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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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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시간·공간·생각



그가 떠나고 40년, 봉제공장은 이주노동자로 채워지고

노동운동은 자본의 기민한 변신 앞에서 갈 길을 잃었네
등록 2010-11-04 15:55 수정 2020-05-03 04:26
재단사·미싱사에겐 시간이 돈이다. 믹마가 빨리빨리 ‘아이롱’을 해야 공정이 돌아간다. 일은 밤 9시30분에 끝난다. 13시간 동안 믹마는 스팀다리미 앞을 떠나지 않는다. 일요일만 쉰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잠만 잔다.
 봉제공장으로 가득했던 서울 평화시장에는 이제 도매상가들만 남았다. 상인들로 항상 붐비지만, 노동자는 이곳을 떠났다. 한겨레 류우종

봉제공장으로 가득했던 서울 평화시장에는 이제 도매상가들만 남았다. 상인들로 항상 붐비지만, 노동자는 이곳을 떠났다. 한겨레 류우종

잿빛 구름은 한낮이 되었어도 하늘에서 비켜나지 않았다. 바람이 드세게 부는 날이었다. 오후 1시30분, 그는 석유를 끼얹은 제 몸에 불을 붙였다. 불꽃이 입술과 혀를 널름거리며 태웠다. 그의 말은 자꾸 흩어졌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쓰러진 그를 오후 2시, 구급차가 와서 실어갔다. 입술 없는 입으로 그는 병원에서 말했다. “배가 고프다….” 그리고 영영 말하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 끼니는 라면이었다. 전날 아침, 판잣집에 둘러앉아 식구들과 나눠 먹었다. 이틀 동안, 죽음을 결심한 제 몸에 그는 밥을 더 넣지 않았다.

가난한 노동에 불타는 더 많은 전태일

타버린 눈썹 사이로 눈물이 흘렀다. 붕대 감은 몸에서 진물이 흘렀다. 1970년 11월13일 밤 10시, 간호사가 다른 침대로 그를 옮기려 몸을 부축했다. 문득 고개를 치켜들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주린 제 몸에 불을 붙인 22살의 청년 노동자가 죽었다. 죽지 않고 살았다면, 40년을 더 버텼다면, 그는 김홍선처럼, 이승숙처럼, 믹마처럼 살았을 것이다. 쇠락하는 산업의 변두리 노동에서 끼니를 구하며 2010년을 겨우 견뎠을 것이다. 전태일은 죽었으나, 더 많은 전태일이 우리 곁에 살고 있다. 가난한 노동을 제 몸에 끼얹고 여전히 불타고 있다.


전태일의 시간- 40년

실내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하니, 김홍선(62)씨는 좀 살 만해졌다. 예전에는 종이컵에 담배꽁초를 짓이긴 쓰레기가 많이 나왔다. 치우느라 고역이었다. 이제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전부 바깥으로 나간다. 꽁초 치울 일도 없어졌다. 이 정도면 견딜 만하다. 새벽 5시에 일어나는 것도 견딜 만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아침 6시부터 오후 2시까지, 김씨는 서울지하철공사 군자차량기지 사무실을 청소한다. 역무원들의 책상을 일일이 닦는다. 쓰레기통을 비운다. 유리 출입문을 닦고, 사무실 바닥도 닦는다. 화장실 2개를 포함해 복도와 계단까지 치운다.

화장실 청소를 하면, 옛 생각이 난다. 그때, 평화시장 화장실은 1층에만 있었다. 수돗물도 1층에서만 나왔다. 시다들은 1층에 내려가 양동이에 물을 담고 4층 건물의 계단을 오르내렸다. 21살 김씨는 많이 실망했다. “서울에 오면 모든 게 번쩍번쩍할 줄 알았거든.” 1970년 3월, 처음 일하게 된 평화시장은 충남 예산의 고향집보다 못했다. 봉제공장 바닥에 깔린 다다미에 빈대가 슬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10대 소녀들은 공장에서 잠을 잤다. 재단사·미싱사의 허드렛일을 돕는 그들을 ‘시다’라 불렀다. 시다의 어린 피부를 밤마다 빈대가 물어뜯었다.

빈대의 배를 채워주고 아침에 일어나면, 시다들은 배가 고팠다. 양은 도시락에 보리밥과 김치를 담아 30원에 파는 아줌마들이 평화시장을 돌아다녔다. 달걀도 풀지 않은 라면을 50원에 파는 매점이 평화시장에 있었다. 매점에선 하나에 10원 하는 크림빵도 팔았다. 그래도 시다들은 1층에서 길어온 수돗물로 보리밥만 끓여 먹었다.

