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생식기’로 할일을 나누지 말라

등록 2001-05-22 15:00 수정 2020-05-02 19:21

남녀의 직업과 가정에서의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사람들

[%%IMAGE1%%]

결혼을 앞둔 공주와 왕자가 어스름 달밤에 데이트를 즐긴다. 그런데 뽀뽀를 하자마자, 왕자가 개구리로 바뀌어버린다. 조금 전까지 사랑을 속삭이던 두 사람은 신경질과 조급함으로 똘똘 뭉친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어 자꾸 뽀뽀를 할수록 둘은 번갈아가며 코끼리, 벼룩, 기린, 개, 고래, 돼지 등 동물 모습으로 바뀐다. 마지막으로 왕자는 공주가 되고 공주는 왕자가 되고 만다.

영화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마지막 장면은 관객에게 신선한 웃음을 안긴다. 둘은 또다시 뽀뽀를 했다가 무엇으로 바뀔지 두려워 그냥 그대로 살기로 하고 성으로 돌아간다. 둘 사이에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면서.

남성 중심의 이성애자 문화

과연 남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면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까? 동화 속 왕자와 공주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겠지만 우리는 어쩌면 집단 아노미 상태에 빠질지 모른다. 아주 오랫동안 생식기라는 신체적 특징을 근거로 사회적 역할을 고정해왔기 때문이다. 서강대 정유성 교수(교육학)는 최근 펴낸 <따로와 끼리-남성 지배문화 벗기기>(책세상 펴냄)에서 이런 역할 고정을 “남성 중심의 이성애자 문화”로 규정했다. 공격적인 남성 이성애자 문화가 성문화는 물론 사회의 모든 영역을 리드하는 것은 “여성들과의 관계, 남성들끼리의 관계, 심지어 스스로와의 관계마저 망가뜨리는 결과를 낳게 됐다”고 풀이한다.

생물학적 성(sex)에서 사회문화적 성(gender)으로 성을 구분하는 척도가 바뀌었지만, 일터와 가정에서의 역할은 여전히 생물학적 성을 기준으로 구별되고 차별된다. 여성 취업률이 증가했다는 팡파르 속에 70%에 가까운 여성노동자가 비정규직으로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여성의 연령대별 경제활동 참가율을 보여주는 엠곡선(M커브)이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유독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파르게 나타나는 것은 20대 후반∼30대 중반 여성이 육아와 가사에 발목잡혀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피할 수 없는 증거다. 돈 잘 벌고 능력있어야 한다는 남성다움의 신화는 ‘고개숙인 남자 신드롬’을 낳기도 했다. 사회적 관용의 잣대로 꼽히는 성적 소수자에 대한 심리적·제도적 차별도 여전하다.

이런 상황에서 아예 젠더의 경계를 깨자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남녀 직업에 대한 편견, 가정에서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이들도 자꾸 생겨나고 있다.

패션모델 이대학(21)씨도 그중 한명이다. 그는 몸과 마음이 모두 남자이다. 깊게 사귀는 여자친구도 있다. 하지만 여자옷을 입고 당당하게 무대에 선다. 이유는 간단하다. 신체조건과 감성이 여자옷을 잘 소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 밖, 직업세계에서의 역할변화 속도에 비해 집안, 가사노동에서의 역할변화는 더디고 느리다. 우리 사회에서 남자가 ‘전업주부’로 지내려면 가사노동과 육아의 무게 이상으로 연민과 냉소가 뒤섞인 시선을 견뎌야 한다.

경기도 과천에 사는 오성근(36)씨는 꼬박 2년째 전업주부로 일하고 있다. 공무원인 아내가 출근한 뒤로 아이 기르고 집안일 하는 건 전부 그의 몫이다. 한의원에서 홍보일을 맡아 일하던 그가 전업주부가 된 까닭은 “아내의 일을 밀어주고 싶었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아내보다 애 키우고 집안일 하는 데 훨씬 적격이기 때문”이다. 오씨는 지역육아모임과 동화읽기모임까지 꾸린 바람에 매일 시간을 쪼개며 지내고 있다.

