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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보다 뜨거웠던 사랑


국경을 초월하고 목숨마저 내던진 백제의 연인들

제828호
등록 : 2010-09-13 18:04 수정 : 2010-09-15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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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초월하고 목숨마저 내던진 백제의 연인들

오늘날 대중문화에서 사랑은 압도적인 소재다. 대중문화가 재현하는 사랑은 차고 넘치는 스펙터클이다. 스펙터클한 대중문화에 휩싸여 사는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런 우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고대인도 사랑을 했을까? 빤한 대답이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사랑을 했다. 다만 사랑도 시대와 문화의 특성을 일정하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고대의 사랑이 오늘날의 사랑과 똑같은 모습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펙터클해야만 사랑은 아니다. 고대인은 지금보다 훨씬 지독한 사랑을 하지 않았을까?

신라인의 사랑 유형에는 지략과 화해의 사랑, 감응과 승화의 사랑, 경계를 초월하는 사랑이 있었다고 한다(최정선, <신라인들의 사랑>, 프로네시스, 2006). 그렇다면 백제인의 사랑은 어땠을까? 백제 설화로 전해오는 대표적인 사랑 이야기로는 잘 알려진 ‘무왕과 선화 공주’를 비롯해 안장왕과 한씨 미녀’ ‘도미 부인과 개로왕’ ‘아사달과 아사녀’ 등이 있다. 이 사랑 이야기들은 국경을 초월한 사랑, 신의와 정절의 사랑, 기다림과 이별·배려하는 사랑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한마디로 기꺼이 목숨을 거는 사랑이다.

성흥산성 ‘사랑나무’

국경을 초월한 사랑

무왕(서동)과 선화 공주

무왕과 선화 공주와 관련된 전설은 부여 궁남지, 익산 미륵사지 전설도 있다.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용화산 남쪽 기슭에 국내 최대 규모의 미륵사터가 남아 있다. 미륵 삼존이 나타난 연못 위에 무왕이 부인의 권유로 지명법사에게 명해 절을 세웠다고 전해지며, 익산시에서는 해마다 서동축제가 열리고 있다. 또한 충남 부여군 임천면 성흥산성에는 ‘사랑나무’로 불리는 400여 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SBS 사극 <서동요>에서 서동과 선화 공주가 사랑을 나누던 곳으로, 새로운 전설의 현장이 되고 있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어머니가 홀로 되어 집을 서울 남쪽 못가에 짓고 살았는데, 못에 있는 용과 교통해 그를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며, 도량이 한없이 넓었고 날마다 마를 캐어 팔아 생활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서동이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갔다. 그가 서울의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자, 여러 아이들이 가까이 따랐다. 그는 마침내 이런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선화 공주님은

남 그윽히 얼어 두고

맛둥방을

밤 몰래 안고 가다.

이 동요가 장안에 퍼져 궁중에까지 알려지니 신하들에 의해 공주가 귀양을 가게 되었다. 공주가 떠나려 할 때 왕후가 순금한 말을 주어 보냈다. 공주가 귀양 가는 길에 서동이 나와서 절을 하고 모시고 가겠다고 하고, 공주는 그가 미더워 따라가게 되었다. 그런 뒤 어머니가 준 금을 내놓으며 함께 백제로 가서 이것으로 생활을 영위하자고 했다. 서동은 “내가 어려서 마를 캐던 곳에는 이것이 진흙처럼 쌓였다”고 하자 공주가 듣고 깜짝 놀라 “이것은 천하의 보배인데 당신이 금이 있는 곳을 알았으니 이 보배를 우리 부모의 궁전으로 보내자”고 했다. 서동이 “좋소” 하고 금을 모으니 그것이 구릉처럼 쌓였다. 서동은 진평왕으로부터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고봉정

