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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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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이런 ‘문화적 아이콘’을 갖다니


정직하고 당당한 노력으로 전례 없는 점프에 예술적 표현성까지 갖춘
‘월드스타’ 김연아가 자랑스러워라
등록 2010-02-09 05:41 수정 2020-05-02 19:25

지난 연말 많은 모임에서 친지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뭐 50 넘어서도 재미있게 사네. 당신이 김연아 관련 뭐 하는 거 TV에서 보고 깜짝 놀랐네.”
2009년 5월 한 방송사의 김연아 선수 다큐에 필자가 주재하는 팬 모임이 잡힌 뒤에 자주 듣는 이야기다. 50대에 딸 나이 선수의 팬질이라니….

세계적 관심 대상이 된 ‘은반 위의 디바’

김연아 선수. 연합

김연아 선수. 연합

밴쿠버 겨울올림픽이 다가오면서 해외 언론에 가장 자주 언급되는 한국 선수가 바로 피겨스케이팅 현 월드챔피언 김연아 선수다. 퓰리처상 후보에 네 번이나 올랐던 미국 의 필립 허시 기자가 이 선수의 4대륙선수권대회 참가 여부와 관련해 국제연맹 회장과 인터뷰를 하더니, 급기야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에게 피겨스케이팅이 이번 올림픽에서 판정 논란을 겪지 않을 것을 자신하느냐는 말까지 한다. 올림픽만 10회째 기사를 써온 마크 스타라는 스포츠 전문 기자는 얼마 전 에 게재된 칼럼에서 “피겨스케이팅 여자 부문을 지배해온 미국의 많은 스타들을 사랑했던 나와 많은 팬들은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의 김연아의 마법에 매료될 운명임을 느끼고 있다”고 쓴다.

대체 왜 전세계가 이 난리일까? 고작 만 19살인 한국의 젊은 여성에게.

피겨스케이팅은 아름다움을 기반으로 하는 스포츠다. 마찰력 제로의 빙판에서 높이 날아올라 아름답게 몸을 회전해 중력을 잠시나마 벗어나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운동성과, 배경음악에 맞춰 스핀·스파이럴·스텝 등을 발레 동작과 함께 구사하며 음악에 내재된 스토리를 들려주는 예술성을 동시에 갖춘 은반 위의 오페라다. 여자 싱글 챔피언은 바로 그 오페라의 디바다. 그렇기에 지금껏 이 종목의 올림픽 챔피언과 세계 챔피언은 전통 문화 강국인 미국·러시아·영국·독일·프랑스 등에서 나왔다. 이 종목은 문화 공연 스포츠다. 그래서 심판 판정에 의존하는 바가 크고, 문화 강국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들의 문화적 자존심을 대변하는 종목이고, 그 디바는 문화적 아이콘이 되어왔다.

1985년부터 어언 25년 동안 이 스포츠를 사랑해왔다. 그중 10년을 피겨가 가장 성행했던 미국에서 지켜보며 우리도 세계적 선수 하나 가질 수 없을까, 꿈꾼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음악과 함께 호흡하는 댄스라는 피겨의 본질, 그리고 스토리를 담아내는 마임 연기와 그것을 아름답게 표출하는 안무에 생각이 이르자, 다양한 서구적 문화 전통의 기반이 없으면 좋은 선수가 나오기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 20여 년 동안 필자에게 피겨는 그렇게 ‘사랑하는 남의 스포츠’였다. 그래서 김연아 선수가 2009년 3월 월드챔프가 되었을 때 TV 앞에서 기립박수를 부끄럼 없이 쳐댔다. 드디어 세계가 인정하는 문화 아이콘을 우리가 가진 것이다.