김씨는 그때도 지낼 만하다 생각했다. 김씨의 외삼촌이 평화시장 옆 중부시장에서 봉제공장을 운영했다. 평화시장에는 옷가게를 냈다. 해가 뜨면, 김씨는 옷가게 점원으로 일했다. 해가 지면, 봉제공장에서 시다 일을 거들었다. 외삼촌은 월급 2만원을 줬다. 하루 종일 시다 일을 하는 게 아니어서 김씨는 또래들보다 나은 편이라 여겼다. 그때 전태일을 보았다.

1970년 여름 무렵, “아마도 한두 달 동안” 전태일은 김씨의 외삼촌이 운영하는 봉제공장에서 재단사로 일했다. 그가 노동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는 아주 나중에 들었다. 재단사 전태일은 키가 작았다. 얼굴도 작았다. “땅땅했다”고 김씨는 회고했다. “뭐랄까, 아주… 아주 자그마했어.” 작고 조용한 22살 재단사와 수줍음 많은 21살 점원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던가. 웃으며 이야기 나눈 적이 있던가. 환갑이 지난 김씨는 그런 것까지 기억하진 못한다.

다만 전태일에 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우리 공장에 있다 그런 일 났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 외삼촌은 나중에 말했다. 전태일은 죽기 석 달 전, 공장을 그만뒀다. 외삼촌은 전태일 때문에 노동청 조사를 받게 될까 걱정했다. “자기 하나 죽는다고 뭐가 해결되느냐”고 말하는 미싱사도 있었다. 초등학교만 나와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던” 김씨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이야기를 그저 귓등으로 흘렸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집안에 누워 계시고, 오빠가 평화시장에서 미싱사로 일하고 있었다. 전셋돈 20만원을 주고 신당동 판잣집 단칸방에서 세 식구가 살았다. 김씨는 돈을 벌어야 했다.

평화시장 일대의 봉제공장은 건너편 창신동으로 옮겨왔다. 창신동 봉제공장에서 한 미싱사가 박음질을 하고 있다.한겨레 류우종

평화시장 일대의 봉제공장은 건너편 창신동으로 옮겨왔다. 창신동 봉제공장에서 한 미싱사가 박음질을 하고 있다.한겨레 류우종

계약직 청소부가 된 40년 전 ‘시다’

1979년, 평화시장을 벗어난 김씨는 중매로 만난 남자와 결혼했다. 남편은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얼굴은 못생겼지만 기술이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해 결혼했다. 결혼 이후 김씨는 집에서 두 딸을 기르며 부업을 했다. 머리끈에 꽃·나비·방울을 달면 하나에 2원씩, 한 달에 10만원을 벌었다. 마늘·도라지 껍질도 깠다. 하루 6천원을 벌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어쩐 일인지 부업이 줄었다. 함께 둘러앉아 마늘을 까던 동네 아줌마들이 하나둘 청소 일을 시작했다. 김씨도 1991년, 사무실 청소를 시작했다. 부모가 새벽에 일 나가면, 초등학생 두 딸은 저희끼리 일어나 밥을 챙겨 먹었다. 김씨는 첫 월급으로 39만원을 받았다.

이제 김씨는 7천만원짜리 전셋집에 산다. 남편은 평생 제 사업을 못하고, 남의 정비소에서 일했다. 10년 전, 남편은 기름 만지는 일을 그만뒀다. 대신 미니 승합차를 샀다. 택배회사에 일주일에 6만원을 내면 일감을 준다. 일용직 택배 기사다. “더 버는 것 같은데, 나한테는 한 달에 80만원만 갖다준다”고 김씨가 말했다. 2년마다 재계약하는 김씨는 한 달에 120만원을 번다. 그나마 계약직 청소부들이 노조를 만들어 그만큼 받는다.

두 딸은 나란히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큰딸은 인테리어 일을 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작은딸은 건설사 계약직이다. 1970년대 말에 미싱사를 그만둔 오빠는 용달트럭을 몰았다. 지난 9월, 뇌졸중으로 죽었다. 김씨 가족은 미싱·시다·정비에서 용달·청소·택배로 직업을 갈아탔다. 형편은 크게 나아진 바 없다. 그래도 지낼 만하다고 김씨는 말했다. “처음엔 일이 짜증나고 힘들었지만, 마음을 비우면, 항상 웃고 살면, 전부 괜찮아.” 울지 말고 웃어라. 그가 터득한 생존법이다. 그렇게 40년이 흘렀다.