<춘향전> 모태가 된 사랑

안장왕과 한씨 미녀

안장왕과 한씨 미녀는 고소설 <춘향전>의 모태가 되었다(신채호)는 백제 미인 한주와 고구려 제22대 안장왕의 극적이며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두 사람의 숭고한 사랑은 국경을 넘어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다.고구려는 백제에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애쓰던 시기(510년대 중반 추정)에 20대 초반의 홍안 태자(후에 안장왕이 됨)를 백제 땅으로 보내 정보 수집 활동을 시킨다. 태자는 지금의 고봉산 일대를 돌아다니다 한씨 성(姓)에 ‘주’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을 만나고,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해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던 중 태자의 임무가 끝나고, 태자가 “꼭 돌아온다”는 약속을 남긴 채 다시 고구려로 돌아가면서 이들은 이별의 시간을 맞는다.

생일을 맞은 백제 태수는 미모가 뛰어난 한씨를 불러 수청을 강요하지만 한씨는 “정혼한 사람이 있다”며 한사코 거부하고 정혼자마저 밝히지 않아 옥에 갇힌 채 죽음의 위기에 내몰린다.

태수의 명이 내려지는 순간 관아를 에워싸고 있던 광대패들이 갑자기 백제 군사를 공격한다. 고구려 22대 왕이 된 안장왕의 오른팔인 을밀(乙密) 장군 부대가 광대패로 변장하고 있다가 기습 공격을 해, 백제 군사와 대접전을 벌이게 된다. 이 와중에 한씨는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온 뒤 고봉산에 올라 봉화를 올려 국경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장왕과 고구려 대군을 기쁨으로 맞이한다. 이후 안장왕은 이 일대를 모두 점령하고 한씨를 고구려로 데리고 가 왕과 왕비가 되어 잘 살았다.

신의와 정절의 사랑

도미 부인과 개로왕

도미의 아내는 백제 여성으로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유일한 사람이다. <삼국사기>에는 시대적 배경을 개루왕(제4대) 때의 일로 기록했으나, 개루왕은 재위 기간이 128~166년에 해당해 열전의 내용과 맞지 않는다. 제21대 개로왕(재위455~475)으로 추정된다. 남편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절대 권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사랑을 지켜낸 도미 부인의 고귀한사랑 이야기는 오래도록 백제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져서 보령시의 도미항을 중심으로 ‘상사봉’ ‘미인도’ 등의 증거물과 함께 오늘도 살아서 전해지고 있다.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는 도미 부인의 정절각을 지어 영정을 봉안하고 지금도 그 정절을 높이 기리고 있다. 이 이야기는 1984년 5월 창작무용극 <도미부인>으로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문화행사 무대에 올려졌고, 그 뒤 18개국에서 100회 이상 공연을 했다.

옛날 백제 개루왕 때였다. 전마들(전마평·충남 보령시 청소면 진죽리 일대)의 군용마를 기르는 목장에 어느 날 임금이 행차를 했다. 그때 임금은 도미의 아내가 천하제일의 미인이라는소리를 듣게 되었다. 워낙 여색을 밝히던 임금이라 신하를 시켜 목수 일을 하는 도미를 불러 말했다. “어둡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은근하고 교묘한 말로 꾀면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여자가 없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도미가 대답했다. “신의 아내만은 비록 죽음에 이른다 하더라도 두 마음을 갖지않을 것입니다.” 왕은 이를 시험하고자 도미를 궁궐에 붙잡아두고 신하 한 사람을 왕으로 분장시켜 도미의 집으로 보냈다. 신하는 밤중에 도미의 집에 이르러 도미부인을 불러 말했다. “내 너의 아름다움을 듣고 좋아한 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도미와 내기를 하였는데, 내가 이겼으므로 너를 얻게 되었다. 내일 너를 후궁으로 삼기로 하였다. 이제부터 네 몸은 짐의 소유가 되었다.

