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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문명의 허브, 무령왕



중국 남조·일본과 교류하며 백제 중흥 이끌어
등록 2010-09-14 08:50 수정 2020-05-02 19:26
동아시아 문명의 허브, 무령왕

동아시아 문명의 허브, 무령왕

서기 523년 5월7일. 갑작스러운 비보가 백제 웅진성에 날아들었다. 22년 동안 백제를 통치했던 무령왕의 부음이었다. 순간 백제인들은 475년에 있었던 개로왕의 죽음과 뒤이은 문주왕, 동성왕의 갑작스러운 암살 사건을 떠올리며 또 한 번 나라의 위기가 온 것은 아닐까 긴장했다. 하지만 백성들은 세자(성왕)의 침착한 대응과 순조로운 장례 절차를 보며 안도하고, 비로소 그들 곁을 지켜줬던 무령왕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수도 위례성(한성)을 떠나 웅진으로 향했던 백제인들의 원수를 갚고자 무수히 고구려를 공격했던 왕, 누구보다도 백성을 사랑해 저수지와 제방 수리에 힘써 굶주림을 면하게 해준 왕, 멀리 일본에까지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백성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왕….

백제인은 그 그리움과 애정을 담아 무령왕릉 축조에 열을 올렸고, 모든 것이 준비된 526년, 3년상을 마친 무령왕의 주검을 왕릉에 안치하고 나서야 비로소 긴 휴식을 할 수 있었다. 조선 시대 에는 공주에 두 개의 왕릉이 있다고 쓰여 있었지만 위치가 파악되지 않아, 무령왕과 무령왕릉은 긴 세월을 거치며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외제 명품을 좋아했다?

이렇게 우리에게 잊혀졌던 무령왕릉은 1400여 년이 흐른 1971년 여름, 갑작스레 우리 앞에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처음 사람들을 맞이했던 것은 중국에서 건너와 무덤을 지키는 돌짐승인 진묘수(鎭墓獸)였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를 지킨 스핑크스와 같은 포스는 없지만 동글동글 귀여우면서도 표정만은 진지한 진묘수의 모습에서 1400여 년 전 백제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쏟아져나온 무령왕릉의 유물은 백제의 혼이 담긴 문화의 결집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놀라움을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유물을 통해 우리는 또 하나의 의문을 갖게 된다.

“왜 무령왕의 유물에는 이렇게 외국산 제품이 많을까? 무령왕도 외국산 명품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중국산 도자기, 중국에서 주조된 동전,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유리 구슬, 가야식 토기가 있었고 목관의 재료 또한 일본에서만 난다는 금송이었다. 백제 장인들의 솜씨가 담긴 금속제 장신구는 많았지만 그 흔한 백제 시대 도자기는 단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진짜 무령왕은 외제를 좋아했을까?

무령왕의 일생을 통해 이 의문점을 풀어보자. 우선 그의 출생부터가 ‘국제적’이다. 에 따르면, 무령왕의 아버지인 개로왕이 일본과의 외교관계에 문제가 생기자 이를 해결하려 동생 곤지를 특사로 파견했다. 곤지는 명령에 따르면서도 왕의 부인 중 한 명을 달라고 했고, 개로왕은 임신한 부인을 맡기며 “만약 가는 도중 아이를 낳으면 즉시 본국으로 돌려보내라”는 부탁까지 한 것으로 나와 있다.

태어날때부터 국제적 운명

실제로 개로왕의 부인은 가는 도중 진통을 느껴 아이를 낳았는데 이곳이 현재 규슈의 한 작은 섬인 가카라시마다. 무령왕이 살아 있을 당시 이름이 사마대왕인데 ‘사마’라는 뜻 자체가 섬이란 뜻이다. 가카라시마에는 백제 무령왕의 출생지라는 동굴이 있고, 그곳에서 귀한 분이 아이를 낳았다는 등 현지 전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이 무령왕의 출생지로 확실해 보인다.

