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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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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시민군, 도청 기동타격대


광주항쟁 때 죽을 각오로 도청에 남은 노동자·운전사·넝마주이…
고문과 감시와 무관심으로 망가진 그들의 30년
등록 2010-05-18 08:30 수정 2020-05-02 19:26
기동타격대 1조 ‘시계’ 양동남씨. 30년 전 재판을 받은 상무대 영창의 법정에 걸려 있는 사진 속 자신을 짚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기동타격대 1조 ‘시계’ 양동남씨. 30년 전 재판을 받은 상무대 영창의 법정에 걸려 있는 사진 속 자신을 짚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1980년 5월26일 오후 1시, 광주 전남도청의 스피커가 울렸다. 계엄군의 도청 무력 진압이 기정사실화된 직후였다.

“끝까지 도청을 지킬 결의가 되신 분들로 기동타격대를 모집합니다. 뜻있는 동지들은 1층 회의실로 모여주십시오.”

회의실에 모인 60여 명에게는 전투경찰복과 방석모가 지급됐다. 대원증도 줬다. 제각각의 사연은 달랐지만 목적은 하나였다. “도망가지 말고 끝까지 싸우자”는 것이었다. “죽자”는 것이었다. 밤 11시께에는 마지막 식사가 주어졌다. 빨간 육개장을 먹으며 “요상허게 피 같소”라는 누군가의 농담에 웃음소리도 났다. 100명이 채 안 되는 기동타격대의 결의는 공수부대로 구성된 계엄군(3공수)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1980년대를 넘어 2000년대까지 관통하는 힘이 됐다. 폭압적인 권력에 맞서 도청을 지켰던 이들에 대한 부채 의식은 이후 수많은 민주화운동 세력을 규합하는 원동력이었다. 민주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광주는, 도청은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단어였다.

30년 전의 ‘찐빵’ ‘시계’ ‘범’ ‘백곰’ 등은 여전히 그날의 새벽을 살고 있었다. 그들을 만났다.

“그때 죽었어야 했는디…, 죽지 못해 살고 있소. 광주항쟁 일주일만 갖고 그때 갔어야 했소.”

5·18 광주 민주화운동 30주년. 기동타격대는 누군가에 의해 사주를 받았다는 ‘폭도론’으로 호도되고, 부당한 공권력에 의한 희생자라는 ‘희생 담론’으로 가려지면서 잊힌 존재들이었다. 특히 희생 담론은 엄혹한 전두환 정권 아래서 광주를 경험하지 않은 일반 시민들에게 정서적 공감대를 얻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 희생이라는 단어가 앞서면서 5·18의 연구의 주제에서 항쟁·항거의 주역들은 후순위로 자연스레 밀려난 것이다. “민주화 ‘운동’만 남고 목심 걸고 싸웠던 ‘항쟁’은 어디 갔소. 어디 광주가 운동이오, 항쟁이재!” 기동타격대의 고함은 아직도 쟁쟁했다.

모집방송 듣고 자발적으로 모여

‘광주 민중민주항쟁지도부 기동타격대’. 광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조차 기동타격대는 낯선 이름이다. 당시 도청에 있었던 인원은 500명~600명, 사망자도 160명~400명으로 큰 편차를 보인다. 30년동안 도청을 지킨 사람들의 숫자는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다. 불변의 사실은 항쟁지도부가 존재했으며 이들이 꾸린 유일한 준군사조직이 기동타격대라는 것이다. 나머지는 도청수비대로 통칭되는 총을 든 시민들로 추정된다. 기동타격대는 진압작전 새벽까지 계엄군의 정황을 살피기 위해 정찰임무를 수행하는 등 군사조직으로 기능했다. 또 도청 진압작전을 펼친 공수부대는 기동타격대가 배치된 정면이 아니라 주로 도청수비대가 있었던 후면으로 진입했다.

공식 조직이었음에도 기동타격대만을 다룬 기록은 찾기 힘들다. 구체적인 기록은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이하 현사연)의 이 거의 유일하다. 윤상원·박관현이나 들불야학에 대한 재조명과는 사뭇 다르다. 허연식 5·18연구센터 책임연구위원은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5·18의 본질은 희생이 아니라 항쟁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며 “기동타격대 이야기부터 다시 기록하자”고 말한다. 이들에 대한 기록이 부족한 것은 1980년대 정부에 의한 폭도 담론도 한 이유다. 당시만 해도 폭도라는 규정은 ‘빨갱이’라는 돌이킬수 없는 낙인을 의미했다.

