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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연구원, 반항의 대가는 해체?


반노동 원장에 파업으로 맞선 연구원에 국책사업 잇따라 끊겨…
산하 코윈센터 전 직원에겐 정리해고 통지서
등록 2010-04-16 11:53 수정 2020-05-03 04:26
Members of Korea Labor Institute union have a protest against the management's lockout in December, 2010.
(Photo by Shin So-young)

Members of Korea Labor Institute union have a protest against the management's lockout in December, 2010. (Photo by Shin So-young)

지난 4월5일 한국노동연구원 산하 고성과작업장혁신센터(코윈센터)의 전 직원 18명에게 정리해고 통지서가 날아왔다. 오는 5월24일까지 서울 순화동 사무실 건물을 비우라는 내용이었다. 코윈센터는 2004년 설립된 뒤 민간기업에 가족 친화 경영, 일자리 나누기 사업 등에 대한 무료 컨설팅을 해왔다.

원장 사퇴 뒤 정부 직접 쇠방망이 들어

7년 역사의 코윈센터가 이렇게 ‘사망선고’를 받으면서, 센터의 몸통인 노동연구원의 운명에도 시선이 쏠리고 있다. 정부는 올해 들어 노동연구원에 주던 연구 용역을 끊었다. 정부가 원장 선임 절차를 미루면서, 노동연구원의 원장석은 석 달 넘게 비어 있다. 연구원도 코윈센터의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말이 연구원 안팎에서 힘을 얻고 있다.

사태의 발단은 2008년 8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취임한 박기성 원장은 잇따른 ‘반노동’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지난해 7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동연구원의) 연구위원들이 지난 10년간 좌파의 해방구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에는 국회 정무위원회에 출석해 “노동3권을 헌법에서 빼는 것이 소신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혀 노동계의 거센 반발을 샀다. 박 원장의 발언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은 이유는 그의 말이 현 정권의 시각을 일부라도 반영한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2월에는 전국공공연구노조 한국노동연구원지부와 맺은 단체협약을 해지하겠다고 통보했다. 이는 지난해 하반기 85일간의 파업과 국책연구기관 초유의 직장 폐쇄로 이어졌다. 박 원장은 결국 지난해 12월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렇게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노조도 파업을 마무리했고, 직장 폐쇄도 철회됐기 때문이다.

새해 들어서는 정부가 직접 ‘쇠방망이’를 들었다. 노동연구원 안에서도 코윈센터가 ‘시범 케이스’가 됐다. 노동부는 지난 1월 코윈센터가 해마다 진행하던 ‘남녀고용 평등을 위한 적극적 고용개선조치 사업’을 승인하지 않았다. 코윈센터가 노동부에서 위탁받아 진행하던 6개 사업은 올해 들어 모조리 공개 입찰로 바뀌었다. 사업이 끊기면서 돈줄도 끊겼다. 1~2월 직원들의 월급은 체납됐다. 노동연구원 노조와 별도로 조직된 코윈센터 노조(코윈센터는 노동연구원의 부서가 아니라 산하 기관으로 독립해 있다)는 ‘백기 투항’을 요구받았다. 코윈센터 노사는 지난 2월2일 ‘항구적인 무파업 실천’ ‘정부의 표준단체협상안에 기초해 단체협약 체결’ 등에 합의했다. 노조가 스스로 손발을 묶는 선택을 했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코윈센터가 맡던 6개 사업은 지난 3월 말 노사발전재단으로 넘어갔다. 노사발전재단은 한국노총과 경총 등이 지분을 출자해 2006년에 만든 기관이다. 노사문화 우수 기업을 선정하고 포상하는 등의 사업을 하지만, 코윈센터가 벌이던 사업 분야에는 전문성이 적었다. 노사발전재단은 이들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코윈센터 직원들을 불러들였다. 지난 4월1일 코윈센터 직원 45명 가운데 19명이 재단으로 일터를 옮겼다. 이승우 코윈센터 노조 사무국장은 “전문성이 없는 재단에서 먼저 사업을 맡은 뒤, 정부가 배제했던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꼴”이라고 말했다. 이 사무국장은 코윈센터가 문을 닫은 이유에 대해서는 “코윈 사업이 참여 정부 때 시작됐고 노조가 강성이라는 인식 때문에 노동연구원 안에서도 가장 먼저 구조조정의 대상이 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더 이상 맡지 않는 사업