475년, 그의 나이 13살 때 백제 한성에 고구려군이 들이닥쳤다. 당시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동북정벌에 쏟았던 힘과 노력을 남쪽으로 돌렸다. 백제 임금이던 개로왕은 백성의 삶이나 국방에 큰 상관이 없는 왕궁 확장과 선왕묘의 대대적인 확장 개·보수를 했고, 한반도에서 가장 큰 강인 한강 제방 쌓기 같은 토목공사는 한강에 뿌리박았던 백제 왕권의 힘을 급속히 소진시켰다. 그러니 고구려군이 밀려오자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본인도 비참하게 죽음을 맞았다. 같은 왕족들이 눈앞에서 무참히 살해되자 피난길에 올라야 했던 소년 사마. 아마 이 일로 그는 나라의 국력이 약해졌을 때 일어나는 끔찍한 기억을 가지고 이를 악물며 다음을 기약했을 것이다.

뛰어난 외교력으로 위기 돌파

웅진(지금의 공주)에서의 삶도 녹록지 않았다. 당시 백제는 중앙에 권력이 집중된 형태가 아니었다. 웅진으로 피난 온 백제 왕실을 토착민들이 반길 리 만무했다. 툭하면 반란이 일어났고 문주왕과 동성왕이 반란군에 의해 암살당했다. 전대 왕인 동성왕이 포악해 민심이 들끓자 백가를 비롯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를 암살한다. 40살의 왕족이던 무령왕은 백가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다(동성왕의 암살 배후에 무령왕이 있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무령왕은 곰곰이 생각했다. 고구려의 끊임없는 도전과 백제의 앞날을 생각했을 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우선 본인이 태어난 일본. 작은아버지인 곤지가 특사로 파견돼 있으면서 많은 백제인이 건너가 있었던 왜, 백제가 위기에 닥쳤을 때 그들이라면 자신의 든든한 배경이 돼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중국 양나라. 비록 남북조로 갈라졌지만 문화적 기운은 어느 때보다도 넘쳐나던 양나라는 위기의 백제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줄 만한 저력이 있었다.

그는 곧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양국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 유학과 도교 등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정비하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다음, 일본에 오경박사를 파견해 그 문화를 전해주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백제의 중흥기를 일구었다. 일본 와카야마현 스다하치만신사에 소장된 청동거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계미년 8월 게이타이 천황대에 사마왕(무령왕)이 그의 장수를 염원하여 사람들을 보내 이 거울을 만들었다.” 이 글은 왜왕과 스스럼없이 지내던 무령왕의 외교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무령왕이 외교에 힘쓰며 백성을 사랑하고 국력을 신장하면서 백제는 고구려에 버금가는 강대국으로 거듭났다. 수십 차례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큰 승리도 얻어냈다. 그리하여 왕은 521년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의기양양하게 “누파고구려 갱위강국”(累破高句麗 更爲强國·백제가 고구려를 격파하고 다시 강한 나라를 세웠다)이라고 자랑했다. 어린 시절, 웅진으로 피난 오며 꿈꾸던 강한 백제를 그가 이뤄낸 것이다.

동아시아가 애도하다

선대왕들과 달리 무령왕은 62살 때 노환으로 죽음을 맞이해 천수를 다했다고 전해진다. 서기 523년 무령왕이 죽자 양나라와 일본도 즉시 애도의 뜻을 담아 무령왕의 무덤에 넣을 부장품을 보내왔다. 이미 일본 금송으로 만든 목관은 제작돼 있었고, 양나라의 기술자들은 바다를 건너와 벽돌식 무덤 건축을 도왔으며, 각종 도자기와 물품이 속속 도착했다.

1400여 년 전, 중국 남조-백제-왜 삼국의 기술과 정성, 생전 동아시아의 중심축이던 무령왕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긴 것이 바로 무령왕릉이다. 이제야 의문이 시원하게 풀린다. 무령왕은 외국산 명품을 좋아한 왕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 교류의 핵을 담당한 시대의 영웅이었다. 요즘 시대의 화두는 ‘소통’과 ‘연대’다.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했고,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국제 감각을 가지고 외교에 주력하면서도 나만이 아니라 모두를 살리려는 공생의 자세를 가졌던 무령왕은 21세기 지도자 상이 아닐까?

이주연 천안 부성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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