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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쇄 풀린 삼성, 이재용 체제 페달 밟나

에버랜드 무죄판결에 안도… 여론 촉각 속 지배구조 등 길닦기 작업
등록 2009-06-04 16:18 수정 2020-05-03 04:25
2008년 6월3일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가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18회 호암상 시상식에 부친인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을 대신해 참석했다. 사진 한겨레 강창광 기자

2008년 6월3일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가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18회 호암상 시상식에 부친인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을 대신해 참석했다. 사진 한겨레 강창광 기자

5월29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이날 공교롭게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사건’ 대법원 선고공판이 열렸다. 애도 분위기에 삼성 선고 사안은 묻혀버렸다. 하지만 눈 밝은 사람에겐 삼성과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의 차이는 너무나 커 보였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 측근이 연루된 수사를 하면서 검찰에 유리한 진술을 하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 거의 의존했다. 하지만 삼성특검은 내부 고발자였던 김용철 변호사의 진술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삼성그룹은 1996년 사건 발생 뒤 10여 년 발목을 잡고 있는 ‘원죄’에서 일단 해방된 듯하다. 삼성은 “아직 재판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며 조심하면서도, 내심 이재용 전무로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법적 장애물이 제거됐다는 기대감을 보였다. 삼성은 상징적으로 법적 논란에선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도덕적·사회적 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대법원 선고 뒤, 앞으로의 관심은 삼성의 행보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복귀할지, 또는 ‘이재용 체제’가 어떤 식으로 정비될지, 삼성의 지배구조는 어떤 식으로 변화될지에 관해서다.

이건희 전 회장 복귀 필요성 못 느껴

일단 이건희 전 회장의 복귀 여부가 주목된다. 정치권이 부채질하고 있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와 김문수 경기지사가 이 전 회장의 경영 복귀를 주문하기도 했다. 박 대표는 지난 2월25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건희 전 회장이 직접 나서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하면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줄 수 있을 것”이라며 경영 복귀를 희망했다. 앞서 김문수 경기지사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이건희 회장은 세계가 알아주는 경제인이고 우리나라 대표선수”라며 “지금같이 경제가 어려울 때 대표선수가 뛰어주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 안팎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이 전 회장이 경영에 참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이 전 회장이 물러나고 13개월이 지난 현재 삼성의 ‘컨트롤타워 부재’ 때문이다. 삼성은 ‘사장단협의회’를 통한 집단경영 체제라는 사상 초유의 실험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구심점이 없는 과도기 체제다.

이런 ‘희망사항’에 대해 삼성 내부에서조차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본다. 이미 이건희 전 회장이 지난해 4월 “지난날의 허물을 모두 안고 떠나겠다”고 밝힌데다 복귀 명분 역시 뚜렷하지 않다. 일부에선 이 전 회장이 지금도 ‘보이지 않은 손’으로 삼성을 장악하고 있는데 굳이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다고 지적한다. 복귀한다고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게 없는 만큼 전면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삼성의 앞날과 관련해 가장 관심이 쏠리는 인물은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다. 이번 선고 결과에 따라 이 전무의 경영권 승계가 예상보다 빨라질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에버랜드CB 헐값 발행 사건도 따지고 보면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불거졌기 때문이다.

올해 41살인 이 전무는 지난해 삼성이 경영쇄신책을 내놓을 때 최고고객책임자(CCO) 보직을 내놓고 신흥시장을 비롯한 해외 사업장을 돌고 있다. 하지만 경영권 승계가 곧바로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일단 지배구조를 정리해야 하고 삼성의 최고경영자(CEO)로서 능력을 입증받아야 한다. 최소 2~3년은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 관계자는 “이 전무는 당분간 글로벌 비즈니스 현장에서 삼성전자 사업을 챙기고 관장하는 일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전무의 해외 근무 기간에 경영권 이양을 위한 지배구조의 정리도 필요하다. 따라서 이 전무의 국내 복귀 시점은 삼성의 지배구조 변화 시점과 맞물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삼성은 에버랜드를 정점으로 ‘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주요 계열사 간 순환출자 방식의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도표 참조). 이같은 복잡한 지배구조를 단기간에 바꾸기는 힘들다. 삼성은 지난해 4월 경영쇄신안 발표 당시 “지주회사로 전환하려면 약 20조원이 필요한데 당장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만큼 시간을 갖고 검토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삼성그룹 지배구조

삼성그룹 지배구조

최지성 사장 등 이재용 측근 중용

또 다른 논란은 글로벌 기업 삼성을 경영 능력에 대한 검증 없이 오너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재용 전무에게 맡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전무가 이 전 회장의 후계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외국인 지분이 전체의 50%나 되는 삼성전자 CEO로 무혈입성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 여론은 여전하다. 삼성이 여론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전무가 경영권을 이어받는다고 해서 이건희 전 회장과 같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삼성은 ‘이재용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사전정지 작업을 벌이고 있다.

