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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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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법정 공방 끝내 면죄부

법학교수들의 형사고발로 시작…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도 삼성 방패에 막혀
등록 2009-06-04 15:44 수정 2020-05-03 04:25

시작은 ‘형법’이었다. 2000년 6월29일 오후 2시, 법학교수 43명은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회장과 삼성에버랜드 대표이사·이사·감사 전원 및 주주계열사 대표이사 전원에 대한 형사고발장을 서울지검에 냈다. 교수들이 고발한 혐의는 ‘업무상 배임죄’(형법 356조)였다. 1996년 에버랜드 전환사채(CB·일정 기간이 지난 뒤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채권)를 헐값에 발행함으로써 이들이 본인이나 제3자에게 재산상 이익을 주고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경영권 승계 ‘비상장사’가 제격인 이유

2001년 1월2일 박원순 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국세청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참여연대는 ‘불법 세습, 삼성의 과세’를 촉구하며 국세청 앞에서 ‘100인 100일 1인 시위’를 벌였다. 사진 한겨레 자료

2001년 1월2일 박원순 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국세청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참여연대는 ‘불법 세습, 삼성의 과세’를 촉구하며 국세청 앞에서 ‘100인 100일 1인 시위’를 벌였다. 사진 한겨레 자료

법학교수들이 여러 법 가운데 ‘형법’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형사고발을 주도한 곽노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삼성이 법망을 피해가는 바람에) 회사법·공정거래법·세법으로 ‘정의’를 세울 수 없었다. 그래서 형법을 들고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고발장을 접수한 지 3년을 넘긴 2003년 12월, 여론에 떠밀려 공소시효 만료를 하루 앞두고서야 기소했다. 당시 법학교수들이 고발하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배임죄의 공소시효는 형법상 7년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에버랜드의 전·현직 사장이었던 허태학·박노빈씨를 기소했지만, 헐값 발행을 공모하거나 지시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이건희 전 회장은 조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삼성특검이 삼성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을 수사할 때도 에버랜드 CB 헐값 발행은 핵심 사안이었고, 결국 이건희 전 회장도 조사 대상에 올랐다.

에버랜드 사건의 발단은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6년 10월 에버랜드는 주당 8만5천원대인 에버랜드 CB를 주당 7700원에 발행했다. 곧바로 이건희 전 회장 등 개인주주와 중앙일보, 삼성물산 등 법인주주들이 실권한 뒤 실권주 125만4천 주를 이 전 회장 아들 이재용 전무에게 배정했다. 이 전무는 에버랜드 CB를 저가에 사들인 뒤 주식으로 교환해 에버랜드의 최대 주주가 됐다. 당시 에버랜드 이사진은 자사 지분 62.5%에 해당하는 CB를 96억원에 발행했다. 경영권 프리미엄에도 미치지 못하는 96억원을 받고 이건희 전 회장의 자녀들에게 회사를 넘긴 셈이다.

삼성은 왜 비상장회사인 에버랜드를 통해 불법 승계를 추진하려 했을까? 이후 삼성의 행보를 보면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1997년 3월 삼성은 에버랜드에 이어 삼성전자의 지분도 이재용 전무에게 승계하려 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상장기업이기 때문에 CB 헐값 발행이 불가능했다. 삼성전자 경영진은 이 전무에게 거래소 시가보다 10% 할인한 가격으로 CB를 발행해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이 전무가 갖게 된 삼성전자 지분은 0.8%에 그쳤다. 여기에 들어간 자금은 무려 450억원이다. 상장기업과 비상장기업은 이처럼 천지차이다. 재벌기업이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알토란 기업을 비상장으로 남겨놓은 이유다.

어쨌든 삼성전자 지분 승계는 삼성의 의도대로 잘 진척되지 않았다. 참여연대가 삼성전자 소액주주 자격으로 이 전무의 CB에 대해 주식전환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1심 재판부가 참여연대 손을 들어준다. 그 바람에 삼성은 삼성생명에 대해서도 CB 발행 방식으로 이 전무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려던 계획을 포기해버린다.