전업주부 남편의 ‘침대 안’ 고민

[%%IMAGE2%%]

발상을 조금만 바꾸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자신과 가족, 이웃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오씨는 생활로 보여주는 셈이다. 주변의 지지와 이해가 없다면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개척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오씨 역시 석달 전 다른 단지로 집을 옮긴 뒤 불편한 시선을 느끼며 놀이터에서 ‘왕따’를 당해야 했다.

오씨는 언론에서 주목하듯 전업주부 남성이 모두 행복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 역시 퇴근 뒤 아이를 봐주지 않는 아내에게 섭섭하기도 하고, 가끔 주부우울증에도 시달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택에는 후회가 없다.

오씨의 지적대로 모든 전업주부 남편이 행복의 노래를 부르는 것만은 아니다. 실직한 뒤 3년째 전업주부로 생활하는 윤아무개(35)씨는 비교적 생활에 만족을 느끼고 지낸다. 결혼 전부터 틈틈이 여성학을 공부할 정도로 페미니즘적 시각을 가진 그이기에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큰 갈등은 없었다. 연봉 4천만원이 넘는 전문직 종사자인 아내의 벌이로 남부럽지 않은 생활도 가능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갈등이 생겼다. 장소는 ‘침대 안’이다.

최근 8개월간 그는 아내와 단 한 차례도 성관계를 맺지 못했다고 털어놓는다. “언제부터인가 발기가 잘 안 되는 거예요. 성생활에는 말과 시선, 애무 등이 훨씬 중요하다는 걸 압니다. 생각은 그렇지만 마음은 괜히 조급해져요. 아내는 애 키우고 집안일 하는 게 고되어서 그렇다고 위로해주지만…. 제 무의식에는 남성의 역할에 대한 강박관념이 똬리를 틀고 있나 봅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인 마음과마음 정혜신 원장은 윤씨의 경우를 두고 “사회적 역할과 생물적 역할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권한다. 남성이 여성보다 거칠고 성격상 무언가를 리드한다는 것은 사회적 역할을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이다. 이런 사회적 역할과 성적 역할을 등치하다보면 사회적 역할이 바뀌었을 때 상당수의 사람들은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 정 원장은 “사회적 상황이 바뀐 것이지 생물적 상황이 바뀐 게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만 발전적인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5월19일 직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자는 기치를 내걸고 열린 제3회 안티미스코리아 대회 당일. 무대에 우르르 올라가 신나게 공을 다뤄 갈채를 받은 ‘떠꺼머리 소년’들은 신창중학교 여자축구단의 ‘소녀’들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라면 자신있었다는 배상신(14)양은 “앞으로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다부지게 말한다. 그러나 서울시내 중학교 중 여자축구단이 있는 학교는 단 세 군데. 배양은 기량을 펼치고 싶지만 그럴 기회가 많지 않아 속상하다고 한다.

금녀의 벽을 깨야 사회분위기가 바뀐다

이날 행사에서 가장 처음 등장해 동료 5명과 함께 박진감 있는 무술쇼를 펼쳤던 경찰특공대 김혜선(28) 경사는 “사회분위기가 바뀌어서 여성의 직업적 진출이 활발해진 게 아니다. 여성들이 금녀의 영역에 속한 직업세계에 자꾸 도전해야만 사회분위기가 바뀌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지난해 최초로 선발한 경찰특공대 정예여성요원 10명 중 한명으로 테러진압이 주임무다.

획일적으로 구분됐던 남성의 일에 도전하는 여성, 여성의 일에 도전하는 남성들이 느는 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현상이다. 이들의 실험이, 별난 인생체험에 그치지 않고 모든 성적 지향을 가진 이들이 평등하게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세상의 밑거름이 될 수 있을까.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