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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정치사전 봐도 ‘보복 같네’

2001년 법안에서 “정파 다르다는 이유로 수사 등으로 불이익 주는 행위는 정치보복”
등록 2009-06-26 08:27 수정 2020-05-02 19:25

“지난번 노무현 전 대통령 조문방송 때는 국가원수를 욕설하는 내용까지 생방송으로 나왔다. 언론 탄압하는 나라에서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 6월19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만난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한국방송의 ‘방송사고’를 지칭한 말이었다. 5월29일 노 전 대통령의 주검을 담은 관이 화장장으로 들어가기 직전 한국방송 카메라 옆에 있던 한 조문객이 이렇게 외쳤다. “이명박 △△△, 복수할 거야!”

지난 2001년 1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가 “나의 사전에 정치보복은 없다”며 정치보복금지법을 제정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지난 2001년 1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가 “나의 사전에 정치보복은 없다”며 정치보복금지법을 제정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복수. 보복. 한국의 정치사를 회색으로 물들여온 단어다. 민주당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정치보복 금지를 법제화하겠다고 밝혔다.

정치보복 금지를 제도화하자는 제안이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15대 대선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건곤일척을 앞두고 있던 1997년 8월, 15대 국회에서는 정치보복 금지 법안이 발의됐다. 발의자는 이건개 당시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의원. 대검찰청 공안부장과 서울지검장, 서울고검장을 거친 그였기에, 그가 내놓은 정치보복금지법은 더 주목을 끌었다. 이 법안에서는 “정치적 이념, 소속 정당 및 단체 등의 차이나 특정 정당이나 단체에 대한 지지·반대 등을 이유로 부당하게 불이익을 주는 행위”를 정치보복이라고 정의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최근 이명박 정부 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주변의 친노 인사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정치보복이 분명해 보인다.

김대중·이회창 후보도 보복 금지 제안

이 법안에서는 정치보복을 이렇게 나누어 제시했다. △공판 청구 전에 피의 사실을 공표하면서 정보·내사·수사 단계에서 대통령, 국무총리 그리고 대통령 비서실 또는 국무총리 비서실에서 압력을 행하는 수사 △부정부패 전반에 대한 정보 파악과 부패 구조 전반에 대한 충분한 심사 분석 뒤 제도 개선 등의 조치 없이 정권 교체 후 1년 이내에 정치인, 정권 교체 이전의 차관급 이상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수사공권력 동원.

첫 번째 정의에 따르면,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주변에 대해 광범위하고도 집요하게 이뤄졌던 피의 사실 공표는 정치보복이다. 두 번째 정의를 통해 보면, 박연차 전 회장 본인과 그가 소유한 태광실업에 대해 이뤄진 세무조사를 기점으로 한 국세청과 검찰의 조사와 수사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건개 전 의원이 제안한 정치보복금지법은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사정과 정치보복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폐기된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 후보는 이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1997년 12월 ‘정치보복 방지와 차별대우 금지 등에 관한 법률’을 제안했다. 핵심은 ‘정치보복을 목적으로 개인이나 정당, 단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거나 재산권을 박탈하는 소급입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제안은 법안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정치보복금지법 제안은 2001년 다시 부활한다. 제안자는 대권 도전 2차전을 준비하고 있던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였다. 그는 2001년 1월30일 “나의 사전에는 정치보복은 없다. 정치보복금지법을 만들어 이 나라에서 연속되는 정치보복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한나라당이 마련한 초안에서는 ‘소속을 달리하는 정파라는 이유로 수사, 세무조사, 계좌추적 등 정치적 목적의 불이익을 주는 행위’를 정치보복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정치보복에 대한 명확한 법적 정의를 확정하지 못해 당내 논란만 거듭하다 2002년 법안 제정을 포기했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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