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하마을은 이미 ‘성지’가 되고 있었다. 새벽에 문상 오는 이들도 여전하다. 빈소는 24시간 등을 끌 수 없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대마루판은 7월10일이다. 시민 처지에선 국민장의 마지막 절차인 안장일이고, 노무현 전 대통령 유가족 처지에선 내세가 결정된다는 49재다. 그를 애도하고 그가 없는 제 세상을 위로하려, 일찌감치 봉하로 발걸음 놓은 이들이 있다.
지난 6월14일, 서른 살 덩치 큰 한 사내는 서울 덕수궁 대한문에 서 있다. “막상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나고 나서야 그의 인간적 면모, 권위를 버리는 순수함이 보였다”고 말하는 조재영(서울 고덕동)씨. 하지만 5월은 고됐다. 아침 7시30분 시작한 주류 배달이 밤 9~10시가 되어야 끝났다. 직장을 그만둔 6월은 멍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투표만 했을 뿐, 지지는커녕 관심도 갖지 못한” 자신이 미울 따름이었다. 결국엔 짐을 싼다. ‘봉하까지 걸어가자.’ 노무현 전 대통령 영정 앞에 꽃 하나 놓는다. 그리고 배낭을 다시 멘다. 그리움도 회한도 함께 포개넣었으니 조씨의 발걸음, 무겁고 묵직하다.
“덕수궁 시민 상주가 웬 배낭이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봉하마을까지 걸어가려는 참이라고 했죠. 그랬더니 이미 거기로 걸어가고 있는 다른 일행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날 해가 저물 때까지 30여km를 걸었고, 6월16일 해가 저물 땐 경기 평택에 있었다. “살아생전 한 번도 그분을 뵈지 못한 게 아쉬웠다”는 조씨의 ‘나 홀로 순례’를 누가 알아볼 리 없다. 제 마음속 노 전 대통령만이 하루하루 더 가까이서 손짓한다.
앞서 사흘 전 한 부부는 임진각에 서 있다. 6월 초, 아내 신은주(38·경기 고양시)씨가 말했다. “그렇게 떠나보낸 게 너무 죄송스러워요. 그리고 대통령님이 계속 눈물만 흘리길 원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봉하까지 걷자 제안했다. 남편은 “삼보일배가 아니라 다행”이라며 그냥 웃는다. 그리고 포털에 카페를 만든다. ‘시민참여로 일구는 노무현의 꿈’(참꿈·cafe.daum.net/charmggum)이다.
글을 올린다. “노무현 대통령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많은 과제들 중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찾아 실천하자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카페입니다. 그간 무관심했던 여러 선거에 좀더 관심을 가지고 적극 참여하는 것부터 자신이 속한 곳에서 자신의 주권을 찾는 작은 운동들이 모두 우리가 해야 할 작은 실천입니다.”
부부의 ‘실천’은 고해와 고행부터다. ‘참꿈따라 걷기 순례’라 이른다. “(그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멀리 보내야 하는 죄스러움”을 봉하까지 1천km 고행길로 조금이나마 갚으려는 것이다.
같은 혐의의 죄인들 모여든다. 7월1일 현재 카페 회원은 310명이 넘는다. 각 지역을 지날 때마다 현지인들이 구간별 ‘참꿈 순례’에 동참한다. 누구는 이름이 없고, 누구는 정체가 없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 회원도 있고,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지하는 ‘시민광장’ 회원도 있다. 제 이름 석 자만 가진 이도 있다.
6월17일 조재영씨와 신씨 부부가 충남 천안에서 만난다. 더 많은 사람들이 21일 장대비 퍼붓는 전북 전주에서 만나고, 25일 불볕더위 광주에서, 또 29일 경북 구미에서 만난다.
그리고 기자는 7월1일 아침 6시 대구에서 그들을 만난다. ‘보수의 장막’ 속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새겨진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대구 복판,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서 “노무현 대통령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꿈 우리가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걸어서… 봉하마을까지”가 박힌 노란 깃발을 들고 있었다. 열아흐레째, 면도도 하지 않은 얼굴들로 웃고 있었다. 농사일 잠시 접고 참 먹는 이들처럼 김밥을 먹고 있었다. 걷기 위해 쉬고, 걷기 위해 먹는 그들 사이에 끼어, 기자도 꼽사리로 주워먹는다.
