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에 사는 주부 권귀순(55)씨는 얼마 전 들깨기름을 짜러 방앗간을 갔다 깜짝 놀랐다. 씻지도 않은 중국산 들깨가 버젓이 기계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모르면 속고 먹을까, 알면서는 사먹을 수 없었다. 권씨는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텃밭에서 2년째 채소를 자급자족하고 있다. 3천원짜리 국화 화분 하나로도 멋진 화단을 만드는 재주를 가진 그의 텃밭은 올해도 풍년이다. 도라지, 토마토, 마 등 30여 가지 작물이 땅을 놀릴 틈 없이 자랐다. 농사일에 자신감이 붙으면서 파프리카나 이탈리아 쌈상추 등 재배가 어려운 작물들도 심기 시작했다.
서울 도심에서 텃밭 가꾸는 레스토랑
권씨처럼 도심에서 직접 자신의 먹을거리를 재배하는 사람들을 ‘시티파머’(city farmer)라고 부른다. 집에서 상자나 화분, 텃밭을 이용해 농작물을 수시로 돌보는 일상화된 도시 농업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내 고장에서 생산되는 식품을 먹는 ‘로컬푸드 운동’이 확산되면서 시티파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들은 골목, 베란다, 옥상 등 씨를 뿌릴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밭으로 만든다. 집 앞 텃밭을 가꾸는 주부, 학교 옥상에서 채소를 기르는 선생님, 식재료를 직접 식당에서 기르는 사장님을 보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티파머들은 빈 화분만 봐도 모종을 심고 씨를 뿌린다. 이들이 지갑 대신 호미를 드는 이유는 먹을거리에 대한 불안감이 커서다.
권귀순씨는 이제 좋은 줄 알아도 비싸서 못 사먹던 친환경 농산물을 텃밭에서 원없이 수확해 먹는다. 올해 퇴직자가 된 남편 손석태(56)씨가 소일거리 삼아 일을 도우면서 텃밭의 규모도 늘릴 예정이다. 손씨는 “사먹는 것과 다른 채소 맛도 맛이지만, 심어만 놓으면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농작물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했다.
텃밭은 가정에서만 가꿀 수 있는 게 아니다. 기업, 학교, 식당 등 어디에서나 농작물을 키울 수 있다.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레스토랑 ‘어반가든’은 매장에서 직접 기른 채소로 샐러드를 비롯한 이탈리안 음식을 만든다. 주방장은 ‘키친가든’이라고 부르는 텃밭에서 음식에 필요한 각종 허브와 식용꽃, 유기농 채소를 직접 따다 쓴다. 텃밭은 전문텃밭관리사가 일주일에 두 번씩 들러 돌본다. 신선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드니 손님들의 반응도 좋다. 어반가든의 사장은 “도심 속 레스토랑에서 만나는 뜻밖의 자연이 손님을 기쁘게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시티파머는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는 귀농과는 다르다. 이들은 도시의 삶을 유지하면서 소득보다는 여가에 초점을 맞춰 텃밭을 가꾼다. 시장에 내다 팔 만큼이 아니라 한 끼 식탁에 오를 만큼만 생산해 먹는다. 철마다 제철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으니 자연스러운 ‘슬로푸드 운동’으로도 이어진다.
안전한 먹을거리 확보와 함께 시티파머들이 가장 만족하는 부분은 자연이 주는 치유 효과다. 수원시 농업기술센터 인력육성팀 박현자 팀장은 “시티파머 교육 과정이 끝날 때마다 설문조사를 해보면 우울증을 극복했다는 답변이 많아 놀라게 된다”고 말했다.