김연아가 뭐 그리 대단한 선수냐고 누가 묻는다면 3박4일도 더 이야기해줄 수 있다. 언론에 수박 겉핥기식으로 비쳐지는 여자 최초의 200점 돌파 같은 것은 아주 작은 부분이다. 기술적으로 김연아의 ‘트리플-트리플 점프’는 피겨 역사에 그 예를 찾기 어려운 정확하고 스케일 큰 점프다. 게다가 관중을 음악과 연기에 몰입시켜가는 그 음악성과 예술적 표현력은 내놓는 작품마다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합당하다. 이런 선수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 피겨가 거의 가져본 역사가 없다. 피겨 역사책을 뒤로 넘기면 김연아가 가진 ‘출전한 전 대회에서 메달 획득’이라는 기록은 50년 전에야 두 번 있었다. 총 우승 횟수는 이미 역대 6위다.

하지만 단순히 대회 성적만이 아니다. 김연아가 이 위치에 오기까지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는 경기 외적인 난관을 생각하면 절로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돈이 많이 드는 스포츠인 피겨를 변변한 지원 없이 계속해, 선진국 선수들을 마치 관운장이 오관참수(五關斬首) 하듯 이겨온 통쾌함도 있다. 또 여기에 피겨 변방국 출신으로 받아온 차별과 편파 판정이 있었기에 더욱 같이 울고 웃었다. 더불어 이런 하늘이 내린 손안의 보물을 잘 모르는 우리 사회 일각에 분노하며 더욱 팬이 돼왔다.

김연아 선수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이 19살의 발랄한 여성은 재정적으로 안정된 상태로 훈련하게 된 지 고작 3년밖에 안됐으면서 그 기간 중 후배 선수와 장애아동에게 알려진 것만 20억원에 달하는 기부와 나눔을 주어 기성세대를 부끄럽게 했다. 얼마 전에도 지진 피해를 입은 아이티에 1억원을 기탁했다. 우리가 바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여기 있다.

이미 그는 우리 시대의 서태지다. 많은 어린이들이 ‘연아 언니가 좋아서’ 스케이트를 신는다. 나이도 훨씬 많은 팬들이 김연아 선수를 존경한다고 말한다. 김연아 선수를 보며 다이어트에 성공한 이야기도, 병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려온다. 우리는 바르게 사는 법, 정직하고 당당한 노력으로 충실하게 가꿔온 기량이 빛을 발하는 것을 이 선수를 통해 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7살에 피겨를 시작해 사춘기를 온통 차가운 얼음판에 넘어져가며 녹여낸 이 숙녀가 평생의 꿈을 올림픽에서 이루기를 같이 태교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기도하고 있다.

누군가가 김연아 선수의 라이벌이 누구냐고 묻는다. 혹은 어느 나라 누구라고 주장한다. 김연아 선수의 라이벌이 있다면 이미 은퇴한, 일컬어 ‘피겨의 전설’이라 불리는 사람들뿐이다. 카타리나 비트, 소냐 헤니, 크리스티 야마구치, 미셸 콴 정도. 그들 대부분이 올림픽을 거쳤다. 챔피언이라는 이름으로. 그래서 김연아 선수가 같은 꿈을 이루고 같은 반열에 당당히 서기를 바란다.

성실하고 정직한 노력의 승리 보고파

1960년대 한국 남자농구에는 신동파라는 걸출한 선수가 있었다. 그는 당시 국내보다 아시아의 라이벌이던 필리핀에서 더 유명했는데, 필리핀의 아시아 챔피언 등극을 번번이 막은 신 선수의 이름 “동파!”가 필리핀에선 언젠가부터 “좋다” 또는 “잘 끝냈다”는 말로 쓰인다고 한다.

우리는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한 인간이 성실하고 정직한 노력으로 승리하는 것을 보고 싶다. 그래서 올림픽 사학자 데이비드 왈레친스키가 말하듯 “여자 피겨 올림픽 챔피언은 전세계 누구나 알게 된다”는 그 자리에 김연아 선수가 오르기를 원한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꿈을 같이 이루어준 “김연아”라는 단어를 “행복해”라는 뜻으로 쓰게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이미 김연아 선수와 함께 트리플-트리플 점프를 하며 세계로 날아오르고, 같이 스파이럴 자세를 취하며 그 부당한 판정의 얼음장을 가를 준비가 되어 있다.

송두헌 용인송담대 컴퓨터게임정보과 교수·피겨 블로blog.daum.net/sadprince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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