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국무총리 후보자는 자신의 평론집 (2007) 서문에서 “돌이켜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경제에 대한 나의 전반적인 생각에는 별 변함이 없다. 내가 나름대로 생각과 말과 행동에 일관성을 지켜온 때문인 것 같아 다행스럽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진보·개혁 성향의 경제학자 진영에서는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국무총리직 제의 ‘수락’을 둘러싸고 ‘위험한 도박’이니 ‘위험한 선택’이니하는 온갖 분석과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당혹스럽다” “뭔가 생각이 있으셨겠지…” “나도 의문이다” “배신감을 느낀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을 정면 비판해왔던, 국내 케인스주의 경제학의 거목 정운찬은 왜 호랑이 굴 속에 들어간 걸까? 진보 쪽 경제학자들과 보수 쪽 경제학자들, 그리고 정 후보자 본인이 쓴 글 등을 통해 경제학자 정운찬의 선택을 들여다보자.
지난 20여 년 동안 우리나라 대학교의 거시경제학 교과서로 널리 읽히고 있는 (정운찬 지음) 서문에서 정 후보자는 스스로를 ‘케인시언’(케인스주의 경제학자)이라 표현하고 있다. 케인스주의는 신고전파경제학에서 주창하는 ‘자유로운 시장의 작동에 의한 효율적 시장경제’를 비판하고,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특히 재정지출 확대)과 규제를 중시하는 학파다. 특히 단기적인 경기변동 때 경제를 시장원리에 맡겨놓지 말고 정부가 확장적 재정지출을 앞세운 정책 개입을 통해 고용과 물가관리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이명박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시장원리에 의한 경제운용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경제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경제는 어느 분야 못지않게 이데올로기 차이가 정책 방향을 뚜렷이 가른다. 따라서 현 정부의 경제운용 방식과 정 후보자의 경제철학은 때때로 불화를 빚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나 정 후보 쪽은 교과서에 등장하는 경제학파 규정을 넘어, 당면한 ‘현실경제’를 보는 시각에서는 현 정부와 충돌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정 후보자의 정치적 자문역으로 알려진 김종인 전 민주당 의원은 “정 후보자의 정책적 노선은 기본적으로 케인시언이다. 현 정부의 정부 지출 확대 기조와 맞아떨어진다. 지금 정부의 정책과 이질감이 적다”고 말했다. 정 후보자 본인도 9월3일 총리 지명 직후에 연 기자간담회에서 “대통령을 잘 보필해서 강한 경제의 나라, 보다 통합된 사회로 만든다는 것이 목표다. 경제학자로서 그동안 구체적인 정책에 대해 이런저런 비판을 한 건 사실이지만, 과거에도 그렇게 생각했고 최근에 (이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대통령과 나는 경제를 보는 시각이 크게 차이가 없다. 대통령도 나도 경쟁을 중시하고 촉진하되 경쟁에 뒤처진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근본적 차이를 가진 두 가지 경제적 사고를 종합하거나 조화를 꾀해 최적의 해법을 찾겠다는 것도 아니고, 애초 차이보다는 오히려 일치에 가깝다는 얘기다.
진보 성향의 경제학자 쪽에서 볼 때 이런 말은 다소 놀라울 수밖에 없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는 “경제학자로서 정 후보자는 중도개혁 노선이고 케인스주의자다. 감세와 규제완화 위주에 시장만능주의를 추구하는 이명박 정부와는 안 맞는 것인데…. 뜻밖이다. 철학적으로 안 맞는 것인데…”라고 말했다.