공부에 지친 아이들과 달팽이 잡으며 대화
고등학교 2·3학년인 두 아이를 둔 이순옥(51·경기 수원시 권선구 구운동)씨는 일요일 아침 7시면 남편·아이들과 함께 텃밭에 나온다. “배추가 너의 신선한 쉬야를 기다리고 있어”라는 말에 아들은 졸린 눈을 비비고 그를 따라나선다. 밤샘 공부에 지친 아이들에게 텃밭은 숨 쉴 공간이 돼준다. 무료 임대로 받은 16.53㎡(5평)짜리 텃밭에서 네 사람이 할 일이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사이 좋게 달팽이나 배추벌레를 잡으며 대화를 나누다 보면 텃밭에서 보내는 시간이 짧진 않다. 텃밭에서 가져온 넘치는 수확물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는 사람이 임자다. 각박한 도시 생활에서도 나누는 기쁨을 알게 된다. 이순옥씨는 “농작물이 자라는 시간만큼 인내심을 기르게 되는 것 같다”며 “바쁘게 사는 도시인들도 욕심을 버리고 여유를 갖게 돼 정서 함양에 좋은 것 같다”고 했다. 텃밭을 ‘천연 냉장고’로 부르는 그에게 바람이 있다면 이 좋은 텃밭 농사를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으면 하는 거다. “가격으로 따지면 사먹는 것과 길러 먹는 것이 별 차이가 없지만 질로 따지면 비교를 할 수 없어요. 저 같은 시티파머들은 가진 것은 없어도 마음이 다 부자거든요. 땅이 없어 시작을 못하는 사람들에게 정부가 적극적으로 공공텃밭을 임대해준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겠죠.”
도시농업이 활성화되면 도시 사람들에게도 농업의 중요성을 환기시킬 수 있다. 인천도시농업네트워크의 김진덕 운영위원장은 “농촌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도시인들에게 농업의 위기를 말해도 공감을 얻긴 힘들다”며 “농업은 사양사업이라거나 식량은 수입만으로도 조달이 가능하다는 식의 잘못된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시티파머들이 너도나도 자급자족을 하게 된다면 농촌이 더 어려워지는 것은 아닐까? 김 운영위원장은 “오히려 농업에 대한 가치 인식이 높아져 농업 문제 해결도 쉬워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문텃밭관리사 등 일자리 창출도텃밭 농사는 배우면 더 낫다. 시티파머들도 영어학원을 다니듯 전국귀농운동본부나 시별 농업기술센터에서 운영하는 ‘도시농부학교’를 다니면 더 나은 농사꾼이 될 수 있다. 수업에선 작물 재배법 말고도 우리가 생태농업을 해야 하고 도시와 농촌이 함께 농업 문제를 풀어야 하는 이유 등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농사 경험이 없는 주부 정선주(57)씨도 수업을 듣고 텃밭에서 작물을 키워보기 전엔 농촌의 어려움을 생각해보지 못했다. 2년 전에 그가 첫 호미질을 하는 것을 보고 누구는 “땅이 간지럽다고 하겠다”며 놀렸다. 그래도 텃밭과 씨름하며 흘린 땀이 헛되지 않았는지 배운 대로 해보니 이제 제법 농사 실력을 뽐낼 정도가 됐다. 강원도에 사는 친척이 맛있다고 해서 역으로 감자를 보내주기도 했다. 농사꾼처럼 거칠어진 손은 간암으로 투병 중인 남편의 건강도 되찾아주었다. 신선한 채소로 만든 녹즙은 보약이 돼줬다. “농사를 직접 해보고서야 농부의 어려움을 알았다”는 그는 시티파머가 되려는 이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니 배워서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흙을 그리워하는 어른들과 달리 농부가 되고 싶은 아이들은 없다. 인천 계양구 소양초등학교는 올봄 옥상녹화사업의 일환으로 학교 옥상에 감자, 방울토마토 등을 심은 상자텃밭 100개를 만들었다. 특별활동부인 5학년 재배부 아이들 20여 명이 직접 옥상농원을 가꿨다. 현호(12)도 지난 7월 자신이 기른 감자를 집에 가져가 요리해 먹었다. “땡볕 아래서 작물을 관리하는 게 힘들어도 즐거웠다”는 아이는 농부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저었다. 재배부 지도를 맡았던 장규덕(42) 교사는 “도시 학교는 운동장 확보도 힘든 상황”이라며 “학교 옥상이라도 녹화사업을 벌여 아이들에게 자연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도시와 농촌의 거리가 멀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장 교사도 시티파머다. 그는 도시농업의 긍정적인 효과를 설명하며 중앙이나 지방정부에서 시티파머 육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핵가족이 많은 도시에선 상자텃밭으로 키운 채소만으로도 자급자족이 가능해요. 소비자가 친환경 농산물에 맛을 들여 자꾸 찾으면 재배 농가에서 농약 사용을 줄여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어요. 또 학교나 기업 건물의 옥상녹화사업은 냉난방 에너지 절약과 전문텃밭관리사란 일자리 창출까지 가능하죠.”
