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2월 강원대를 졸업한 박아무개(26)씨는 지난해 1학기를 휴학했다. 토익(TOEIC) 성적을 올리려고 서울로 올라와 학원을 다니기 위해서였다. 휴학 기간에 학원비 25만원씩을 매달 내면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수업을 들었다. 남는 시간에는 학원과 집 근처 도서관에서 토익을 공부했다. 하지만 성적은 700점대 초반이었다. 박씨는 “수도권 대기업에 들어가려면 850점은 넘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씨는 현재 서울의 한 중소기업에서 일한다.
#2. 지난 1월 국내 3대 그룹의 한 계열사에 입사한 김아무개씨는 최근 그룹의 입사 동기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 동기 가운데 지방대 출신은 김씨 이외엔 1명뿐이었다. 그는 “지방대 출신은 나와 또 다른 1명뿐이고, 나머지는 서울대·고려대·연세대를 포함해 서울 소재 대학 출신이었다”며 “대학이 고등학교 시절 열심히 공부한 걸 반영하기는 하지만, 지방대 출신에게 너무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 취업포털 잡코리아와 함께 국내 대기업 23곳과 중소기업 36곳을 상대로 ‘2009년 신입사원 취업 스펙 현황’을 조사한 결과,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큰 격차를 보였다. 대기업 입사자의 평균 토익 성적은 824점인 반면 중소기업은 694점에 그쳤다. 또 이른바 ‘SKY’라고 불리는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졸업자가 대기업에서는 21.9%를 차지한 반면, 중소기업에서는 1.8%의 낮은 비중을 보였다. 이번 조사에는 지난해 신입사원의 출신 대학, 학점, 전공, 토익 점수, 인턴 및 해외연수 경험 등 다양한 항목이 포함됐다.
조사 결과 대기업은 기업당 평균 163명을 채용하고 중소기업은 평균 6명을 채용했는데, 이들의 평균 학점(4.5점 만점)은 각각 3.67과 3.6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입사자 나이 역시 평균 27살로 같았다.
하지만 토익 점수나 인턴 경험, 해외연수 경험 등 자기소개서나 이력서에 써넣을 수 있는 항목에서는 대기업 신입사원이 뚜렷한 우위를 보였다. 우선 토익 점수는 대기업 입사자가 평균 824점을 보여 중소기업(평균 694점)보다 130점 앞섰다. 지난해 150여 명을 뽑은 한 대기업의 경우 입사자 평균 토익 점수가 909점에 이르기도 했다.
인턴이나 어학연수, 공모전 수상 등의 경험도 대기업 신입사원이 더 많았다. 대기업 입사자는 인턴 경험 32.7%, 공모전 경력 17% 등으로 중소기업 입사자의 25.9%, 12.8%보다 높았다. 특히 영어 성적과 관련 있는 어학연수 경험은 대기업 입사자가 47.9%로, 중소기업보다 22%포인트나 많았다. 반면 취업과 큰 연관이 없는 아르바이트 경험은 중소기업 입사자가 36.2%로, 대기업 입사자(28%)를 앞질렀다.
이른바 ‘학벌’에서도 대기업 쏠림 현상이 뚜렷했다. 대기업에서 서울대·연세대·고려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6.1%, 7%, 8.8%였다. 모두 합치면 전체 입사자의 21.9%로, 5명 가운데 1명 수준이다. 반면 중소기업은 각각 0.7%, 0.8%, 0.3%에 그쳤다. 또 대기업의 경우 서울 소재 대학 출신이 입사자의 42.6%를 차지한 반면, 중소기업은 38.8%에 그쳤다. 지방 대학 출신은 대기업 32.1%, 중소기업 58%였다.
여성·인문계열, 대기업 입사 더 힘들어2009년 기준으로 따져보면,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졸업자(약 1만1천 명)는 전체 대학 졸업자의 5.2%에 불과하다. 또 이들 3개 학교를 제외한 서울 소재 대학은 전국 대학 졸업자의 19.5%를 차지한다. 결국 전국 4년제 대학 졸업자 4명 가운데 1명이 서울 소재 대학을 나왔지만, 대기업 입사자는 2명 가운데 1명이 이곳 출신임을 보여준다.
이같은 비율은 현재 대기업의 임원 비율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최근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매출액 기준 30대 대기업이 지난해 6월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반기보고서를 바탕으로 임원들의 출신 대학을 분석한 결과, 서울대가 12%, 고려대가 8%, 연세대가 7.4%를 차지했다. 이어 한양대 5%, 성균관대 4.7% 등의 순이었으며 지방대 가운데는 카이스트(3.7%)와 부산대(3.6%), 경북대(3.3%)가 상위 10위권 안에 이름을 올렸다.
이에 대해 두산그룹 계열사의 인사담당자는 “특별하게 학벌을 따져 가점을 주지는 않지만, 아예 안 따진다고 말은 못한다”면서 “객관적 기준에서 이른바 ‘SKY’ 출신의 점수가 매년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대기업에 합격한 사람들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보인다”며 “합격한 친구는 서너 곳에 합격해 골라 가지만, 떨어진 친구는 계속해서 탈락한다”고 말했다.