한국노동연구원이 더 이상 맡지 않는 사업

‘반성문’ 냈지만 정부 쪽 화답은 없어

정부의 칼날을 ‘몸통’인 노동연구원도 피해갈 수 없었다. 연구원이 해마다 맡던 사업이 줄줄이 경쟁입찰 목록에 올랐다. 연구원의 임금직무혁신센터 업무도 올해에는 경쟁입찰 대상이 됐다. 10억원의 예산으로 운영되던 고용영향평가센터는 한국고용정보원으로 이미 이관됐다. 고용정책을 펴기 위한 기초자료인 한국노동패널 작성 사업도 보통 연초에 계약이 이뤄지지만, 올해 들어선 아직까지 노동부가 뒷짐을 지고 있다. 1998년 시작된 노동패널 조사는 해마다 4월에 시작됐지만, 올해는 언제부터 조사가 이뤄질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노인 정책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는 고령화연구패널 작업도 같은 이유로 진행이 되지 않고 있다. 이상호 노동연구원 노조지부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적들이 하나씩 팔다리를 떼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원장실도 박기성 전 원장이 물러난 이후 3개월 넘게 비어 있다. 국책연구기관의 관리·감독을 맡은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의 이상철 경영지원실장은 “노동연구원의 원장 선임 절차를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연말에 견줘 상황이 바뀐 것이 없기 때문에, 노동연구원이 정상화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앞으로 원장 선임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심상찮게 전개되자 노동연구원의 학자들이 나서 ‘반성문’을 냈다. 이들은 지난 3월18일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일동’ 명의로 낸 성명에서 “지난 1년여 동안 한국노동연구원이 국책연구기관으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점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자성의 뜻을 표합니다”라며 “일자리 창출 및 노사관계 선진화 등 국정과제 수행에 적극 기여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 쪽에서 화답은 없었다. 임태희 노동부 장관은 앞선 2월18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노동연구원을 가리켜 “국책연구기관으로서 당연히 (정부의) 발주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안 된다”고 밝혔다. 박종길 노동부 대변인은 “한국노동연구원을 보면서 정부의 중요한 연구를 맡겨도 되는지에 대해 실무자들이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연구원의 목을 조르는 정부의 의중은 무엇일까? 노동연구원 안팎에서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얘기되고 있다. 첫째는 국책연구기관 가운데서도 상대적으로 진보적 목소리를 냈던 노동연구원을 해체하거나 다른 연구기관에 통폐합하는 것이다. 둘째는 노동연구원의 명맥은 유지하면서도 규모를 대폭 줄이고 인력을 물갈이한다는 안이다. 연구원에서는 박기성 전 원장이 연구진들의 성향을 분류한 뒤, 구조조정할 대상자들을 이미 확정했다는 말까지 떠돌고 있다.

“공공기관 선진화 계획 시범 케이스”

김주섭 노동연구원장 직무대행은 “누구도 얘기해주는 쪽이 없어서 전망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정부에서 굉장히 화가 난 것은 짐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 홍영표 의원실의 김진원 보좌관은 “정부는 노동연구원을 국책연구기관 가운데 정부의 표준단체협약안을 관철시키는 등 공공기관 선진화 계획을 적용할 시범 케이스로 생각하고 있다”며 “2008년 정부가 연구기관 통폐합 방안을 냈듯이 상황에 따라 노동연구원을 다른 연구기관에 통합하는 안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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