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만에 만나는 한국의 신들러들

김춘옥, 김노헌, 박청자, 이섭진, 안길룡, 백남길, 박남도…
한국전쟁 당시 자기 목숨을 걸고 이웃의 생명을 살린 이들의 이야기

제816호
2010.06.24
등록 : 2010-06-24 15:43 수정 : 2010-06-24 16:18
1950년 한국전쟁 초기, 충북 영동 용화지서장으로 마을보도연맹원 40명 이상을 살려준 고 이섭진씨와 그의 아내 박청자씨. 아내가 더 강하게 남편의 ‘결단’을 종용했다고 한다. 고 김노헌씨는 지역 유지로 제 지위와 목숨을 걸고 마을 보도연맹원을 집단 구명했다(왼쪽부터).

“다 가뒀지요. (창고에) 하나 (가득) 가둔 걸, 그 잡은 거 잡으러, 영동경찰서에서 온 사람들을 집으로 초청해 술대접을 했어요.”

김춘옥(86)씨는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운영위원장에게 말했다. 전쟁이 터지고 전역에서 보도연맹원을 이 잡듯 잡아 죽이던 1950년 여름이었다. 충북 영동군 용산면을 관할지로 한 영동경찰서 용산지서도 마찬가지. 용산지서 3차 예비검속(지금의 ‘연행’)으로 붙잡힌 50여 명도 마을 공동 가마니 창고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을 인수하러 온 특무대 영동파견대원들과 상급 경찰이 김씨네 양조장에 들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닭 잡아 사람 살린 사연

“내가 그때 닭을 19마리 잡았어요. 한 번도 잡아본 적이 없는데 부들부들 떨면서 닭 모가지를 비틀었어. 급하니 어떻게 해, (남편이) 자꾸 안주를 해오라고는 하지.”

그의 남편은 김노헌(당시 39살·1963년 작고)씨다. 양조업을 하던 용산면 유지다. 양조장은 군수·서장 따위 관내 기관장이 이 지역을 방문하면 들르던 곳이다.


“그렇게 술 취해서 모두, 막 헛소리하는 사람들은 인제 술이 많이 취한 사람들이지. 그렇게 인제 뭐를 사러 간다고 그 양반(남편)이 나가서, 그 자물통을, 그 사람들(경찰)이 잠가서, 그 사람들이 열쇠를 가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드라이버로 빼고, 그 사람들을 다 얼른 나가라고, 여기 있으면 죽는다고. 그때 다 총살시킨다고 했거든요.”

맞다, 총살은 뻔했다. 용산지서에 1차로 예비검속된 6명이 옥천군 청산면 샘티재에서, 2차로 붙잡힌 230여 명이 영동읍 설계리 석쟁이재 등지에서 집단 처형됐던 것처럼.

“(남편이) 다 내보내고 (창고 입구를) 그냥 못질을 해서 놔뒀어요. 저기 왜 창문 하나 사람 나갈 만한 거, 그거만 죄 뜯어 부숴놓고. 그리로 나간 줄 알으라고.”

1950년 북한군은 남침 사흘 만인 6월28일 서울까지 점령한다. 남한은 두 개의 ‘전쟁’을 불사했다. 6월27일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 탓이다. “남로당 계열이나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처형하라.”(당시 헌병대 간부였던 김만식씨 증언·2007년 민간인 학살 진살규명 충북대책위 기자회견) 충북 영동에서만 386명가량이 처형됐다. 전국에 걸쳐 20만 명까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군경이 7~8월 집중 자행한 이른바 ‘예방학살’이다. 이승만 정부가 1949년 6월 국민보도연맹이란 명칭으로 만든 좌익 전향자 단체를 통째 ‘미래의 적’으로 간주한 셈이다.

닭 19마리와 술 한 상이 50여 명의 목숨을 살렸다는 것부터 이들이 필연적으로 죽었어야 할 ‘죄인’이 아님을 에두른다. 박만순 위원장은 “인수하러 온 군경이 이튿날 술 깨고, (잡혀있던 이들이) 도망쳤다 하니 돌아간 것”이라며 “전쟁통이라 한시가 급했고, 또다시 잡아들일 겨를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2006~2008년 충북 401개 자연 마을을 돌아다니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피해 실태를 조사했다. 용산면에선 김노헌씨로 인해 목숨을 구한 김재수(89)씨 등 생존자 3명을 만날 수 있었다. 박 위원장은 그 시절의 잔혹과 부조리를 축약했다. “보도연맹원들의 생사와 피해규모에 특히 지서장과 마을 지도층이 결정적 구실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분들이 보도연맹을 객관적으로 이해한 경우 구명이 이뤄진 게 대부분이란 판단이 듭니다. 진짜 부역자는 체포됐거나 월북 또는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됐거든요. 그래서 보도연맹원 중엔 그냥 (농토 주고 비료 준다 해서) 남로당에 가입했다 전향한 무지렁이가 많았던 겁니다. (당시 정부는 면 단위 할당제를 적용해 좌익 전력이 없는 농군조차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한마디로 죄 없는 내 마을 주민들을 살린다는 생각에서 자기 목숨까지 걸었던 거지요.”