전태일의 공간- 봉제공장

한국에 처음 도착한 날, 믹마 린부(38·가명)는 웃었다. 꿈결 같았다. 10년 전 겨울 김포공항에서 그는 난생처음 눈을 맞았다. 고향 네팔에도 눈은 내린다. 마을을 둘러싼 거대한 산봉우리 위로 만년설이 쌓여 있다. 그러나 네팔의 눈은 산에만 내린다. 한국의 눈은 평지에도 내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친구 소개로 일자리를 구했다. 인천·의정부의 가구·수세미 공장을 거쳐, 8년 전 서울 창신동 봉제공장에 왔다. 의정부 공장은 지저분하고 일이 힘들지만, 창신동 공장은 깨끗하고 일이 수월하다고 생각했다. 믹마는 피식 웃었다. “잘못 생각한 거죠.”

그는 ‘아이롱’ 담당이다. 다림질을 그렇게 부른다. 아침 8시면 눈을 뜬다. 아침밥도 못 먹고 허겁지겁 공장에 간다. 커피부터 마신다. 하루에 대여섯 잔은 마신다. 아침 8시30분부터 다리미를 잡는다. ‘아이롱’은 서서 하는 일이다. 하루 종일 서 있는다. 점심은 오후 1시부터 먹는다. 근처 밥집에서 식사를 배달해온다. 부대찌개가 제일 좋은데 보통 김치찌개가 온다. 된장찌개는 영 비위에 맞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밥은 5~15분 만에 먹는다. 그리고 곧장 일한다. 저녁은 오후 6시에 먹는다. 역시 5~15분 만에 먹는다. 그리고 곧장 일한다. 식사 시간에도 쉬지 않는다. 잠깐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일한다. 봉제 일에는 ‘마감’이 있다. 약속한 시간에 약속한 물량을 납품해야 돈을 받는다. 재단사·미싱사에겐 시간이 돈이다. 믹마가 빨리빨리 ‘아이롱’을 해야 공정이 돌아간다. 일은 밤 9시30분에 끝난다. 13시간 동안 믹마는 스팀다리미 앞을 떠나지 않는다. 토요일엔 저녁 7시에 끝난다. 일요일만 쉰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잠만 잔다.

사장을 ‘주인’이라 부르는 창신동 이주노동자

공장 밖을 나돌아다녀봤자 단속에 걸릴 걱정만 는다. 믹마는 여행비자로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창신동에는 믹마와 같은 네팔 노동자가 많다. 성수동은 베트남, 신당동은 몽골, 가리봉동은 중국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네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창신동에는 네팔 식당도 많다. 식당 사장들은 언제 어디서 단속반이 떴는지, 네팔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몇 년 전부터 단속이 심해졌다. 창신동에서 일하는 네팔 사람 수도 줄었다. 요즘엔 50~100명 정도가 창신동에 살고 있다.

그들이 사는 창신동에는 3~10명 정도 일하는 봉제공장이 1천여 개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봉제공장의 90%는 사업자등록증이 없는 ‘미등록’ 상태다. 버는 돈이 적으니, 정식으로 등록해 세금 내는 일을 업주들이 꺼린다. 1천여 개 봉제공장 가운데 부부·가족이 운영하는 가내공장을 제하면, 노동자를 고용하는 공장은 얼마 되지 않는다. 창신동에서 일하는 봉제 노동자는 300~400명 수준이고, 이 가운데 100여 명이 이주노동자라고 민주노총 이주노조 관계자는 설명했다. 창신동 네팔 노동자는 이들 100여 명 이주노동자 가운데 일부다. 원래는 가장 비중이 높았으나, 최근 중국·베트남 노동자 수가 늘고 있다.

월급 때문이라고 믹마는 생각한다. 그의 월급은 150만원이다. 그런데 일감이 떨어져 쉬는 날이 생기면, 하루에 6만~7만원씩 월급에서 뺀다. 한여름과 한겨울엔 창신동 전체가 사실상 개점휴업이다. 믹마는 월급으로 70만원을 받은 적도 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월급이 줄지만, 일을 더한다 해서 월급이 늘지는 않는다. 밤 10시까지, 일이 많으면 새벽 2~3시까지 일한다. 야근수당은 없다. 토요일에도 저녁까지 일한다. 휴일근로수당은 없다.