있는 자료마저 부정확한 경우가 많다. 현사연에는 기동타격대는 거의 노동자 출신의 20살 전후 젊은이로만 이루어진 동질성을 지향한 조직이었으며, 대학생은 기동타격대에 배속되지 않으면서 자발적으로 총을 들고 도청을 지켰던 도청수비대에만 배속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정체성과 관련된 내용에서부터 기동타격대 경험자들은 다른 목소리를 낸다.

“모집방송을 듣고 모인 초면의 사람들이었어요. 동네 친구 4명이 모여서 만든 1조를 제외하면 나머지 조들은 서로 이름도 나이도 몰랐으니까요. 대학생이나 교수 등 이른바 지식인이 없었다는 것은 나중에 잡혀가고 나서 알았던 것이죠. 총 잡는 데 자격 보나요.”

7조 조장으로 ‘찐빵’으로 불렸던 김태찬씨의 증언이다. 또 준군사조직이었지만 운용·구성 등 대부분의 활동이 자율적이었다. 특히 김씨의 7조는 임의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조는 나중에 꾸려졌어요. 기동타격대가 꾸려진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을 모아서 제가 7조를 하겠다고 했고, 박 실장이 그렇게 하라고 하는 정도였죠.”

1조부터 6조까지 5∼6명씩, 7조는 30명 정도가 꾸려져 총 60명 정도였다. 8조, 9조 등도 조직됐다고 알려졌지만 공식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들은 각자의 신원을 파악하지 않고, 별명을 썼다. 믿음 하나만으로 총을 든 군사조직이 된 것이다. 이들은 전투만 수행한 것이 아니다. 계엄군 동향 파악과 정찰에서부터 긴급환자 구조까지 나섰다. 광주 시민에게 이미 계엄군은 ‘적’이었고, 자신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도청에 있는 ‘누군가’였다.

“전화가 와요. 계엄군이 주변에 있는 것 같아 무서워서 병원에 못 가겠다고. 그러면 우리가 실으러 가서 병원으로 데려다주기도 했어요.”(1조 운전병 ‘시계’ 양동남)

이들은 이른바 ‘각성된 잡색 부대’였다.

“이들을 지켜야 겠다, 그런 생각뿐”

“살면서 단 한 번도 잘한다는 소리를 못 듣고 자랐죠. 내가 무엇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조차 못하고 그냥 반건달로 살다가 갑자기 옆에서 박수를 쳐주고 젊은이가 고생헌다는 말을 듣는다고 생각해보세요.”

7조 조장 ‘찐빵’은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거 하지 마라, 저런 거 하지 마라라는 말만 듣다가 누가 뭐라고 안 해도 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어린 여학생은 헌혈을 하고, 할머니는 주먹밥과 죽을 내오고…. 그런 거 봤소?”

그날 먹었던 주먹밥에 대한 기억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순찰을 도는데 사재기가 없더란 말이에요. 슈퍼 주인까지 먹고살 물건들을 풀었으니까요. 이런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총을 드는 일밖에 없다고 자연스럽게 느꼈어요. 처음으로 제구실을 하면서 살게 됐죠. 거기에서 자유라는 게 느껴지더란 말이에요. 틀에 매어 있다가 다른 틀로 확 풀려서 들어간 것처럼. 거기서 도망을 가요? 아니죠. 지켜야죠.”

1조 운전병 ‘시계’ 또한 그날의 선택에 대해 스스럼없다. “나중에 내란죄라고, 반역자라고 하던데…, 저는 그날 시민들의 얼굴이 또렷허게 기억나요. 총을 들고 다니는 우리들헌티 어느 누구 하나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없었으니까. 모두가 박수를 쳐줬으니까. ‘이 사람들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죽어도, 아니 혹시나 죽더라도 이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줄 거다, 그런 생각뿐이었죠.”

이를 ‘절대 공동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지켜야 할 세상인 거 같았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진압 이후 기동타격대에 남은 것은 ‘간첩 사주,’ ‘김대중 지령’ 등의 시나리오에 꿰맞추기 위한 온갖 고문과 구타였다. 이것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폭도라는 굴레였다. 그때와 같은 경험을 다시는 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었다. 변한 세상에 대한 원망이었다.

