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에서 희대의 무단 감청 사건이 발생했다. 유례가 없다. 총학생회장 선거가 무대가 됐다.
지난 11월17일부터 차기(53대) 총학생회장 선거가 치러졌다. 연장투표까지 벌인 끝에 11월26일 겨우 투표함을 봉인할 수 있었다. 선거 규정상 투표율 50%를 채워야 했다. 하지만 이후 투표함은 열리지 못했다. 곧장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된 탓이다. 투표함이 선거도 끝나기 전에 개봉됐다는 것이다. 증거물로 감청 파일까지 공개됐다.
부정선거의 당사자로 지목된 박진혁 선거관리위원장(현 총학생회장)은 당일 사퇴 의사를 밝혔다. 부정선거 의혹은 부인했다. 이튿날 선관위가 통째 사퇴했다. 학생 진상조사위원회는 지난 12월2일 저녁 7시 감청한 이와 감청당한 이를 대동한 공개 청문회를 열기로 했다. 일정에 합의한 박 전 선관위원장 쪽이 불참의 뜻을 당일 일방 통보했다. 의혹은 더 커졌다.
‘신뢰’라고는 모두 불타버린 교정. 학생회와 선거에 대한 인색한 관심이 선거 뒤에야 폭발하는 역설을 낳았다. 물론 그 형태도 불신과 비방, 충격과 절망으로 정리된다. 급기야 ‘총학생회 폐지론’까지 다시 불 지펴진다. 서울대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산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홍익대 등에서도 세밑 선거 부정 시비가 쉴 새 없이 터져나온다.
이 서울대 총학생회 운영위원회, 학생 진상조사위, 전 선거관리위원회 발표 자료와 보도 등을 통해 서울대의 지난 보름을 추적했다.
지난 11월20일 금요일 투표가 끝난 저녁 8~9시. 서울대 각 지역에 놓인 투표소의 선거인명부, 투표용지 등이 담긴 봉투가 투표함과 함께 회수된다. 하나둘 선관위 사무실(총학생회실)로 모여든다. 수많은 봉투 더미엔 마이크 두 개가 달린 고성능 녹음기가 담긴 봉투도 있다. 그리고 밤 9시45분, 사무실 안 ‘인기척’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 녹음기에 포착되기 시작한다.
이날 전체 투표율은 38%를 넘지 못했다. 학교는 재투표를 예고한 채 조용한 주말(21~22일)을 건넌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9시 전후로 선관위 사무실에 보관됐던 봉투와 투표함은 다시 각 지역 투표소로 이동한다. 나흘간 선관위 사무실 내 봉투 속에 숨어 있던 녹음기도 누군가의 손에 옮겨진다.
학교는 23~25일 재투표를 진행한다. 그 시기 녹음기는 어디서 누구와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연장투표까지 종료된 26일 낮 12시를 지나며, 녹음기는 마침내 말문을 연다.
“38대 25대 22… ‘권리찾기’가 (득표율이) 좀 올라갈 거고 ‘예스위캔’ 좀 떨어지고….”
“결과도 나쁠뿐더러… 그나저나 어떡하냐. ‘리본’ 애들은… 완패다, 완패.”
3박4일치 파일에서 박 전 선관위원장을 포함한 무리의 목소리가 살아나온 것이다.
비운동권 현 총학생회장 잠적으로 의혹 커져구체적 수치와 각 후보 진영의 이름이 나오고, 특정 진영이 ‘완패’라는 분석까지 거론된다. 게다가 리본 진영은 박 전 선관위원장이 속했던 비운동권 계파다. 51·52대 총학생회장을 배출했다. 심지어 연장투표 전이었다. 조작 가능성이 기다렸다는 듯 제기된다.
감청은 예스위캔 선거운동본부의 작품으로 드러난다. 예스위캔 쪽은 “부정투표 의혹이 높다”며 “우리가 직접 11월20일 총학생회실 어딘가에 녹음기를 설치했다”고 스스로 밝힌다. 김아무개 선거운동본부장은 “지금 공개된 자료가 다라고 생각하면 박 전 선관위원장은 정말 후회할 것”이라고 말한다. 학내 언론이 그를 동영상에 담았다. 유튜브도 그 ‘경고’를 확산 중이다.