정해진 월급이 있고, 휴일·야근 수당도 있는 경기도 공단의 제조공장에 가는 게 더 낫다고 믹마는 생각한다. 그가 일터를 옮기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봉제 기술을 배워 고향에서 일하려는 꿈” 때문이다. 맡은 일은 ‘아이롱’이지만, 믹마는 원단 나르고 옷감 옮기고 다림질하고 안감 박음질하고 실밥 뜯고 청소하는 일을 모두 한다. “한국 사람들은 맡은 일만 하지, 딴 거 시키면 기분 나빠하죠. 우리는 시키는 일 전부 해요.” 겨울이면 적어도 서너 번씩, 여름에도 한두 번씩 감기에 걸린다. 네팔에서 옥수수 농사를 지을 땐 없던 일이다. 눈이 따갑고 목이 붓고 허리와 다리가 아프지만, 병원에 간 적은 없다.

1970년대 평화시장에선 시골에서 올라온 10대 소녀가 시다를 맡았다. 하루 16시간의 노동과 저임금, 열악한 노동조건 등을 견뎌낼 사람은 시골 소녀밖에 없었다. 2000년대 창신동에선 외국에서 건너온 이주노동자가 시다를 맡는다. 그래도 믹마는 창신동 업주들 사정을 헤아린다. 그는 사장을 ‘주인’이라 부른다. “옛날 주인들은 돈 벌었지만, 요즘 주인들은 배운 게 이것밖에 없어서, 다른 것 할 용기가 없어서 계속 버티는 사람들이죠. 창신동에는 힘든 주인들만 있어요.” 힘든 주인들은 임금과 환경을 신경 쓰지 못한다. 그곳에서 일할 젊은 사람이 이주노동자 말고는 없다. 그래도 괜찮다고 믹마는 말했다. “처음엔 힘들어도 버티면 괜찮아져요. 몸에 박여요.” 몸에 익을 때까지 참고 견뎌라. 믹마가 터득한 생존법이다. 창신동 봉제공장은 그렇게 버티고 있다.


전태일의 생각- 노동운동

14살짜리 시다는 사흘을 버티지 못했다. “티가 나도, 너무 나잖아.” 사장은 노동청 감독관에게 걸릴까 걱정했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소녀는 150cm의 키에 바싹 말라 있었다. 누가 봐도 너무 어렸다. 처음으로 취직한 봉제공장을 사흘 만에 그만뒀다. 이승숙(47)씨의 키는 그 뒤로 더 자라지 않았다. 봉제공장을 옮겨다니는 삶도 바뀌지 않았다.

1977년부터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했다. 첫 월급으로 1만원을 받았다. 공장에는 다락방이 있었다. 사람 머리 높이에 마루를 덧대 다락을 만들었다. 다락방에선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시다들은 허리를 굽힌 채 일하고 먹고 잤다. 어느 명절엔 15일 동안 연속 철야를 했다. 새벽 5시까지 일했다. 다락방에서 2시간을 자고 일어나 일했다. 일만 하면 조는 시다가 있었다. 18살이었다. 가위질하다 졸고, 밥 먹다 졸았다. 알고 보니 임신 중이었다. 누가 아이 아빠인지, 소문만 무성했다.

1970년대 평화시장에선 시골에서 올라온 10대 소녀가 시다를 맡았다. 하루 16시간의 노동과 저임금, 열악한 노동조건 등을 견뎌낼 사람은 시골 소녀밖에 없었다. 2000년대 창신동에선 외국에서 건너온 이주노동자가 시다를 맡는다.

그곳에서 그렇게 나이 먹긴 싫었으므로, 이씨는 야학에 나갔다. 박형규 목사가 있는 제일교회에서 평화시장 시다들을 모아 야학을 열었다. 저녁 8시에 일을 마치고, 중부시장에서 튀김을 몇 개 사먹고, 제일교회에 갔다. 검정고시 공부를 할 생각이었는데, 야학 언니·오빠들은 한문을 조금 가르쳐주고, 이내 근로기준법을 강의했다. 그래도 좋았다. 예전엔 퇴근길이 창피했다. 교복 입은 또래를 만나면, 팔목에 묻은 실밥이 창피했다. 야학에 다니면서 그런 부끄럼이 사라졌다.