또 이번 조사에서는 여성이나 인문사회 계열 전공자는 대기업에 입사하기가 남성이나 다른 계열 출신보다 더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의 여성 입사자 비율은 25.5%로 4명 가운데 1명인 반면, 중소기업은 33.8%를 차지해 3명 가운데 1명이었다. 전공별로는 인문사회 계열이 대기업 입사자의 16.1%를 차지한 반면, 중소기업은 21.3%로 상대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반면 이공 계열은 대기업이 47.3%, 중소기업이 52.4%를 차지해 양쪽 모두에서 각광받았다. 경상 계열은 대기업은 31.7%로 이공 계열 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보였지만, 중소기업은 16.3%로 인문사회 계열보다 낮았다. 대기업이 선호하는 구직자가 남성이나 이공·경상 계열에 집중돼 있고, 이같은 경쟁에서 밀리는 여성이나 인문사회·기타 계열 전공자가 중소기업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경기도 시흥시의 ㅅ중소기업 관계자는 “뛰어난 스펙을 가진 인력들은 지원이 거의 없고, 들어와도 버티기 힘들다”며 “이공계열을 선호하지만 그마저도 모자라 계열을 따지지 않고 지원자의 태도만 보고 채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IMAGE4%%]대학생 85.7% “스펙 강박증에 시달려”이처럼 대기업 입사자가 중소기업보다 스펙이 월등한 현상은 구직자들의 ‘스펙 강박증’을 낳는다. 취업포털 커리어는 대학생 67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5.7%가 ‘심각한 취업난으로 인해 스펙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답했다고 지난해 밝힌 바 있다. 학년별로는 ‘4학년’(91.6%)이 가장 높았고 ‘3학년’(85.2%), ‘2학년’(78.5%), ‘1학년’(74.7%)도 절반 이상이 이런 강박증에 시달렸다. 이유(복수 응답)로는 ‘지금의 스펙으로는 취업이 불가능할 것 같아서’(74.6%)가 가장 많았다.
‘취업 3종 세트’(학벌·학점·토익)에 이어 ‘취업 5종 세트’(인턴·봉사활동·공모전·자격증·아르바이트)라는 신조어까지 생길 정도다. 취업에 필요한 스펙만 8가지가 넘는 셈이다. 잡코리아의 김화수 대표는 “1990년대 후반부터 토익 성적, 해외연수 등이 스펙으로 인식된 데 이어 영어 말하기 성적, 국내외 봉사활동, 인턴, 공모전 등으로까지 영역이 확산되고 있다”며 “대기업의 경우 채용 때 학점, 어학점수, 자격증 등에 제한이 있어 중소기업보다 스펙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대학 교육에서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 취업 기준이 되면서 그만큼 대학생이 부담해야 하는 사교육비도 늘고 있다. 취업포털 커리어가 구직자 920명을 대상으로 최근 설문조사한 결과 절반가량(49.3%)이 ‘대학 교육이 취업에 도움이 안 된다’고 답했다. 또 영어 성적을 올리고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월평균 29만3천원의 사교육비를 쓴다’고 밝혔다. 해마다 1천만원이 넘는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 외에도 사교육비에만 360만원가량을 쓰고 있는 것이다.
손낙구씨가 쓴 를 보면, 서울대 합격은 아파트 가격에 비례한다. 9억원대 아파트에 살면 서울대에 1천 명당 28명이, 7억원대 아파트에 살면 22명, 5억원대 아파트에 살면 12명이 합격하는 식이다. 게다가 대학 공부만으로는 대기업에 취업할 수 없는 상황이다보니 결국엔 취업마저도 부모의 경쟁력에 영향을 받게 된다.
기업에 필요한 창의성이 기준 돼야이처럼 좋은 스펙이 대기업 취업과 직결되는 양상을 보이지만, 스펙이 입사 이후 업무능력과 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경북 포항의 한동대를 졸업하고 지난해 STX건설에 입사한 윤여만 주임은 지방대 출신으로 입사 과정에서 학벌 등 각종 스펙으로 인한 설움을 겪기도 했으나 지금은 “토익성적이나 학교성적이 회사 업무와 큰 상관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입사 50일 만에 임원과 함께 러시아로 출장을 가게 되는 등 회사가 나를 신뢰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누구보다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CJ그룹 인사담당자도 “많은 입사 지원자들이 비슷한 스펙을 갖게 되면서 우수한 지원자에 대한 변별력이 없어졌다”며 “입사 뒤 업무 능력에서도 스펙 보다 본인의 노력, 자세 등이 더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기업들은 스펙으로 능력을 판단하는 대신 인턴십 등 다양한 경로로 입사자를 선별하려는 노력을 벌이고 있다. 포스코를 비롯해 STX그룹, CJ그룹 등이 올해 인턴십을 도입하거나 확대했다.
기업의 경쟁력을 위해서도 스펙 중심의 채용 과정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광운대 탁진국 교수(산업심리학)는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경쟁률 100 대 1이 넘게 지원자가 몰리면서 편의주의적으로 학점이나 영어 성적에 제한을 두는 경향이 있지만, 토익 몇 점 이상이면 일을 잘한다는 증명이 없다”며 “인턴십 등을 통해 개인이 실제 갖는 역량을 점검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선발 방식을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LG경제연구소의 이춘근 수석연구위원은 “학력이나 학벌이 실제 업무 능력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스펙의 영향도는 점점 줄어들 것”이라며 “지금까지 선진국 기업 제품을 따라잡는 추격자 역할에 머물던 우리 기업들도 이제는 독창적인 제품을 먼저 만들어내는 능력을 요구받는 만큼, 일률적인 스펙보다는 창의성과 도전 정신 등을 갖춘 인재를 선호하는 시대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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