전경련 싱크탱크 “MB는 우리보다 정운찬과 맞는다”일각에서는 현재의 글로벌 경제위기 국면이 이명박 경제팀과 케인시언 정 후보자가 서로 만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냈고, 그래서 정 후보자가 총리직을 수락했을 것이라는 그럴듯한 해석을 제기한다. ‘재정의 적극적 역할’이 요구되는 요즘 시대가 정 후보자의 선택과 결단 과정에서 하나의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란 얘기다. 사실 전세계적 금융위기를 맞아 우리나라를 포함한 모든 국가에서 대대적인 재정지출 팽창을 통해 경기회복에 나서고 있다. 1960년대 미국의 보수주의자 닉슨 대통령조차 “이제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다”라고 선언했듯 경기회복을 위해 현 정부도 재정지출 확대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경제위기를 맞아 이명박 정부가 기존의 ‘중도·실용 노선’에다 ‘서민’까지 표방하자, ‘국가의 역할 확대를 통한 서민의 고용과 소득수준 향상’을 지향하는 케인시언 정 후보자의 철학이 시대적 상황과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게 됐다는 시각이다. 이정우 교수는 “이명박 정부가 실용·서민 정치를 한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이것이 진정한 변화인지 구호에 불과한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라며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을 수도 있고 잡혀먹힐 수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 보수 성향의 경제학자 쪽은 어떻게 생각할까? 흥미롭게도 보수적 관점을 취하는 경제연구자들은 정 후보자의 전격적인 총리 등장을 그다지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기색이다. 진보 성향 쪽 경제학자들의 반응에 비하면 대조적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의 김영용 원장은 “중도·실용을 표방한 이 대통령의 생각과 정 후보자의 생각이 오히려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중도·실용은 사실 우리 연구원이 지향하는 하이에크(자유시장과 자유경쟁을 기치로 하는 자유시장론의 대두) 쪽과는 안 맞는다”며 “정 후보자는 케인시언이지만 시장규율이나 시장경쟁을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필요한 시점에서 또 필요한 상황에서 정부가 맡아야 할 역할’을 믿는 분으로 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현 정부와 별다른 갈등은 없을 것”이란 전망을 덧붙였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실물경제실장은 “케인시언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총리라는 자리의 성격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총리는 대통령의 정책기조를 잘 실천하는 자리라는 암묵적 약속이 있고, 특히 경제뿐 아니라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자리다. 또 강력한 대통령제 아래서 총리의 역할이라는 게 애매모호하고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경제철학의 차이라는 한 측면만을 놓고 총리직 수락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는 건 협소한 시야라는 얘기다. 그는 또 “과거에 정 후보자가 여기저기서 했던 말과 글보다는 앞으로 청문회 검증 과정에서 하는 발언을 기초로 그의 이번 선택을 판단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사실 경제학자로서 정 후보자의 최근 궤적을 보면, 외환위기 이후 강단과 이념을 넘어 현실 참여에 관심을 많이 보여왔다. 정 후보자는 이번 총리 수락 소감에서 “국내외적으로 우리나라의 상황이 책상머리에서 고뇌를 거듭하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고 잘라말했다.
좀더 최근에는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현실경제 연구 쪽으로 사고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최근 발족한, ‘정운찬 사단’의 제자들이 주축인 한국금융연구센터는 그 일단을 보여준다. 전성인 한국금융연구센터 소장(홍익대 교수)은 지난 5월 과의 인터뷰에서 “정운찬 선생께서 ‘끼리끼리 하지 말고, 아웃브리딩(outbreeding·이종교배)하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정 후보자는 자신의 입장을 ‘개혁적 케인스주의’라고 밝힌 바 있다. “나는 시장기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외적 기준이 중요시되고 그에 따른 부작용이 만연한 경제에서, 정부의 시장개입이 경기부양으로 나타날 경우 시장 왜곡을 영속화시키고 시장제도의 발달을 저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나의 입장을 기존의 거시경제적 개입 정책과 구분하기 위해 ‘개혁적 케인스주의’라고 밝히고, 이것으로 신자유주의를 대체하는 이데올로기로 삼자고 제안한다.”(, 서울대경제연구소, 1998) 거시경제적인 고용과 물가관리(나아가 복지국가)를 목표로 하는 고전적 케인스주의와 자신의 개혁적 케인스주의는 다소 구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개혁적 케인스주의 시각에서 ‘한국경제를 보는 관점과 정책적 대안’은 어떻게 집약될까? “더욱 철저한 구조조정을 통해 적자생존의 원칙이 지켜지는 시장의 틀과 게임의 룰을 갖춰야 한다. 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해 해야 할 일은, (확장적 재정지출을 통한) 당장의 경기회복 집착보다는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이다.”() 아직 시장 인프라조차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경제에서 정부의 우선적인 역할은 미시적·구조적 개입을 통해 시장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란 얘기다. 물론 정 후보자는 “시장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고, 자주 잘 작동하지 않는 기구”라는 케인스적 믿음을 갖고 있다.
“위기 땐 경기부양보다 구조조정 우선”어쩌면 경제를 보는 눈에서 근본 대립이 있든 없든, 이 대목은 이번 ‘정운찬 카드’에서 중요한 변수가 아닐 수도 있다. 즉, 이 대통령이나 정 후보자 둘 다 어떤 정치적 이해타산을 깔고 동거를 시작했을 가능성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전략적 게임에 비유하면, 서로가 자신에게 유리한 최선의 전략을 선택했는데, 이것이 일종의 ‘게임균형’을 이룬 셈이다. 서로가 다른 계산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쪽 상대방이 잘 알고 있을 때조차도 두 사람 모두에게 최적인 어떤 카드가 존재한 것이다. 게임의 서막은 이렇듯 좋게 출발했으나, 과연 끝도 좋을 것인가?
정 후보자는 어디선가 “경제정책은 언제나 선택일 수밖에 없으며, 선택에는 언제나 비용이 뒤따른다”는 경제학의 제1원리를 새삼 강조한 바 있다. 총리직 수락이라는 ‘정치적 결단’을 하는 과정에서도 경제학자 정운찬은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뒤따른다”는 평범한 진리를 깊이 고민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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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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