1980년 봄, 평화시장 옥상에 노동자들이 모였다. 그들은 노래를 불렀다. “70년 전태일 이어받아 앞으로 앞으로…” 가사를 바꿔 를 불렀다. 그때까지 이씨는 전태일을 ‘무서운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전태일이라고 자기 영웅심에 죽은 사람이 있는데, 노조가 그 사람을 앞세운다. 노조에 들어가면 신세 조진다.” 공장을 옮길 때마다 사장들은 그렇게 말했다. 야학을 다녔어도 그 인상은 지워지지 않았다. 평화시장 옥상 농성장에서 ‘무서운 사람’ 전태일의 어머니를 처음 보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이야기를 잔잔히 들려줬다. 전태일을 새롭게 만났다. 그날 이씨는 소녀 시다에서 노동운동가로 거듭났다.

평화시장 시다로 출발해 청계노조를 거쳐 서울의류노조 간부로 활동한 이승숙씨가 10월27일 오후 청계천 ‘전태일 기념상’ 앞에 섰다.한겨레 류우종

평화시장 시다로 출발해 청계노조를 거쳐 서울의류노조 간부로 활동한 이승숙씨가 10월27일 오후 청계천 ‘전태일 기념상’ 앞에 섰다.한겨레 류우종

8시에 퇴근하자, ‘셔터 내리기’ 운동

청계피복노조는 전태일이 죽은 지 2주일 만에 결성됐다. 박정희 정권은 청계노조를 끈질기게 탄압했다. 노조 사무실을 폐쇄하고, 노조 간부를 구속하고, 노조 집회를 방해했다. 전두환 정권은 노조를 아예 해산시켰다. 전태일의 친구들이 모두 잡혀갔다. 청계노조를 복원하는 일이 급했다. “그래서 우리를 ‘복구세대’라고 불러요.” 이씨는 자취방에서 비밀리에 조합원을 모았다. 야유회 자리를 만들어 노조를 알렸다.

그래도 노조 사무실의 문을 닫을 순 없다. 백화점 부티크 숍이 운영하는 봉제공장, 대기업 브랜드 의류업체의 하청공장 등에서 미싱사·재단사·시다 등이 간간이 문을 두드린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노조를 찾아온다.

그 시절, 청계노조는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다. 1980년 봄, 11일의 옥상농성 끝에 청계노조는 임금인상을 쟁취했다. 그 물결은 사북·구로·마산·대구·이리 공단의 폭발적 임금인상 투쟁으로 번졌다. 신군부가 해산시킨 여러 민주노조의 복구 운동을 이끈 것도 청계노조였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85년 동맹파업을 성사시켰고, 이듬해에는 서울노동운동연합 결성을 주도했다. 서노련은 이후 전노협, 민주노총으로 이어지는 불씨가 됐다. 1987년 7월, 청계노조의 ‘복구세대’는 경찰이 폐쇄한 노조 사무실을 기습적으로 되찾아 장기 농성했다. 이를 신호탄으로 전국 사업장에서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번졌다.

1988년 마침내 노조 신고필증이 나왔다. 합법 활동의 길이 열렸다. 노조 사무장을 맡은 이씨는 평화시장을 다니며 노조를 알렸다. 사람들은 슬슬 피했다. 자신이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이씨를 ‘무서운 사람’으로 대했다. 두세 달이 지나자 사람들이 반응했다. “슬쩍 박카스를 주더라고요.” 그 말을 하는 이씨의 목이 멘다. 눈물도 흘린다. 시다의 박카스에 감격할 정도로 그는 간절했다.

‘셔터 내리기’ 운동을 했다. 저녁 8시에는 반드시 공장 일을 끝내자고 사장과 재단사·미싱사를 설득했다. 저녁 8시만 되면 평화시장을 돌며 공장의 셔터를 내렸다. 명절에는 반드시 쉬도록 단협을 맺었다. 납품한 만큼 수당을 쳐주는 이른바 ‘객공제’ 대신 정액을 따박따박 받을 수 있는 월급제를 도입했다. 1990년 단체협상에선 ‘유니온숍’ 을 도입했다. 평화시장에 취업한 모든 노동자가 노조에 자동적으로 가입되는 제도였다. 그것이 청계노조의 절정이었다. 그 뒤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원래 평화시장 업주들은 가게와 공장을 겸업했다. 단협은 평화시장 가게 협의회 대표들과 맺었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업주들이 봉제작업을 하청으로 돌렸다. 가게만 운영하고, 생산은 창신동의 가내공장에 떠맡겼다. 돈이 더 많은 업주들은 아예 중국·베트남으로 공장을 옮겼다. 재단사·미싱사·시다 등 노동자들이 평화시장을 빠져나갔다. 최대 2만 명이 가입할 것으로 기대한 ‘유니온숍’은 껍데기만 남았다. 창신동에 취업한 노동자들은 1970년대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에서 일했다. 청계노조의 힘은 그곳까지 가닿지 못했다.