장 교사처럼 열성적인 시티파머들은 지역사회 공동체를 재건하는 데도 한몫한다. 공공텃밭이 늘수록 주민이 이웃과 지역에 더 큰 애정을 가질 수 있다는 연구결과는 도시농업이 활성화된 다른 나라들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장 교사도 텃밭을 가꾸며 알게 된 마음 맞는 이들과 훗날 귀농을 하려고 생각 중이다. 모임 이름은 딱히 없지만 함께 공동 경작지를 꾸리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도시민들이 텃밭 채소를 자급자족한다면 농산물 가격이 요동치는 걸 막을 수 있다. 실제로 도시농업을 통해 1990년 초반에 닥친 경제와 식량 위기를 극복한 쿠바의 사례가 이를 입증한다. 하지만 국내에선 도시농업의 갈 길이 아직 멀다. 서울시 농업기술센터 도시농업팀 주재천씨는 “텃밭 개념은 1992년부터 사용돼왔지만 시티파머를 포함한 도시농업의 개념은 최근에 주목받기 시작했다”며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와 달리 국내에선 지난해 9월에야 도시농업연구회가 만들어지는 등 도시농업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전국적으로 시티파머는 몇 명인지, 도시농업 면적은 얼마나 되는지를 알 수 있는 통계조차 없다. 근교농업까지 도시농업에 포함할지, 수익 발생은 어떻게 볼지 등의 논의조차 이제 시작됐다. 그나마 도시인의 텃밭 가꾸기를 교육사업으로 꾸려온 도시별 농업기술센터가 도시농업과 시티파머 양성에 관심을 가지면서 대략적인 텃밭 규모만 산출해내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현재 유료로 텃밭을 임대하는 농장 25곳의 편의시설 등을 지원하고 있을 뿐 시가 무료로 시민들에게 임대하는 공공텃밭은 없는 실정이다.
지자체들, 도시농업 활성화 방안 검토인천도시농업네트워크 김진덕 운영위원장은 “우리 정부는 식량자급률 정책이 없어 보호되는 농지가 없다”며 “녹지의 가치를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하려면 무분별한 도시개발부터 멈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도시농업을 활성화하는 방안으로 △급식 문제 해결을 위한 학교 텃밭 조성 △텃밭관리사 같은 희망근로자를 통한 일자리 창출 △누구나 쉽게 농업을 접할 수 있는 도시농업공원 조성 △텃밭 개념을 도입한 옥상녹화사업 지원 확대 △자투리땅 활성화를 위한 도시텃밭지원조례 제정 △도시농업 교육 및 행정 편의 제공 등을 제안했다.
각 지방자치단체들도 도시농업의 다원적 가치를 인정하고 도시농업 활성화를 통한 생태도시 만들기를 검토하고 나섰다. 수원시는 현재 ‘수원시 도시농업조례’(가칭) 제정을 준비 중이다. 서울시는 옥상녹화사업 중 하나로 옥상정원이 아닌 옥상농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미 서울시 농업기술센터 옥상에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내년에는 25개 구로 확대 운영한다는 계획이다. 지난 7월에는 종로구 장사동 ‘세운초록띠공원’에 벼·수수·깨 등을 심은 ‘도시농장’을 개장하기도 했다.
도시농업을 하는 시티파머가 되는 길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텃밭에서 행복을 찾았다는 시티파머들은 “땅을 구하느라 멀리 갈 것 없이 도시 안 모든 공간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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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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