2조 ‘범’으로 참가한 안선옥씨. 항쟁 마지막 날 총을 들었던 기억이 그에게는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2조 ‘범’으로 참가한 안선옥씨. 항쟁 마지막 날 총을 들었던 기억이 그에게는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10여년 경찰 감시, 정상적 생활 불가능

당시 광주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간 이들은 150여명, 이 가운대 기동타격대의 숫자는 50여명으로 추정될 뿐 지금도 정확하지 않다. 끌려간 그 순간부터 이들을 두고 내란의 수족으로 몰기 위한 고문과 수사가 진행됐다. 고문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양동남씨가 체포 과정에서 엉덩이를 대검으로 찔렸음에도 며칠 동안 그 상처 부위의 고통을 느끼지 못해 살이 썩어들고 나서야 병원에 실려갔다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함께 붙잡혀온 사람들은 이제 별명이 아닌 이름을 알아가며, 그들에게 가족이 있었고 죽지 못해 끌려왔다는 것을 이야기해가며 ‘다시’ 뭉쳤다. 결국 이들은 군법재판에서 를 불렀다. 계엄군에 잡혀온 폭도가 아니라 광주를 지킨 기동타격대라는 자부심이 용기를 북돋았다. 이렇게 재판을 방해하고 나면 온갖 고문과 가혹 행위가 뒤따랐다. 기동타격대였다면 ‘전두환’이라는 이름보다 ‘형무반장 박춘배’를 더욱 깊게 새기고 있었다.

“전두환이나 박춘배나 다 똑같이 내 세금으로 먹고사는 놈들이 나한테 부당허게 가허는 폭력이었응게요. 사실 ‘전두환 물러가라’고 말하지만 나는 전두환이 누군지 몰랐지요. 민주주의가 뭔지도 몰랐고, 우리를 투사라고 불렀지만 그것도 뭔지 또 몰랐고. 다만 우리가 잘못한 게 없고, 기특헌 일을 했다는 것만 알았죠.”(2조 ‘범’ 안선옥)

상처로 남은 것은 폭력의 결과만이 아니다. 동지적 관계로 아낌없이 나누던 사람들이 세상이 달라지자 자기 것을 챙기기 시작한 것이다. 당장 군통합병원과 상무대 영창에서부터였다. 100명 정도가 한꺼번에 수용된 통합병원은 병상 배치부터 이상했다. 한 줄에는 기동타격대 출신 사람들, 한 줄에는 교수·학생 등이 나란히 누웠다. 이때의 경험을 ‘시계’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치부한다. “항쟁 때는 없는 것도 나누던 사람들이 자기 병상 옆에서 먹을 것이 썩어도 나누지 않더라고요. 싸우고 희생당허는 것은 우리처럼 힘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어요.” 상무대 영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왜 싸웠는지 우리가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영창에서 그들이 말해줘서 많이 배웠지요.” 영창에서 병원에서 ‘배운’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은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 계기는 됐지만 밥을 앞에 두고 입었던 그 때의 상처는 여전히 안에 담아두고 있는 듯했다.

상무대 영창과 통합병원을 오가는 생활은 6개월여 계속됐다. 훈방됐던 사람들도 기동타격대 출신이라는 것이 뒤늦게 밝혀지면 재수감돼 내란죄가 적용됐다. 가담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적게는 1년부터 무기징역까지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다가 1982년 전격적으로 단행된 형집행정지로 대부분 출감하게 된다. 여전히 서슬 퍼런 5공 시절, 이들은 경찰의 온갖 방해를 넘어 기동타격대라는 이름으로 82년 다시 모였다. 그 뒤로 30년 동안 5·18 진상 규명 투쟁부터 암매장 발굴까지 5·18과 관련된 일에 앞장서왔다.

“4월만 되면 직장을 다닐 수가 없었어요. 거리로 나섰죠. 그걸 어떤 논리로 설명하나요. 30년 전 5월27일 이후 저에게는 패배의 고통만 있어요. 그것이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죠. 하지만 그래도 27일 이전 일주일의 경험은 ‘우리’만 한 거예요. 내가 사는 세상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저는 몸으로 겪은 거죠. 누군지는 모르지만 나를 믿고 총을 든 동료가 죽어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니까, 그 생각도 잊히지 않고….”(김태찬)

5·18이라는 경험, 그 정신적·육체적 충격은 기동타격대 개개인에게는 비극을 가져왔다. 5·18 관련 단체에서 일하는 한 관계자는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낸다. “이분들의 삶이 5·18을 대표하기 힘든 것은 개인의 삶이 올바르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에요. 몇몇은 자신이 한 일을 영웅화하거나 미화하기도 했고요.”

기동타격대 스스로 이런 지적을 비껴가지 않았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한 당사자는 말했다. “죽음을 목격하고 무차별한 폭력을 경험한 상태에서 10여 년 경찰 감시가 지속되자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어요. 피해의식을 고스란히 자기 집으로 가져가서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 가거나, 안으로 곪아 알코올중독이 되거나…, 5월만 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나도 30년 동안 마누라 등골만 빼먹고 산 셈이오. 그렇게 살았소.”

