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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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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졌던 미래, 백제와의 낯선 만남



승자가 지워버린 패자의 역사… 알수록 빠져드는 매력
등록 2010-09-14 22:34 수정 2020-05-03 04:26

6세기 후반, 장기간 지속되던 중국의 분열이 끝났다. 남조와 북조, 유연과 고구려를 각기 중심축으로 삼았던 4강의 시대가 끝나고 유일 초강대국 수나라가 등장한 것이다. 4강 사이에서 세력 균형자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던 고구려로서도 불가항력이었다. 이때부터 동아시아 사회는 대살육의 시대로 접어든다. 수십만의 희생자를 낸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 그리고 당과 신라에 의한 백제와 고구려 멸망은 장기간 지속되던 세력 균형 상태가 깨진 결과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자신의 칼로 살해하고 전쟁에 나간 계백, 중학생 나이밖에 안 된 아들 반굴에게 전쟁에 나가 죽을 것을 강요하는 아버지 김흠순(김유신의 아우), 적군의 칼에 잘려 말 안장에 매달려 돌아온 아들의 목에서 흐르는 피를 옷소매로 닦던 아버지 김품일. 이들의 비극은 당시 사람들이 처해 있던 현실이 얼마나 절박하고 그들의 선택이 또 얼마나 극단적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영화로 희화화하거나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애국주의 교육의 소재로 삼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광경이다.

삼국통일…의자왕과 삼천궁녀 ‘탄생’
이 잔인한 살육의 시대에서 마지막 승자는 신라였다.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이들보다 100년 전에 이미 신라에 통합된 가야는 역사의 패자로 인식됐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삼국통일의 뒷면에는 이런 아픔이 스며 있다. 당시 관점에서 백제는 분명히 패자였다.
서기 660년 봄부터 백제의 도성 사비에서는 온갖 괴이한 일이 이어졌다. 백제의 멸망을 예고하는 사건들이었다. 왕도의 우물이 핏빛으로 바뀌는가 하면 귀신이 궁궐로 들어와 “백제는 망한다!”라고 외치는 등 수많은 기상이변과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 과연 이 해에 당과 신라의 대규모 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맥없이 무너졌다. 성충과 흥수의 충성심도 계백 장군의 희생도 백제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도성은 불타고 왕릉은 도굴되고 백성들은 죽거나 노비로 끌려갔다. 의자왕은 충신을 멀리하고 주색을 탐한 결과 나라를 망하게 한 어리석은 왕으로 낙인찍혔다. 그리고 낙화암과 삼천궁녀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이상이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 최후의 모습이다.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으로 대표되는 고구려인의 강성함과 비장함, 김유신과 김춘추로 집약된 신라인의 호국정신과 비교할 때 백제의 이미지는 지극히 부정적이다. 게다가 고대 한국사 연구의 기초 자료인 와 에도 백제에 대한 내용은 턱없이 부족하다. 일반 대중에게나 역사 연구자에게나 백제는 그다지 탐탁지 않은 존재였다.

무령왕릉 현실

무령왕릉 현실

무령왕릉, 백제의 새 발견

1971년 우연히 공주에서 무령왕 부부의 무덤이 전혀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면서 고구려·신라·가야와는 다른 백제 문화의 화려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1990년대에 풍납토성의 발굴 조사가 연이어 진행되면서 비로소 백제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온조와 비류가 정착한 지점이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 한복판이었고 이곳에서 백제사가 수백 년간 지속됐다는 당연한 사실은 공주와 부여만이 백제사의 무대라고 생각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2007년 창왕(위덕왕)이 먼저 죽은 아들을 위해 만든 왕흥사지 사리기가 발견됐고, 2009년에는 무왕과 선화 공주의 사연이 얽혀 있는 미륵사지에서 호화찬란한 귀금속 사리기가 발견됐다. 나약함과 무력함으로 인식되던 백제 문화의 전혀 다른 면모가 드러난 것이다. 화려한 백제 문화의 부활이었다.

일본과 중국, 동남아시아를 무대로 번지던 한류 열풍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향하고 있다. 우리의 의식 수준도 ‘우리 민족 제일주의’ ‘우리 문화 최고주의’라는 협소하고 배타적인 틀을 넘어 아시아라는 가치를 공유하면서 세계인을 지향하고 있다. ‘다문화가정’ ‘다문화사회’라는 단어도 이제 더는 낯설지 않다. 이 모든 흐름이 단군 이래 처음 겪는 일인 양 호들갑을 떨지만 실은 이미 1500년 전 백제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3세기대부터 중국 왕조와 원거리 교섭을 추진한 백제인들은 풍납토성을 비롯한 많은 유적에 수백 점의 중국 물건을 남겼다. 중국 저장성의 월주요에서 구운 청자와 덕청요에서 구운 검은색 자기는 백제의 중앙은 물론이고 먼 지방의 수장묘에서도 발견된다.