자, 이리 오너라. 어디 한번 안아보자.” 왕으로 분장한 신하가 그녀의 몸을 안으려 하자, 도미의 아내가 말했다. “국왕은 거짓이 없을 것이니, 어찌 제가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소서. 소첩이 다시 옷을 갈아입고 곧 들어가 대왕을 모시겠습니다.”방에서 물러 나온 도미의 아내는 한 계집종을 예쁘게 단장시켜 방으로 들여보내 모시게 했다. 왕은 나중에 그녀가 속인 것을 알고 크게 노했다. 왕은 도미를 불러 사흘 동안 말 100마리를 수용할 수 있는 마구간을 짓게 했다. 사흘째 서산에 지는 해가 한 뼘쯤 남고 마구간이 다 지어졌는데, 임금이 신하를 시켜 마구간의 출입문에 다는 빗장 나무 하나를 몰래 감추게 했다. 임금은 왕명을 어겼다고 노발대발하며 도미의 양쪽 눈을 빼고 조각배에 태워 바다로 떠내려 보냈다. 그러고는 다시 도미의 처를 불러 “네 남편은 이미 죽었다. 오늘 밤 내 시중을 들면 후궁으로 삼겠다”고 했다. 도미의 아내는 얼굴에 밝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어찌 이런 좋은 일을 마다하겠습니까? 하온데 소첩이 지금 월경 중이니 청컨대 몸이 깨끗이 될 때를 기다려 모시고자 하옵니다.”왕은 그 말을 믿고 이를 허락했을 뿐 아니라 금은 패물까지 두둑이 줘서 며칠 뒤에 다시 오도록 했다. 대궐을 빠져나온 도미의 아내는 그날 저녁에 상사봉(相思峰)으로 올라 도미항 쪽을 바라보며 통곡했다. 이런 연유로 그 산봉우리를 상사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늘도 무심치 않았던지, 그녀가 상사봉에서 내려와 해안가에 다다르니 한 척의 빈 조각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배를 타고 흘러가는 대로 맡겨두었더니 천성도라는 섬에 도착하게 되었다.

하늘의 도우심인가, 그녀는 그곳에서 두 눈을 잃고 장님이 된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풀뿌리를 캐 먹으면 연명했지만 행복했다. 그러나 언제 왕의 신하들이 들이 닥칠지 몰라서 늘 불안했다. 마침내 그들은 함께 배를 구해 타고 고구려 땅으로 건너갔다. 고구려 사람들이 이들을 불쌍히 여겨서 옷과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도미 부인 묘

기다림과 이별, 배려하는 사랑

아사달과 아사

현진건의 장편 역사소설 <무영탑>의 소재가 되었다.석가탑을 창건할 때 김대성은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이라 알려진 백제의 후손 아사달을 불렀다. 아사달이 탑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동안 한해 두해가 흘렀다. 아사녀는 기다리다 못해 불국사로 찾아갔다. 그러나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여자를 들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아사녀는 날마다 불국사 문 앞을 서성거리며 먼발치로나마 남편을 보고 싶어했다.

이를 보다 못한 스님이 꾀를 내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못이 있소. 지성으로 빈다면 탑 공사가 끝나는 대로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오. 그러면 남편도 볼 수 있을 것이오.” 그 이튿날부터 아사녀는 온종일 못을 들여다보며 탑의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무심한 수면에는 탑의 그림자가 떠오를 줄 몰랐다. 상심한 아사녀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기력조차 잃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탑을 완성한 아사달이 아내를 그리워하며 못 주변을 방황하고 있는데, 아내의 모습이 홀연히 앞산 바위에 겹쳐지는게 아닌가. 웃는 듯하다가 사라지고, 또 웃는 모습은 인자한 부처님의 모습이 되기도 했다. 아사달은 그 바위에 아내의 모습을 새기기 시작했다. 조각을 마친 아사달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나 뒷일은 전해진 바 없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라 부르고 끝내 그림자를 비추지 않은 석가 탑을 ‘무영탑’이라 했다.

백순화 백석대 교수·정보통신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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