이렇게 스스로 망가지면서 내부 갈등도 생겨났다. 기동타격대가 속한 5·18 구속부상자동지회의 한 회원은 울분을 토로했다. “당신들은 투사요, 5월 정신을 잊지 마시오, 이렇게 말한 사람들이 생계 대책을 세워야 하는 순간에는 다 입을 다물었어요. 그게 끝이죠.” 그래서 보훈처에 속해 지원받는 공법단체로, 회원들의 복리를 우선하는 이익단체로 거듭나자는 의견이 탄력을 받았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이견은 있다. “자본주의 아니냐, 어쩔 수 없다고 허지만, 우리가 북파 공작원이랑은 다르지 않소.”

기동타격대 모습. 마스크와 두건은 도청 근처 승하맨션 부녀회에서 만들어줬다. 당시 부녀회장도 ‘폭도’로 몰려 재판을 받았다. 5·18 기념재단

기동타격대 모습. 마스크와 두건은 도청 근처 승하맨션 부녀회에서 만들어줬다. 당시 부녀회장도 ‘폭도’로 몰려 재판을 받았다. 5·18 기념재단

“함께 죽지 못했다” 부채의식만 남아

지난 5월11일 양동남씨와 도청을 찾았다. 금남로가 내려다보이는 도청 2층의 창문에 기대 잠시 생각에 잠긴다. “30년 동안 의식적으로라도 가지 않은 곳이어요.” 돌아서더니 갑자기 한 사무실 문을 두드린다. “이 문이었는데…. 여기 숨었다가 잡혔소. 꼭 살아남아서 진실을 알리자고 허면서….” 자신이 총을 겨눴던 자리에서 변한 금남로를 바라보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이들의 부채 의식은 유난하고 특별했다.

“그때는 몰랐어요. 왜 총을 쏘고 나면 죽어가는지…. 몇 년이 지난 다음 알았죠. 예광탄이 세 발에 한 발씩 발사되는데 미리 배치된 저격수들이 예광탄이 발사된 자리로 집중사격을 했던 거예요.”

그날 새벽 1조 ‘시계’는 결국 마지막에 총을 쏘지 못했다. 7조 ‘찐빵’도 총을 버렸다. 총을 맞은 동료는 바로 죽지 않았다. 쌕… 쌕, 거친 숨소리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30년 만의 ‘특별한’ 고백도 있었다. 2조 ‘범’이었다.

“5월27일 새벽 1시쯤 됐을라나. 임동 쪽에 상황이 생겼다고 지가 속헌 2조 출동이 떨어졌고 1조랑 같이 나갔지라. 운전 미숙이었는지 우리가 탔던 지프가 전복이 됐소. 우리 조장이 이마허고 허벅지에 부상을 당해부렀죠. 다들 가까스로 차를 다시 뒤집고 병원에 들렀다가 복귀허라고 허는디…, 가는 길에 여인숙 하나가 보이는디…. 919여인숙이라고. 그때 대한극장 뒤 말이어요. 조장을 눕혀놓고 잠깐 눈을 붙였소. 그리고 기억이 없당게요.”

기동타격대 2조 6명은 대로변에 떡하니 지프차를 세워두고 여인숙에서 잠이 들었다. “그래도 총은 놓지 않았소.” 말은 자꾸만 끊어진다. “옆집으로 담을 타고 넘는디 건물 위로 계엄군들이 보여요. 얼핏 봐도 40명은 되아 보이는디. 아, 죽었구나…, 셋은 마루 밑으로 들어가고 셋은 부엌으로 들어갔어라. 갑자기 밖에서 두들겨 맞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허고, 아 잡혔구나…, 부엌으로 들어오믄 쏴서 죽여야것다고 생각혔지요, 그리고 나도 죽어뿌러야것다. 문이 활짝 열리고 상사 하나가 들어오등만요. 컴컴헌 부엌으로 허옇게 빛이 쏟아지고…, 그게 끝이어요.”

지금도 그는 5월 구속부상자동지회에서 일한다. 30년 동안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했다. 5·18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대열을 따라 거리에 섰다. “봄만 되믄 5월에 어디 붙어 있을 수 있간디요.”

그의 고백은 아이러니했다. 학살의 책임이 있는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는 30주년, 그는 “함께 죽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2조 ‘범,’ 동네 형들 따라서 도청으로 갔다는, 백운동 안씨 집안의 5남1녀 막둥이는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더듬거렸다. 30년 된 이야기를 어제의 잘못인 양 낱낱이 털어놨다. 그래서 그 상사를 쐈느냐고 물었다.