실제 김노헌씨는 평소 친분이 두터운 백남길 용산지서장에게 ‘구명작전’에 앞서 부탁을 해뒀다. “동생, 이번에 보도연맹원들 절대 죽여선 안 되네. 꼭 살려야 돼.”

보도연맹원 풀어주고 총살당한 지서장

‘한국의 신들러’로 지역사회에서 먼저 알려진 이는 충북 영동의 이섭진 용화지서장(당시 29살·1989년 작고)이다. 그해 7월18일이다. 용산지서처럼 영동경찰서장으로부터 보도연맹원 소집 명령을 하달받는다. 당시 경찰은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들을 관리·소집하며 사상교육 등을 해왔다. 그러나 이 지서장은 이번 소집의 은짬이 처형임을 어렵지 않게 감지했다. “대전 함락(7월20일)도 코앞에 둔 시기” “주민 소개령, 피난 대책을 세우기에도 정신이 없던 때”였기 때문이다.

이 지서장은 이튿날 지서 앞마당에 마을 보도연맹 주민 40~50명을 일단 소집해두고서 고민한다. 상부 명령을 어기면 즉결 처형도 가능한 때다. “사실 아버지는 가족들 때문에 좀 망설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머니(박청자씨·당시 29살·1979년 작고)가 더 강직하게 얘기했대요. 죄 있는 사람들이냐, 아무 죄도 없는데, 그 사람들 죽고 당신 혼자 남는다면 평생 죄책감에 어떻게 살 거냐. 그리고 모두 풀어준 거예요.” 이 지서장의 맏딸 이선희(69)씨가 기자에게 말했다.

운도 따랐다. 상부의 지시와 추궁이 계속되지만, 7월21일 왜관으로 철수한다는 지시가 내려진다. 실제 비슷한 때 충북 괴산군의 안길룡 증평지서장은 보도연맹원 일부를 풀어준 뒤 헌병대에게 권총으로 총살됐다고 전해진다.

진실화해위원회 주도의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사업 덕분에 감춰졌던 비극과 당시 살풍경이 여러 증언자에 의해 구체화된다.

“지서에서 구타·고문을 당한 경우도 있었는데, 이규생(영동군 학산면 봉소리)은 매를 못 이겨 영동경찰서로 이송되기 하루 전 지서 유치장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경찰서 내에 포승줄이 많지 않아서 대부분 철사로 묶여 (처형장으로 가는) 트럭에 태워졌다.”

“거기 열 명씩 세워놓고 뒤에서 발사를 하는데, 거기 서 가지고, 거기 구덩이 파놓은 데를 내려다보고, 아예 정신이 다 나가고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여.”

영동 지역에서만 거둔 증언들이 이렇다. 그러나 용산면에선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이섭진 지서장은 이후 영동경찰서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그해 9월 영동이 수복돼 용산지서로 돌아온 뒤 마을 주민들이 대대적인 환영대회를 열며 ‘비밀’이 확성됐기 때문이다. 그러곤 줄곧 변두리 보직만 맡게 된다. 물론 ‘성향’은 변하지 않았다. 이 지서장은 1951년 영동군 일대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던 남덕우씨를 붙잡아 전향시키고 한집에서 데리고 살았다. 이 지서장의 막내아들 이성규(50)씨는 “그가 한동안 삼촌인 줄 알았다”고 말한다. 남씨를 아예 경찰로 취직시키기까지 했다.

신들러는 전국 어디에나 있다

각지에 ‘신들러’가 있었다. 경북 영천경찰서의 한 경관도 마을 주민 여럿을 풀어주거나 보도연맹 명단에서 삭제해 구명해준 것으로 추적된다. 전남 영광군 백수읍에서 대한청년단 단장을 맡았던 박남도(당시 27살)씨는 1950년 9월 부역에 나섰던 영광군 군남면민 2천여 명을 설득해 자수시키는 등 좌익계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구제해 지역 명사가 됐다. 그는 좌익계에 의해 친인척 27명을 잃은 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담은 개인적 친분으로 소수가 구제된 경우다.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해방 직후 영동군수를 지낸 여우현씨도 보도연맹원 소집 뒤 처형됐다. 그도 소집 명령에 따라 학산지서로 갔는데, 지서 주임이 “집에 가 옷이나 갈아입고 오시라”고 에둘러 피하라 당부한 것을 곧이 이해하고 “중의적삼에 맥고모자를 쓰고 다시 지서로 왔다”.