4세기 이후 백제의 선진적인 문물은 이웃한 가야와 신라, 그리고 바다 건너 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중에는 백제의 원천 기술로 만들어진 것도 있지만 고구려나 중국, 멀리 서역에 기원을 둔 것도 적지 않다. 외부의 선진 문화를 수용해 자기 것으로 만든 뒤, 주변에 일종의 보급판을 확산시키는 데 백제인들은 탁월했다.

(위) 삽화문이 있는 무령왕비 관식.권오영 한신대 교수 제공 (아래)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양기석 충북대 교수 제공

(위) 삽화문이 있는 무령왕비 관식.권오영 한신대 교수 제공 (아래)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양기석 충북대 교수 제공

‘다문화’, 단군 이래 최초라는 착각

이런 능력은 백제 문화의 개방성에서 기인했다. 중국 역사책을 보면 백제 땅에는 중국인, 가야인, 일본인이 섞여 거주한다고 했다. 4세기 전반 낙랑군과 대방군이 한반도에서 쫓겨나면서 발생한 난민 중 많은 수가 백제에 정착했다. 일본 쪽 역사책에 따르면 태어난 곳은 일본이지만 평생 백제를 위해 활동한 장군과 관료가 여럿 나온다. 이렇듯 다문화사회가 형성될 수 있던 배경에는 백제인의 열린 자세가 깔려 있었다.

비단 중국이나 일본 출신만이 아니었다. 4세기 침류왕 때 처음 불교를 전한 호승 마라난타는 그 이름을 볼 때 인도 출신임이 분명하다. 그는 서울 강남 어딘가에 세워진 사찰에 거주했는데, 이때 어떤 형태로든 인도 문화가 소개됐을 것이다. 6세기 전반 중국 양나라에 파견된 백제 사신은 양나라의 도성인 남경을 무대로 세계 각지에서 온 사신들과 조우했다. 라는 그림에 표현된 12개국의 사신 중에는 백제와 왜 이외에도 실크로드 지역의 구자국(구차), 현재의 이란 땅에 해당하는 파사국(페르시아) 사신이 포함돼 있었다. 백제와 서역의 만남은 이미 이때 이곳에서 이뤄진 것이다.

사비기에는 동남아시아 민족과도 교섭이 이뤄졌다. 일본 쪽 사서에 따르면 성왕은 인도차이나반도에 거주하던 크메르족의 재물과 노예 2명을 긴메이 천황에게 선물로 주었으며, 의자왕대에는 무슨 일 때문인지 백제 사신이 동남아에서 온 사신을 물에 빠뜨린 사건이 일어났다.

백제의 이런 원거리 교섭은 유적과 유물에 반영돼 있다. 무령왕릉의 구조는 직접적으로는 중국 남조의 벽돌 무덤을 모델로 삼았지만 아치형 구조물의 원류는 멀리 서쪽에 있다. 왕비의 금제 관식 무늬는 꽃병에서 곧게 뻗은 줄기에서 화사한 꽃이 피어오르는 모습인데 ‘삽화문’이라 불리는 이 무늬는 인도와 페르시아에 널리 퍼져 있으며, 중국을 거쳐 백제에 도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고대국가 중 글로벌화에 가장 접근한 것은 백제라고 할 수 있다.

(좌상) 중국 남조묘의 삽화문 /(좌중)이란 저메모스크의 삽화문/ (좌하)미륵사지석탑과 금제사리호/ (우상)〈양직공도〉의 백제 사신 /(우하)미륵사지석탑에서 출토된 금제사리 봉안기 앞(위)과 뒤

(좌상) 중국 남조묘의 삽화문 /(좌중)이란 저메모스크의 삽화문/ (좌하)미륵사지석탑과 금제사리호/ (우상)〈양직공도〉의 백제 사신 /(우하)미륵사지석탑에서 출토된 금제사리 봉안기 앞(위)과 뒤

고대의 한류

백제를 동아시아 문명 교류의 중심축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유는 선진 문물의 단순한 수입에 그친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에 널리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바다 건너 일본 고대 문명 형성에는 백제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각종 제도와 사상, 기술이 백제에서 일본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달력, 음양오행, 풍수, 유학과 불교, 도교와 신선 사상, 의학, 약학, 문서 행정, 회화, 정원 조경술, 기와, 불상과 탑, 건물지로 구성된 사찰, 말의 사육, 유리와 금공제품 제작 기술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상과 기술이 일본에 전래됐다.