나름대로 변신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의류산업 노동자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으로 거듭나려 했다. 1998년 서울의류노조와 통합했다. 서울 지역 의류업체의 영업·판매직까지 더하면 서울의류노조의 잠재적 조합원은 30만 명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조합비를 내는 조합원은 150여 명이다. 이름만 올려둔 조합원을 더해도 400여 명이다. 조합 전임자의 활동비도 지급하지 못한다. 위원장을 포함해 2명의 전임자만 두고 있다. 1998년 서울의류노조가 출범한 뒤, 김정호 위원장이 줄곧 이끌고 있다. 김 위원장은 이씨의 남편이다. 1994년에 결혼했다. 이씨는 남편만이라도 노동운동에 전념하길 바랐다. 미싱사·보험설계사 등으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지금은 서울의류노조 기술교육센터 사무장을 맡고 있다. 노동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한다. 서울의류노조의 명맥은 이를 통해 간신히 유지되고 있다.

여전히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가난한 이들

이씨가 청춘을 바친 노조는 자본의 기민한 변신 앞에 갈 길을 놓쳤다. “사업자가 아니라 정부 정책과 맞서야 하는데, 이젠 나이가 들어 힘이 부친다”고 이씨는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이씨의 작은 몸이 잠깐 떨린다. 회한이거나 설움일 것이다. 그래도 노조 사무실의 문을 닫을 순 없다. 백화점 부티크 숍이 운영하는 봉제공장, 대기업 브랜드 의류업체의 하청공장 등에서 미싱사·재단사·시다 등이 간간이 문을 두드린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노조를 찾아온다. 전태일은 가난했으나, 더 가난한 이를 아꼈다. 그래서 노조를 만들려 했다. 전태일의 꿈은 노동자가 존중받는 일터를 만드는 것이었다. 키가 작은 전태일의 꿈을 키가 작은 이씨는 놓아보낼 수 없다. 그 꿈을 붙잡고 일생을 살아냈다. 그 꿈조차 잃는다면, 전태일마저 잊어버린다면, 어찌 가난한 노동을 버텨내겠는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전태일 약전
남루했으나 숭고하게 타오른 삶

전태일은 1948년 음력 8월26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전상수는 봉제 노동자였다. 가내수공업도 했으나 거듭 실패했다. 어머니 이소선의 친아버지는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동네 뒷산에서 일제 경찰에 죽임을 당했다. 1954년 식구 모두 서울에 올라왔다. 가족은 서울역 근처 염천교 밑에서 노숙했다. 어머니는 만리동 일대를 다니며 동냥했다. 전태일은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했다. 동대문시장에서 행상을 했고, 신문배달·구두닦이 등을 전전했다. 17살이 되자 평화시장 삼일사에 시다로 취직했고, 이내 재봉사·재단사 등으로 일하게 됐다.
재단사가 된 전태일은 어린 여공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겼다.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법전을 사서 혼자 공부하면서 노동자의 권리에 눈을 떴다. 주변 동료를 모아 1969년 ‘바보회’를 만들었다. 이듬해엔 ‘삼동친목회’로 모임 이름을 바꾸었다. 1970년 평화시장 일대의 노동실태를 조사해 노동청에 근로조건 개선 진정서를 냈다. 당국의 무관심과 냉대에 크게 실망했으나, 스스로 시위를 열어 세상의 관심을 촉구하려 했다. 경찰과 사업주의 방해로 시위가 실패하자, ‘근로기준법’ 법전을 불태우는 집회를 새로 준비했다. 1970년 11월13일 오후 1시30분 ‘근로기준법 화형식’ 현장에서 분신했다. 11월18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장례식이 열렸고, 11월27일 청계피복노조가 결성됐다.
1981년 청계노조 활동가를 주축 삼아 ‘전태일 기념관 건립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나중에 ‘전태일 기념사업회’로 이름을 바꿨다. 1983년 이 출간되면서, 생전에 남긴 수기 등이 세상의 빛을 봤다. 1987년 11월 ‘전태일 정신 계승 노동자대회’가 처음 열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8년에는 전태일문학상, 전태일노동상 등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2005년 9월 청계천 다리에 전태일 기념상이 세워졌다. 40주기인 올해는 청계천 ‘버들다리’를 ‘전태일 다리’로 개명하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추모제 등 다양한 행사는 ‘전태일 40주기 행사위원회’ 홈페이지(www.chuntaeil.org/40/)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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