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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밀집 지역에 폭격 집중

도쿄 대공습 때 숨진 한국인 1만 명 추정… 2005년에야 조사 시작돼 유족 확인 중
등록 2010-01-28 18:52 수정 2020-05-03 04:25
1923년 간토 대지진 때 조선인 희생자들과 도쿄 대공습 때 조선인 희생자들의 유골함(아래)들이 보관된 도쿄 요코아미초 위령당(위). 한겨레 자료

1923년 간토 대지진 때 조선인 희생자들과 도쿄 대공습 때 조선인 희생자들의 유골함(아래)들이 보관된 도쿄 요코아미초 위령당(위). 한겨레 자료

1945년 3월10일 일본의 수도 도쿄를 불바다로 만든 ‘도쿄 대공습’은 한국인에게는 잊혀진 폭격이다. 당시 ‘하늘의 요새’라 불리던 B29 폭격기가 325대나 동원된 이날 공습으로 숨진 사람은 최소 8만3793명(당시 일본 경시청 조사)에서 10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모두 일본인이었을까?

우연히 건네받은 쪽지의 조선인 이름

일본의 ‘도쿄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조사단’(이하 조사단)과 ‘도쿄 대공습 조선인 희생자 추모모임’은 10만여 명의 희생자 가운데 10%인 1만여 명이 조선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최근까지 도쿄 대공습 연구는 일본인의 피해 상황에 집중돼 있었을 뿐,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인일 수도 있다는 점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당연한 결과로 도쿄 대공습으로 인해 조선인 몇 명이, 어디서, 어떻게 숨졌으며, 그들의 유골은 지금 어떻게 방치돼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잊힌 조선인 희생자 문제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5년 10월 우연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도쿄에서 남쪽으로 287km 떨어진 하치조지마(八丈島)의 조선인 강제연행 실태를 조사하던 이일만 조사단 사무국장은 우연히 기자에게서 도쿄 대공습 때 사망한 조선인 3명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건네받는다. 사망자의 이름이 있으니 그들의 명단도 있을 것이라 판단한 이 사무국장은 국립중앙도서관 등 일본의 유명한 도서관 자료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조사단은 마침내 도쿄 지요다구 일본교육회관 도서관에서 1974년 3월 미노베 료키치(1904~1984)가 도쿄 도지사 시절 작성한 명부를 찾아냈다. 조사단은 이 명부 속에서 창씨개명은 됐지만 조선 사람의 이름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이름 50개를 찾아냈다.

당시 일본에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군수공장이 밀집된 혼조구(지금의 스미다구), 후카가와구, 조도구(지금의 고토구) 등의 공장 기숙사와 서민 주택에 집단 거주하고 있었다. 이는 불행히도 미군의 폭격이 집중된 곳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일만 사무국장은 1945년 9월 현재 도쿄의 조선인 전재자 수(4만1300명) 등에 근거해 도쿄 대공습으로 숨진 조선인이 적어도 1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치를 제시했다. 이후 도쿄 대공습 전재자료센터 등 일본 학계에서도 대부분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

유족 초청해 위령제 진행

그러는 사이 남과 북에서는 피해자들과 유족들이 하나둘 확인되는 중이다. 조사단은 2008년 2월, 한국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도쿄 대공습 희생자 고 황수달(사망 당시 24살)씨의 아들 황병환(71)씨와 고 김봉석(사망 당시 32)씨의 딸 김금란(71)씨를 도쿄로 초청해 조촐한 위령제를 열었다. 북한에서는 2009년 8월 ‘조선 일본군 위안부 및 강제연행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를 통해 평안북도 강계군 출신 고 송정호(1930~2009)씨의 증언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사무국장은 “송씨가 지난해 8월 숨지기 직전 남긴 증언을 통해 일제의 강제동원 실태와 도쿄 대공습 당시 조선인들의 피해 상황을 더 명확히 알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길윤형 기자 한겨레 일제강점 100년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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