삼성이 올 1월 단행한 인사에서 이러한 분위기가 읽힌다. 주요 보직에 이 전무를 보좌할 인물들을 포진시켰다. 사장단급 인사에서 60대 이상 CEO들이 물러나면서 이 전 회장의 최측근 인사로 거론된 상당수 인물이 용퇴했다. 대표적인 예로 이 전 회장을 가장 근접에서 보좌한 이학수 전 부회장을 비롯해 삼성전자의 ‘스타 CEO’인 이기태 전 부회장과 ‘황의 법칙’ 황창규 사장 등이 함께 물러났다. 대신 이 전무의 경영 개인교사로 불릴 정도로 가까운 최지성 사장이 삼성전자의 DMC(완제품) 부문장으로 등극했다. 또 ‘삼성의 입’ 역할을 하는 삼성 홍보팀장 이인용 부사장도 ‘이재용 사람’으로 통한다.

이재용 전무로의 승계가 조기에 이뤄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은, 시민사회단체의 견제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 삼성그룹의 경영권 불법 승계 사건이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에서 촉발됐고 순환출자구조를 이용한 승계에 대한 여론이 여전히 곱지 않은 상태다. 당장 경제개혁연대는 “삼성그룹이라는 초법적 경제 권력의 불법을 묵인하면서 법과 원칙을 무시한 재판부의 판결에 분노와 참담함을 금치 못한다”며 대법원의 이번 무죄판결에 유감을 표명했다.

자녀 재산 분할 시기에도 관심

삼성이 이재용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여동생들과 어떤 식으로 재산을 분할할지도 관심거리다. 일단 이건희 전 회장은 재산 분할에 성급하게 나서기보다 삼성의 지배구조 안정화를 도모한 뒤 재산 분할을 추진할 공산이 크다. 이 전 회장은 삼성 지배구조의 최정점에 있는 에버랜드 지분을 이 전무에게 25% 나눠주면서 장녀와 차녀인 이부진 전무와 이서현 상무에게도 각각 8.4%를 분할했다. 최근 이 전 회장의 장녀인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가 에버랜드와의 사업 협력을 강화하기로 한 것도 집중된 지배구조의 분산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 전무가 전자계열사와 금융계열사를 물려받는 대신 장녀인 이부진 전무에게는 호텔신라와 삼성물산, 삼성석유화학 등을 주고 차녀인 이서현 상무에게는 제일모직과 제일기획을 넘겨줄 것이란 관측도 내놓고 있다. 현재 전반적인 분위기는 이 전무로의 경영권 승계 이후 딸들에게도 일정액의 재산을 분할할 것이란 시각에는 큰 이견이 없으나, 시기적으로 아직은 이르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재계 안팎에선 삼성이 우호적인 여론을 만들기 위해 단기적으로 몇 가지 방안을 내놓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미국발 금융위기와 경제 불안을 타개하기 위해 신수종사업 본격화, 계열사 경쟁력 강화 등에 초점을 맞춘 대대적인 투자계획을 발표해 경제 살리기에 적극 나설 것이란 얘기다. 이와 관련해 주목받는 곳이 충남 아산 탕정면의 삼성전자 액정표시장치(LCD) 단지다. 삼성이 이곳에 수조원대를 투입해 10세대 LCD 생산라인을 짓는다는 것이다. 삼성은 소니와 LCD 사업을 공동으로 진행해왔지만, 지난해 소니가 일본 샤프와 10세대 LCD 패널 공동생산 방안을 발표하면서 삼성과 소니의 관계는 예전만 못하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사건 일지/삼성 경영권 불법 승계 및 비자금 사건 일지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사건 일지/삼성 경영권 불법 승계 및 비자금 사건 일지

삼성 관계자는 “제조업 투자를 진행하게 되면 건설 투자로 이어져 건설사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정부 정책에 호응할 수 있다. 여기에 최근 건설업 부진으로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삼성물산 건설부문에도 일감이 생겨 그룹 차원에서도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느슨해진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해 계열사마다 전면적인 경영진단에 들어갈 것이라는 얘기도 나돈다. 삼성의 경영진단은 임직원들의 사표로 이어지기도 했다.

삼성의 최종 목적은 앞으로 수년 안에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것이다. 이재용 전무 중심의 강력한 지주사 형태로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 지주사 체제로 성공적으로 전환하면 삼성은 경영권 승계와 지배권 강화, 투명성 제고 등 여러 가지를 ‘덤’으로 얻게 된다. 하지만 현재 삼성의 순환출자 구조에선 지주사 전환이 쉽지 않다. 산업과 금융을 분리하는 금산분리 원칙 때문이다. 제조업(삼성전자)과 금융업(삼성생명·삼성카드)을 동시에 안고 가야 하는 삼성이 지주사 체제로 가려면 금산분리를 누그려뜨리거나 폐지하는 데 우선 힘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다.