“오늘은 어디까지 가십니까?” 종착지는 경북 영천시청이다. 얼추 37km가 된다. 성인의 보행이 시속 4km가량이니, 9시간은 족히 걸어야 닿을 거리다. 이들은 식사·휴식 시간 따위를 더해 넉넉히 13시간을 목표치로 잡아뒀다. 가자, 말자 말도 없이 스르르 길 위로 나서고, 스르르 걷는다.
아직 잠이 덜 깬 세상, 도심을 가로지르는 이들의 ‘노란색’만 올돌하다. 볕 들지 않은 이른 아침, 발걸음을 보챈다. 평지가 많은데도, 30분이 지나자 첫 땀이 밴다. 발바닥은 말없이 쉬지 않고 길바닥과 마주친다. 길고 긴 합장, 세상에서 가장 낮은 기도처럼 보인다. 또 ‘실천’하지 않음으로 더 큰 죄를 짓지 않게 해달라는 희구가 된다. 그렇게 봉하까지 1천km를 걷자니 손도 발이었으면 좋겠다. 대구에도 바람은 불었다.
자신이 “내지르고 보는 스타일”이라고 말하는 조재영씨는 서른 살 구직자다. “뭔가를 해야겠는데 가닥이 잡히지 않고, 또 걷기 시작한 이들은 뭘 고민할지 궁금해” 직접 순례단을 찾아가 따져물은 전북 군산 사람 유택규씨는 쉰셋, 기업체 대표다. 중소 건설사를 운영하는데, 월말 바쁜 회사를 내맡기고 왔다. 둘의 이야기 모두 ‘실천’으로 수렴된다.
볕은 그늘에 숨은 이 아니거든 남녀노소도, 지역도 가리지 않는다. 유씨는 전북 지역에서 걷기 순례에 처음 동참한 날, 한나절 만에 팔뚝에 화상을 입었다. 조재영씨는 이빨만 빼고 모두 그을렸다.
다방 커피 시켜주고 유황오리 알 건네고…바짝 마른 햇볕이 점점 강해진다. 이들은 입을 맞추듯 비 오는 날이 차라리 낫다고 한다. 1시간 정도를 걷자 동구시장에 닿는다. 대구는 아직도 이들과 길게 눈을 맞추진 않는다. 대구 토박이 안성영(56)씨는 시내 구간만 동참하려고 왔다. 시민광장 회원이다. 그는 “최근의 일들로 해서, 곧바로 변화의 결과들이 가시화될 거라고 보진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말했다. 진보나 보수의 구분보다, 룰을 지키지 않는 몰상식과 부정에 대한 대결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뛰는 것이 ‘이념’이고 ‘목표’라면, 걷는 것은 ‘신념’이고 ‘생활’이다. 누구도 단기전이라면 걷지 않는다.
순례단은 서너 차례 곤욕을 치렀다. 충남 조치원에선 “얼마나 더 우려먹어야겠냐”는 항의를 받았고, 계룡에선 “시간이 넘쳐서 그리 지랄이냐” 멸시를 받았다. 천안에선 노란색 플래카드를 붙인 순례단 지원 차량의 보닛을 누군가 긁었다. ‘X.’ 미디어법 반대 전단지를 돌리다 천안터미널에서 사람들에게 내몰려 쫓겨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이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무관심보단 낫고, 더욱이 지지를 받은 건 셀 수도 없기 때문이다. 6월27일, 경남 함양에서 만난 한 화물차 운전자는 신씨 부부와 조재영씨에게 다방 냉커피를 주문해줬다. 걸어서 봉하까지 간다는 깃발 하나 보고서다. 다방 여종업원이 들고 온 냉커피 안에선 굵은 웃음 알갱이가 쨍그랑댔다. 탈진으로 링거를 맞고, 발목 부상으로 침을 맞은 기억도 모두 사라진다. 유황오리 알을 가져다준 이, 저 멀리 차를 돌려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주고 가는 이들 웃음도 다음 도시로 옮기는 내내 발에 밟힌다. 그렇게 하루 30~40km가 등 뒤에 놓인다.