박 전 위원장을 포함한 전 선관위 위원들은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투표소 지킴이들의 봉인 처리 미흡과 선본 차원의 득표율 예측에 관한 대화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분노는 거세다. 의견 대립이 거칠다. 감성은 인신 비방, 이성은 감청 자료의 증거 능력에 치중해 있다. 1992년 대선에서 통일국민당이 민자당을 지지하는 부산 지역 기관장들의 대화를 도청해 나라를 흔들었던 ‘초원복집 사건’의 축소판이 된다.
박 전 선관위원장과 예스위캔 후보는 언론과의 접촉을 일체 피하고 있다. 12월10일 현재 전화가 꺼져 있거나 질의를 담은 전자우편에 회신하지 않는다.
사실 총학 부정선거 시비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올해만도 선거 갈등으로 뉴스가 된 대학이 10곳을 넘는다. 문제는 권력 쟁탈 방식이 교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선을 넘어간다는 데 있다. 언론마다 “정치권·기성세대 뺨친다”고 다투어 보도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절반의 진실이다.
‘기성세대’의 비판을 들어보면, 대학이 저 혼자 도도한 시대는 이미 오래전 저물었다. 하승우 한양대 연구교수(제3섹터연구소)는 “대학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보루 내지 해방구 역할을 했던 시대가 이미 지났기 때문에, 학생회 선거가 기성 선거판을 닮아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오히려 대학이 사회보다 더 보수화, 더 정확히는 시장화돼 있다”고 강조한다.
신자유주의 시대 들어 ‘탈정치화·개인화·상업화’의 과정이 공고화되는 소용돌이에 개인은 물론 학내 조직도 휩쓸렸다. 총학 선거 공약이 ‘등록금 인하’가 아닌, ‘축제 때 가수 원더걸스 초대’가 된다. 총학이 자본에 묶인다. ‘탈선 경쟁’은 물론 당선 뒤 비리에도 취약한 주요 배경 가운데 하나다.
큰 대학의 총학이 1년에 다루는 자금이 2억~3억원에 이른다. 물론 규모에 따라 다르다. 서울 소재 한 대학(정원 2만여 명 규모)의 교직원은 “학생지원비 계정으로 연간 2억원 정도를 학교에서 지원하고, 학생들이 내는 학생회비의 80%를 총학과 단과대 학생회가 나눠쓴다”고 설명한다. 학교 쪽은 축제를 통해 따로 받는 기업 후원은 5천만원 안팎으로 추정한다.
이권 따라붙고 ‘스펙’에 도움 되는 자리로일부 대학의 총학은 대놓고 이권 쟁투를 벌이기도 한다. 지난 12월1일 대전 소재 한 대학의 총학생회장 선거에 개입한 혐의로 붙잡힌 심아무개(28)씨는 조직폭력배였다. 경찰 조사를 보면, 축제·자판기·졸업앨범 등 각종 사업에 대한 이권을 챙길 목적으로 이 대학에 뒤늦게 입학했다. 그는 자신이 출마하기도 전, 유력한 상대 후보를 폭행·협박해 출마 포기를 강요한 혐의를 받고 있다.
신익태 대학문화연구소 팀장은 “큰 대학 축제만 해도 예산이 2억원 정도”라며 “총학은 법인이 아니라 영수증 발행이 어렵고, 그래서 자금 이동도 파악하기 쉽지 않다”고 말한다. 대부분 구두·이면 계약으로 관련 거래가 이뤄진다.
경제 권력만 있는 건 아니다. 신 팀장은 또한 “총학생회 경력이 ‘스펙’(진로에 도움이 되는 경력과 자산)이 된다는 점에서 경쟁을 부르기도 한다”며 “특히 지금 대학생들은 경쟁 체제가 공고화된 세대로, 상대적으로 더 비판적이던 90년대 학번이 대학을 떠난 4~5년 사이 이런 현상이 더욱더 심화한 것 같다”고 분석한다.
총학생회장이 스펙이 되는 시대가 유별날 게 없다. 그사이 일반의 대학생은 마찬가지 스펙 축적을 위해 학내 정치와 선거를 외면한다. 수단은 다르나 목적은 같은, 묘한 교차다.