한 야당 정치인은 “삼성이 앞으로 공정거래법과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을 위해 강하게 로비를 펼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 4월 임시국회에 상정됐던 이들 법률 개정안들은 통과에 실패했다. 야권이 ‘삼성법’이라고 반발한 탓이다. 이들 법안은 6월 임시국회에서 논의될 예정이다.

시민단체 “제2의 삼성공화국 안 될 말”

현재로선 삼성에 우호적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한 달째인 지난해 3월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금산분리 완화 방안’을 지시했다. 당시 금융위는 “3단계에 걸쳐 금산분리 규제를 완화하거나 폐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경제개혁연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참여연대·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등 시민사회단체는 5월29일 공동 성명을 통해 이렇게 강조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이재용씨 승계 문제와 삼성그룹의 총체적인 불법 행위 및 소유지배구조 문제의 종착역이 아니다. 삼성이 광고를 무기로 일부 비판적 신문사와 방송사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커튼 뒤에서 정부·여당에 로비해서 금산분리 규제를 무용지물로 만든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문제를 또다시 과거의 방식대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제2의 에버랜드 사건, 제2의 김용철 변호사, 제2의 삼성공화국 논란을 자초하는 길이다.”



이건희 회장 퇴진 뒤 삼성
위계적 의사결정 구조 변함없어


“저는 오늘 삼성 회장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할 일도 많아 아쉬움이 크지만, 지난날의 허물은 모두 제가 떠안고 가겠습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지난해 4월22일 이 말을 남기고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촉발된 삼성 비자금 문제에 법적·도의적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고 삼성은 설명했다. 그 뒤 1년. 삼성은 어떻게 변했을까?
당시 삼성은 이 회장 퇴진을 포함한 10개항의 경영쇄신안을 발표했다. 쇄신안에는 △이건희 회장 퇴진 △전략기획실 해체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의 최고고객책임자(CCO)직 사임 △이 회장 부인 홍라희씨의 리움 미술관장 사임 △차명재산을 실명 전환해 사회의 유익한 일에 사용 △금융사업 투명화 △지주회사 및 순환출자 해소 검토 △사외이사 선임 개선 등이 포함됐다.
삼성은 쇄신안 10개 항목 대부분을 이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차명재산은 올 2월 실명 전환을 완료했고 이건희 전 회장에 대한 대법원 판결 뒤 관련 세금, 벌금 등이 확정되면 나머지를 유익한 일에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지주회사 전환과 순환출자 해소는 당장 추진하기 어려워 장기 과제로 검토 중이라는 게 삼성 쪽 설명이다.
그동안 삼성은 ‘회장-전략기획실-계열사’로 이어지는 ‘삼각편대 경영체제’를 해체하면서 후속 조처로 사장단협의회 산하에 투자조정위원회·브랜드관리위원회·인사위원회를 만들었다. 또 자율 출퇴근제, 지원조직 현장 배치, 비즈니스 캐주얼 도입 등 파격적인 시도로 글로벌 경쟁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올 1월 사장단 인사에서도 60살 이상 사장·부회장 20여 명의 동반 퇴진이라는 파격적인 조처가 단행됐다. 하지만 사장단협의회 산하 인사위원회가 제시한 권고안을 60여 개 계열사 사장들이 한 명도 이의 없이 일사불란하게 따랐다. 또 최주현·장충기·윤순봉·정유성 등 옛 전략기획실 팀장 6명 가운데 4명이 사장 또는 부사장으로 승진하는 등 옛 전략기획실 출신 주요 임원들이 전진 배치됐다. 이같은 이유로 이건희 전 회장의 영향력이 건재한 상황에서 삼성의 변화를 얘기하기 어렵다는 비판론도 있다.
삼성 문제를 꾸준히 지적해온 시민단체들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전략기획실이 여전히 사령탑 노릇을 하고, 물러났다는 이학수 전 부회장의 영향력도 여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무역학과 교수)은 “이건희 전 회장은 과거부터 ‘커튼 뒤’에서 의사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회장직에서 물러났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룹 의사결정 구조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는 것인데, 아직 진전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삼성이 공시를 통해 밝힌 차명재산 규모가 특검 발표 내용과 다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 소장은 “삼성특검이 밝힌 이건희 전 회장의 차명주식 중 삼성생명을 제외한 상장주식들의 가격을 최근 공시 내용과 비교해보면 약 3천억∼6천억원 차이가 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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