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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사회로 가는 작은 ‘밑돌’ 하나


한국인 양자로 입적된 파키스탄 청년 출국 명령에 의정부지법 “입양 진정성 있어 체류 연장” 판결
등록 2010-02-11 09:56 수정 2020-05-02 19:26

지난 2000년 파키스탄 출신 이판(28)은 삼촌 카와자를 만나러 한국에 들어왔다. 카와자는 한국인 정아무개씨와 결혼해 경기 의정부에 살고 있었다. 그 집에는 삼촌 카와자의 장모 이아무개씨도 함께 살았다. 석 달짜리 임시 체류비자를 받은 이판은 기간을 넘겨 머물다 2003년 정부의 ‘불법체류자 자진신고 기간’에 합법화 조처를 받고 2005년 3월 파키스탄으로 돌아갔다.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지난해 12월6일 서울 중구 정동 성프란체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유엔 세계 이주민의 날 기념 이주민 희망발언대에서 이주노동자의 인권과 노동권 보장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지난해 12월6일 서울 중구 정동 성프란체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유엔 세계 이주민의 날 기념 이주민 희망발언대에서 이주노동자의 인권과 노동권 보장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

삼촌의 한국인 장모가 “양자 삼고 싶다” 제의

한국에 있는 동안 이판은 삼촌의 장모인 이씨 등과 한 식구처럼 정이 들었다. 이씨 남편이 2000년 11월 숨지기 전까지는 입원해 있던 병원을 들락거리며 제 일처럼 병간호를 했다. 휴가철에는 다 같이 피서를 가기도 했다. 이씨도 붙임성 좋은 성격의 이판을 아들처럼 챙겨줬다. 삼촌 카와자는 그 사이 한국 국민으로 귀화까지 했다.

이판이 한국을 떠나기 전 이씨는 “너를 양자 삼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이판으로서는 어제의 삼촌이 오늘부터는 매형이 되는 ‘이상한’ 모양새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따로 살던 이씨의 큰아들은 물론이고 삼촌 카와자와 숙모 정씨, 그리고 그 사이에 태어난 조카까지 모든 식구가 “좋다”고 했다. 이판도 한국이 좋았고, 가족이 좋았다.

석 달 뒤 서류상 이씨의 양자가 된 이판은 이듬해인 2006년 7월 다시 한국에 와 의정부에서 식구들과 함께 살았다. 알콩달콩 새 가족과의 생활을 즐기던 그에게 2008년 10월 날벼락이 떨어졌다. 체류 기간 연장을 신청한 그에게 의정부출입국관리사무소는 11월3일까지 한국을 떠나라고 했다. 체류 기간 연장을 못해주겠다는 결정이었다. 이판은 9개월 정도만 더 한국에 머물면, 국내 체류 3년을 채워 귀화를 신청할 자격을 얻을 참이었다.

출입국사무소 쪽은 “입양 사유가 국내 장기체류의 방편이고, 국내에 머물 특별한 이유나 인도적 사유가 없다”고 했다. 즉 입양은 이판이 한국에 머물며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일 뿐이고, 이들이 진짜 가족임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출입국사무소 쪽이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이렇다. “입양이란 통상 대를 잇는다거나 생계 능력이 없는 미성년자를 양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것인데, 이 사건 입양은 양자와 양모 사이에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 성년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서 대한민국 정서상 이해할 수 없다.”

외국인의 한국 사회 편입에 인색한, 선입견이 짙게 밴 결정이었다. 이판은 소송을 냈고, 의정부지법 행정1부(재판장 김동하)는 지난 2월2일 결국 이판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씨는 이미 파키스탄인을 사위로 삼은 경험이 있고, 손녀 역시 이른바 ‘하프코리안’인바, 이씨 가족은 이미 다인종·다문화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고, 외국인 친화적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어서 원고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 사건 입양은 진정한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진정성 있는 가족 공동체 지켜줘야”

재판부는 또 가족관계의 진정성은 행정기관의 조사나 재판 등을 통해 밝혀질 수 있는데, 행정기관이 정책적 이유만으로 체류 기간을 연장해주지 않으면 이판 가족처럼 진정성 있는 가족 공동체의 유대관계가 훼손될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번 사건의 소송 대리를 맡은 추헌영 변호사는 “체류 기간 연장의 목적이 다소 있더라도 입양에 진정성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판결의 취지”라고 말했다. 서동칠 의정부지법 공보판사도 “다문화·다인종 사회로 가는 국내 상황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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