이섭진 용화지서장을 기리는 후원회도 지난 4월 생겼다. 후원회장 이상원(맨 오른쪽)씨는 “교육용 기념관을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이 지서장의 막내아들 이성규(가운데)씨와 함께 관련 자료를 함께 보고 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살아남은 자들이 세운 공덕비

상촌지서장을 지내다 영동경찰서에서 근무하던 전창록 경관은 당시 유치장에 구금된 장인을 “담배나 사오시라”며 내보냈지만 담배를 들고 돌아와 결국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비극은 대개 닮아 있다. 영동 경찰 간부가 직접 그 지역 경찰의 역사를 조명한 <무궁화꽃을 피운 사람들>(이창세 지음·당그래 펴냄)에도 한 사연이 안타깝게 상술돼 있다. “양강면 괴목리 김무중씨는 논일을 하다 (보도연맹원) 소집 시간에 맞춰 양강지서로 향했다. 평소 친분이 있는 양강지서 조아무개 지서장이 그를 보고는 아직 시간이 멀었으니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천천히 오라고 했다. 하지만 지서장은 자세한 이유를 말해줄 수 없었다. 김무중씨는 이내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지서로 왔다. 결국 저승으로 가는 트럭을 타고 말았다.”

죽음은 그토록 ‘무작위’였고 그래서 ‘복불복’이었다. 이 때문에 누군가를 살리려면 더 많은 ‘희생’을 담보로 해야 했다. 제 지위와 가족의 목숨까지 걸어야 했다. 이섭진 지서장은 종국에 방첩대에 의해 ‘비위경찰’로 몰려 강제 퇴직당한다. 마흔이 되던 1961년, 지인과 점심 식사를 하며 반주를 접대받았다는 게 이유였다. “아버지는 술 한잔 못하셨어요. 식사 대접하는 분이 맥주 한 병 했던 겁니다. 계속 감시당하다 결국….” 이선희씨는 지금도 한숨을 얹어 말한다.

이섭진 지서장은 이후 옥천의 한 광산소장을 3년여 지내다 남은 평생을 직업 없이 보냈다. 퇴직 즈음 태어난 이성규씨는 “이후 벌이가 전혀 없이 퉁소 불고 시조 지으면서 여생을 보내셔서 원망도 했는데, 회한에 차서 그런 게 아닌가 뒤늦게 이해가 됐다”고 말한다. ‘반공’만이 법인 시절이었다.

이 지서장은 아들에게 먼저 나서 ‘과거’를 들려준 적이 없다. 이성규씨는 “마을 지인들 통해 처음 들었다”며 “가족이 다른 지역을 오가고, 용화면 소재지(용화리)에 살아 생존자들을 직접 볼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21살인가 오랜만에 마을에 갔는데 어떻게 알고 잔치를 열어줬다”고 회고한다. “지역에서 워낙 신망이 두터우니까, 옥천·영동 국회의원이 선거 때마다 아버지를 불렀다”며 “군수직도 제의받았지만 고사했다”고 말한다.

따져보니, 돌려받은 것이 너무 적다. 게다가 추모도 되기 전 잊히고 있다. 남은 생존자도 찾기 어렵다. 박남도씨의 ‘과거’를 기억한다고 알려진 김충옹씨는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아흔 살이 다 돼간다”며 “당뇨병도 있어 잘 듣지 못하고 말도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용화면 용화리 입구에 선 ‘이섭진 지서주임 영세불망비’가 60년 세월을 버텨주고 있다.

 

강명위사 제지자인(剛明位事 濟之慈仁·강직하고 현명하게 일하고 어질고 착한 마음으로 사람을 구하네)

진자일구 방급외린(鎭玆一區 傍及外隣·한 고을을 잘 다스리니 그 덕이 이웃에까지 미치네)

가가회덕 인인영춘(家家懷德 人人迎春·모두가 봄을 맞듯 집집마다 그의 덕을 기억하여)

노상편석 영년불민(路上片石 永年不泯·길가에 세운 조각돌일지언정 영원히 잊어선 안 되네)

_단기 4285년(1952년) 1월11일 주민 일동

마을 유지들이 기금을 내고, 빈농들도 십시일반해 세운 공덕비다. 이 지서장 덕에 구명됐던 강학철(81)씨도 그때 쌀 한 되를 냈다고 살아 증언했다. 지난 4월 교육용 기념관 건립을 목표로 하는 이섭진 후원회가 만들어졌다. 영화 제작도 추진 중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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