“얼굴을 대면허고 쏠 수는 없드랑게요. 조용허니 ‘총을 버리면 살려주것다’고 허등만. 어찌헐 수가 없어서, 그냥 총을 겨누고 대성통곡을 했어라. 셋 다 그렇게 울다가 잡혀갔당게요.”

당시 열여덟에서 이제 쉰 살이 된 2조 ‘범’은 그게 그렇게 죄스러웠느냐는 말에 자꾸 “그래도 끝까지 총은 놓지 않았노라”고 답했다.

2008년에서 2009년까지 그들은 다시 도청을 지켰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추진의 일환으로 진행하던 광주 도청 별관 철거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기동타격대가 가장 먼저 농성에 나섰다. 생계를 포기한 8개월이었다. 하지만 다른 피해자 단체보다 앞서 철수했다. 배신이라며 욕도 많이 먹었다. 철수를 두고 내부적으로 찬반 대립을 겪으면서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졌다. 기동타격대 회원들은 자신의 의견과는 별개로 이 일 자체를 힘겨워했다. 한 회원은 “8개월 동안 쳐다보지도 않던 단체들이 우리가 나간다니까 들어오더라고요. 그래도 결과적으로 막아냈으니까 우리 몫은 했다고 봐야죠”라며 한숨을 내쉰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도청 허물자면서 빠져나간다고 ‘허문 벽돌로 묻어줄랑게, 이리 오소’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 말을 듣는 수모를 왜 당해야것소. 나오면 안 되는 일이었소.”

“무명 열사 재단 만들자” 다시 뭉친다

상처는 계속됐다. 먹고사는 문제가 걸렸다. “우리에게 투사라고 치켜세우면서 앞장서라고 주장한 사람들 모두 자기 것 챙겨가며 높은 양반 돼서 잘살고 있어요. 그때 우리가 폭도로 몰려 보상·배상은커녕 정상적인 사회생활도 못할 때 그 사람들 뭐했어요. 우린 대부분 가정을 제대로 꾸린 사람이 없어요. 이제 정치적인 일은 그만할랍니다. 앞으로는 그냥 매년 5월27일 우리가 목숨 내놓고 도청을 지킨 날, 서로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서로 돕는 게 우선입니다.” 세파에 시달린 냉소가 짙었다.

늦게나마 이들에 대한 조명이 새롭게 시도되고 있다. 조정환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는 그의 책 에서 “이들은 전두환의 계엄군이 총을 버리고 다르게 살도록 강요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인간적 존엄을 회복한 사람들”이라며 “이들의 등장은 지역공동체가 현존하는 주권질서와 화해할 수 없는 공동체로 변모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한걸음 나아가 “영세기업체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무직자가 대부분인 기동타격대는 각자의 직업이나 신분을 벗어나, 어떠한 이해관계에서도 자유로운 투쟁을 만들어냈다”고 표현했다.

최정운 서울대 교수(외교학)는 저서 를 통해 “기동타격대가 끝까지 싸웠던 이유는 진실을 아는 사람들만이라도 끝까지 싸울 수 있는 자유, 선택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 스스로 도청이라는 자리를 내주면 진실은 영원히 파괴되고 모든 광주 시민들은 폭도로 생매장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끝까지 저항해 진실을 땅 속에 감추고 훗날 진실로 부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기동타격대는 기동타격대다. ‘찐빵’과 ‘시계’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무라이’라고 부르던 친구가 있었죠. 넝마주이였는데, 본명은 당연히 모르죠. 당시는 생긴 대로 별명만 부르니까.”

결국 사무라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상무대 영창에서도, 82년 기동타격대 모임이 재결성되고 나서 짱돌을 던졌던 수많은 거리 현장에서도, 사무라이는 없었다. “죽었것죠.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면…. 요즘 더욱 사무라이처럼 이름 없이 도청을 지켰던 사람들,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데 묻어버린 망월동 묘역의 무명 열사들이 진짜 5·18이라는 생각이 드요. 넝마주이, 부랑아, 이렇게 천시허면서 5·18의 바깥 존재인 것처럼 취급된 그 사람들을 어떻게든 꼭 기억해야 하지 않것어요?” 그들은 “용산에서, 대추리에서 5월 단체의 깃발이 없었던 이유도 더 이상 사무라이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 그들은 ‘무명 열사 재단’을 만들려 의견을 모으고 있다. 5·18은 기동타격대 몇몇이 기억하는 이름 없는 사람들로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다. 30년 만이다.

광주=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참고 문헌: (조정환·갈무리), (최정운·풀빛), (박호재, 임낙평·풀빛),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풀빛), (황석영·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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