7부(부장 곽종훈, 이재석, 이완희)은 “주민 공람 기간이나 주민 의견 제출 기간이 미처 지나기도 전에 사업승인을 한 행위는 환경영향평가상의 절차를 준수하지 않은 중대하고도 명백한 하자”라며 이는 “주민의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권리나 이익을 근본적으로 침해한 행위”라고 밝혔다. 사업이 이미 많이 진행된 것을 감안해 판결해달라는 항변에 재판부는 “그럴 경우 쾌적한 환경을 유지·조성하기 위한 환경영향평가 제도의 입법 취지를 무색하게 한다”며 개발 행위에 대한 규제 절차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4대강 공사가 많이 진행돼 사업을 접을 수 없다는 정부가 귀기울여 들어야 할 대목이다.

심사위원 20자평

한택근 환경영향평가 무시한 4대강 사업도 이참에~

최은순 환경영향평가 절대로 빼먹지 마세요



행정 부문- 촛불집회 참여단체라는 이유로 보조금 지급을 중단한 것은 위법하다는 서울고등법원과 대법원 판결

한국여성노동자회는 ‘새로 쓰는 여성노동자 인권 이야기’ 사업과 관련해 2008년 5월부터 2010년 12월까지 정부 보조금을 받기로 했지만, 촛불집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느닷없이 지급 대상에서 제외됐다. 황당했다. 이에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보조금 지급 중지 결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으나, 1심에선 졌다. 지난 7월21일 서울고법 행정5부(재판장 조용구, 배석판사 이형근·신혁재)는 1심 결과를 뒤집고 “보조금 지급 중지 결정을 취소하라”며 한국여성노동자회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여성노동자회가 불법·폭력 집회를 개최·주도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며 “행안부 장관의 결정은 사전 통지나 의견 제출의 기회도 주지 않은 위법한 처분”이라고 판시했다. 이 사건은 행안부의 상고로 대법원까지 올라갔지만, 지난 11월26일 대법원 3부(주심 박시환)는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대법원의 확정판결은 제멋대로인 보조금 지급 중단이 근절되는 쐐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심사위원 20자평

임지봉 시민단체 지원금에 권력이 자의적 판단을 할 수 없게 한 판결

안진걸 맘에 안 들면 비정부기구(NGO)도 쫓아내려던 행패에 제동을 걸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