일본 고분 시대 물질문화의 변동, 아스카 시대와 나라 시대의 번영은 백제를 빼고서는 이야기하기 힘들다. 백제가 일본에 끼친 영향은 여러 형태를 띠었다. 당대의 최고 지식인·학자·기술자가 정해진 기간에 일본에 파견돼 활동한 뒤 기한이 다하면 귀국하거나 그대로 정착하기도 했고, 때로는 수십∼수백의 무리가 일본열도 곳곳에 정착해 현지인들과 살아가기도 했다.

그 결과 일본열도 곳곳에서 백제식의 가옥과 토기가 많이 발견됐다. 특히 ‘부뚜막’이란 새로운 난방 및 조리 시설을 갖춘 가옥에서 시루를 이용해 곡물을 쪄먹는 풍습은 백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백제를 고향으로 두고 일본에 정착한 이주민들은 죽어서도 고향식 무덤에 묻혔다. 금속제 장신구를 착용한 채 목관에 모셔진 주검을 굴식돌방무덤에 부부 단위로 나란히 안치하고 모형 부뚜막과 시루, 솥 등을 부장하는 풍습이 확인되면 일본인 연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도래인’, 즉 한반도계 이주민의 무덤이라고 인정한다. 이들의 고향이 한반도의 어디인지가 문제가 되는데, 대부분은 백제 지역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오사카와 나라를 비롯한 긴키 지역에 이주 정착한 백제인 수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발견되는 유적과 유물의 수를 감안할 때, 그들 스스로 지금 일본에 있는지 백제에 있는지 모를 때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일본 오사카 쓰루하시에는 한국인 거주지와 시장이 있고 전철만 타면 이곳저곳에서 한국어가 들리는데 고대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곳곳에 코리아타운이 서 있고 충청도·전라도 말이 불쑥불쑥 들리는 그런 정황이었음이 틀림없다. 백제계 이주민들은 점차 일본 사회에 동화해나갔지만 그들이 가져온 새로운 기술과 학문, 사상과 정보는 일본 사회를 크게 변모시켰다.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도 백제식의 옷과 음식, 놀이, 장례 풍습이 유행해 가히 백제풍이 거세게 불었던 것이다.

문화강국, 지식대국

일본에서 백제풍이 거세게 분 이유는 백제 문화의 수준이 매우 세련되고 고급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추측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4세기 중반 근초고왕대에 태자인 근구수를 도와 고구려와 전투를 치르던 막고해는 확전을 꾀하려는 태자를 말리면서 “도가의 말을 들어보니 족(足)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한다”라는 멋진 조언을 하고 있다. 일개 무장에 불과한 막고해가 이 정도라면 당시 지식인들의 학문적 수준은 얼마나 높았을까?

6세기 전반 중국 양나라에서는 ‘서성’ 왕희지의 글씨를 재현했다는 명필 소자운의 명성이 대단했다. 어느 날 소자운이 동양태수로 발령받아 임지로 떠나는데 백제 사신이 나타나 글을 얻기를 청했다. 소자운은 배를 멈추고 3일간 30장의 글자를 써주고 금화 수백만을 받았다고 한다. 명필의 글씨를 받기 위해 바다 건너 남경에 들어가서 부임지로 가는 그를 몸으로 막으면서 거리낌 없이 막대한 돈을 지출할 정도로 백제인들은 서예에 열심이었다. 이런 노력으로 부여에서 사택지적비가 나오고, 익산에서 유려한 글씨에 심오한 내용의 사리봉안기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군사력은 고구려와 신라에 비해 열세였을지 몰라도 문화적인 능력과 지식의 축적 수준은 백제가 최고였다고 할 수 있다. 군사력이 최고의 가치였던 대살육의 시대에 백제는 실패했지만 새로운 21세기에는 백제의 국가 전략을 새롭게 평가할 만하다. 중국의 다민족통일국가론과 동북공정, 일본의 구석기 날조 사건과 고대 한-일 관계사 왜곡, 북한의 단군릉 발견과 대동강문화론 등은 모두 배타적 국수주의의 산물이다. 인구나 군사력에서 중국과 일본에 뒤지는 대한민국이 이들과 끊임없이 군사적 갈등을 감수하며 경쟁을 벌이는 것이 과연 현명한 대처일까? 역사분쟁이 역사전쟁으로, 역사전쟁이 영토분쟁으로 확산되는 흐름을 무책임하게 방조할 것인가?

지난 참여정부 시절 제시됐던 동북아균형자론은 비록 냉엄한 현실 외교에서 실패했지만 이런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는 고민은 고대에도 지금도 엄존한다. 대한민국의 21세기 국가 전략을 ‘군사강국’ ‘영토대국’으로 설정할 것인가, 아니면 ‘문화강국’ ‘지식대국’으로 설정할 것인가? 비록 1400년 전 백제는 실패했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은 백제인의 전략을 다시 한번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대백제’라는 용어는 이런 점에서 재음미돼야 할 것이다.

권오영 한신대 교수·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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