물론 전통적 정치조직의 최종 목적지 역시 총학이다. 서울대 무단 감청을 벌인 예스위캔 선본은 민주노동당학생위원회 쪽이다. 이들은 “사실 지난해에도 투표용지 1만 장이 없어졌을 때 고민이 많았다. 선본 차원에서 이의를 제기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설명만큼 두 진영의 골은 깊다. 지난해 선거 때 이미 지금의 비운동권 계파에 밀렸다. 이진혁 편집장은 “기층 학생을 통해 조직을 키울 수 있는 큰 계기가 총학생회장 당선”이라며 “개인적 사심보다, 조직이 바라는 대로 학생 사회를 구성하려는 고민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몰염치한 태도’들의 토대는 정치적 무관심어느 분석틀도 2009년 대학 정치문화 수준과 배경을 한 땀으로 꿸 순 없다. 다만 학내 자치와 소통으로 갈등을 해결할 자정 능력이 가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학 사회의 진정한 위기다.
서울대 부정선거 의혹이 불거진 뒤 풀린 의문이 하나도 없다. 한편으로, 이것이야말로 몰염치·무책임한 기성세대의 정치판과 동닿는다.
지난 6월 서울대 구내식당 위조 식권을 유통시켜 500여만원을 챙긴 혐의로 최아무개(27)씨가 불구속 입건됐다. 식권을 정상 가격보다 싸게 팔아 차익을 남기던 때, 그는 총학생회 간부였다. 당시 총학은 이와 무관하다고 해명하고 사태는 매듭지어졌다.
지난해 한양대에선 총학생회비를 불투명하게 운영했다는 논란이 불거져 총학생회가 전원 사퇴했다. 하지만 배임·횡령 의혹은 전면 부인했다. 이 학교 관계자는 “이에 대한 명확한 진실 규명 없이 소리·소문 없이 정리됐다”고 말한다.
서울대의 최근 사건도 현재까진 비슷한 양상이다. 이해 당사자들을 대질시키며 산재한 의문의 단서를 풀 것으로 기대됐던 공개 청문회는 허를 찔리듯 무산됐다. 불참 통보와 연락마저 두절한 ‘잠수’가 박 전 선관위원장 쪽의 선택이었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가치 공동체가 붕괴한 상황에서 정치적 무관심, 민주적 가치에 대한 무심한 태도들이 심화됐다”며 “부정을 저질러도 정당성의 심각한 위기나 도덕적 지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문화적 토대가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이번 서울대 총학 선거도 감청 문제가 없었다면 학생들은 무관심하게 시비로만 넘겼을지 모른다. 지난해가 그랬다.
학계는 물론 학생 사회 안에서도 승자독식형 총학 체제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많다. 기실 1990년대부터 제기돼왔다. 임현진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부정선거 논란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총학은 없어져야 하지만, 학생 자치활동을 배울 기제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금의 총학이 ‘정치계급’이 되었다는 지적이 추가된다. 선출된 자가 선출한 자와 분리돼 독자적 이해관계와 권력을 유지할 재생산 기반을 갖추려는 경향을 일컫는다. 즉 뽑아준 이를 위해 정치하는 대의성이 아닌, 집권 자체가 정치 행위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신진욱 교수는 “총학이 미니 정치계급이 되었다”며 “과거엔 동아리·단과대 차원의 학생회가 활성화돼 총학과 학생 사이 여론 전달이나 견제의 매개체가 되었는데, 지금은 중간 수준의 공동체가 붕괴돼 발생하는 문제가 크다”고 말한다.
‘총학 폐지론’은 뜨거운 쟁점이다. 그러나 해체든 유지든 학생들의 관심이 없인 대학 문화는 진보하기 어렵다. 사건 이후 서울대생 전용 포털 게시판엔 이 학교 졸업생이라고 밝힌 이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총학 폐지론’ 쟁점 떠오르기도“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가 사라지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중략)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비생산적인 갈등, 기성 정치판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 기성 정치에 뛰어들기 위한 연습의 장으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가 전락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떠한 개혁과 반성, 성찰 없이 이대로 간다면 서울대 총학생회는 다시는 세워지지 않고 역사의 기록으로만 남게 되지 않겠습니까?”
서울대는 12월4일까지 재투표가 예정됐다. 4일 마감일까지 유효 투표율에 도달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누가 당선되더라도 유력한 두 후보 진영이 부정선거 의혹과 감청 책임을 추궁받는 상황에서 학생회를 온전히 이끌기 어렵다는 전망이다. 더 큰 갈등이 기다리고 있다. 여러 대학이 같은 병으로 신음하고 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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