오전 9시가 되자 햇볕이 작열한다. 그늘이 많지 않다. 하필 단화를 신었다. 왼쪽 뒤꿈치에 물집이 잡혀 있다. 하지만 내색이 안 된다. 전북 정읍에서 온 김용운(42)씨는 오른쪽 다리를 전다. 고관절염으로 인한 장애다. “(정치적 지역주의가 강한) 영남을 많이 원망했었다”는 그는 대구 복판에서 일행과 보폭을 맞추려 서너 배 힘을 쏟는다.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이곳 정서를 꼭 보고 싶었”기에 오전, 오후 두 차례 진통제를 먹는다.
걷고 걸어 제 고통을 키우면, 쌓아둔 원망마저 무겁다. 내려놓고 버리며 희망만 줍게 된다. 이들은 7월9일 경남 밀양을 거쳐 봉하를 지척에 둔 진영읍에 도착할 예정이다. 이윽고 김해 거성아파트 6가구 창밖에 내걸린 노란 바람개비를 볼지 모르겠다. 공설운동장 교차로를 몇백m 앞둔, 아마도 봉하로 가는 외지인들이 처음 마주칠 노무현 전 대통령 애도 정표다.
순례단의 몸짓도 저 멀리 바람에 실려, 바람개비를 돌렸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봉하를 다녀가며, 또 함께 바람개비를 돌렸을 것이다. 지난 6월28일 봉화산 정토원에선 방문객에게 나눠준 생수병만 1만 병이다. 이전 주말은 6천~7천 병이 나갔다. 사람이 줄기는커녕 늘고 있다.
기자가 봉하마을을 찾은 6월30일 오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에선 줄지어 10명씩 문상을 하고 있었다. 서울엔 없던 비가 거칠게 쏟아지는 날이었다. 문상객 모두 생가와 사저를 먼발치서 둘러보고, 예외 없이 그가 마지막으로 걸어올랐던 봉화산을 한발 한발 따라 오른다. 기말고사가 끝난 뒤 동료 교사들과 함께 하루치 문화기행으로 봉하를 찾은 전주공고 남상팔 교사도, 일이 바빠 회한을 체증처럼 묵혔다 이제야 봉하에 들른 대구의 윤기환(50)씨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순례’하고 있었다. 하물며 관광버스를 타고 무리지어 온 할머니도 봉화산을 내려오며 바위틈으로 굽이치는 빗물을 보고 “이게 그 냥반 눈물인가벼” 말한다.
빈소에서 틈틈이 자원봉사를 해온 배정환 김해시의회 의원은 “아직도 울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며 “오랫동안 이곳이 성지가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선진규 정토원장은 이날 정토원 주변의 노무현 전 대통령 애도 플래카드를 모두 거둬들였다. “더 정중하고 경건하게 49재를 치르기 위해서”다. 그는 “종교를 떠나 누구든 쉽게 방문할 수 있는 추모각을 정토원 주변에 세울 예정”이라고 밝혔다.
‘대통령 노무현’ 새긴 너럭바위 서는 날비는 사흘째 오다 말다를 거듭하고 있었다. 안장터 공사를 하던 중장비 두 대 잠시 멈춰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유언대로 ‘아주 작은 비석’이 놓일 곳은, 9월에 복원·공개될 생가에서 10여m 떨어진 곳이다. 참 멀리 돌아왔다. 7월10일 오전 9시 정토원에서 49재가 열린 뒤 낮 12시께 비석 아래 묻히면 2시가 되지 않아 국민장도 갈무리된다.
각진 비석 대신 그의 얼굴 닮은 너럭바위 하나 선다. 바위엔 ‘대통령 노무현’ 여섯 글자 오목새김된다. 그리고 비석 받침대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노 전 대통령의 어록이 새겨진다. 시민들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에게로 걸어갈 것 같다.
대구·김해=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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