대신 삼성은 삼성생명을 에버랜드 자회사로 편입하는 방식에서 대안을 찾았다. 1998년 삼성은 전·현직 고위임원 이름의 삼성생명 주식을 주당 9천원에 에버랜드에 넘겨버렸다(이건희 회장은 같은 삼성생명 주식을 6개월 뒤 사재출연하면서 주당 70만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에버랜드는 삼성생명의 대주주가 된다. 이 전무는 에버랜드를 통해 삼성생명을 지배하게 됐고 두 회사가 가진 계열사 주식으로 나머지 계열사의 지배권도 덤으로 얻게 됐다.

에버랜드 CB 헐값 발행 사건을 맡은 1·2심 재판부는 허태학·박노빈씨에게 형법의 업무상 배임죄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의 배임 혐의를 적용해 유죄를 선고했다. 이후 검찰과 변호인 모두 상고했다.

삼성에버랜드와 삼성SDS 사건 쟁점 및 대법원 판단

삼성에버랜드와 삼성SDS 사건 쟁점 및 대법원 판단

또 다른 시작은 ‘양심선언’이었다. 2007년 10월29일 삼성 법무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해 삼성그룹 차명계좌에 들어있는 ‘50억원 비자금’ 의혹을 제기했다. 그 뒤 김 변호사는 이건희 전 회장 일가의 불법 경영권 승계와 비자금 조성, 정·관계 로비 의혹 등을 폭로했다.

특검팀이 꾸려지고 이건희 전 회장도 허태학·박노빈씨 등 에버랜드 경영진의 공범으로 기소됐다. 2008년 이 전 회장은 1심과 2심에서 조세포탈 혐의로 일부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경영권 불법 승계의 핵심 쟁점인 에버랜드 CB 헐값 발행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전 회장 사건을 맡은 1심 재판부는 주주들이 스스로 결정해 CB 인수를 실권했기 때문에 배임죄를 물을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항소심은 더 나아가 주주 배정 방식이든 제3자 배정 방식이든 헐값 발행으로 회사의 손해가 발생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냈다. 아무리 헐값이라도 값을 받기는 받았다는 얘기다.

같은 사안에서 허태학·박노빈씨와 이건희 전 회장에 대해 법원이 서로 다른 결론을 낸 셈이다. 지난 5월29일 대법원이 이에 대해 최종 판단을 내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허태학·박노빈씨는 무죄라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삼성특검이 같은 혐의로 기소한 이건희 전 회장도 이 점에선 무죄가 확정됐다. 대법원은 “에버랜드 CB 발행이 (제3자 배정이 아닌) 주주 배정이 분명하고, 기존 주주 스스로 실권했다고 봐야 한다. 이에 따라 피고인들이 회사의 재산을 보호할 의무를 위배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삼성SDS BW는 시가 산정 결과에 달려

또 다른 쟁점 사안이었던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미리 정해진 가격으로 새로운 주식을 살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채권) 헐값 발행 사안은 1·2심과는 다른 결론이 났다.

이재용 전무는 1999년 2월 삼성SDS 주식을 단돈 7150원에 인수할 수 있는 BW 322만 주를 인수했다. 이 전무가 당시 인수한 삼성SDS 주식은 장외시장에서 5만8500원에 거래됐다. 다른 사람은 시장에서 5만8500원에 사는 주식을 이 전무는 특수관계자 지위를 이용해 부당하게 낮게 구입한 셈이다.

참여연대는 그해 11월 김홍기 전 삼성SDS 사장 등을 고발했다. 하지만 기소는 삼성특검에 와서야 비로소 이뤄졌고, 지난해 7월 1심 재판부는 “불법적 제3자 배정이지만 이득액이 50억원 미만이어서 공소시효(7년)가 지났다”며 면소 판결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에버랜드 사건과 마찬가지로 “주주 배정이든 제3자 배정이든 회사에 손해가 없으므로 죄가 안 된다”는 논리를 펴 적정가를 따져보지도 않고 무죄 판결했다.

하지만 5월29일 대법원2부(주심 김지형 대법관)는 이 사건과 관련해 이 전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재판부는 삼성SDS의 BW를 시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제3자에게 배정했다면 회사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보고 손해액을 다시 산정하라고 판시했다. 주주 배정과는 사정이 다르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손해액을 다시 산정해 손해액이 50억원을 넘을 때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의 배임 혐의가 적용되고, 공소시효가 남아있게 돼 유죄가 확정된다. 하지만 손해액이 1심 판결처럼 50억원 미만으로 나올 경우엔 역시 공소시효가 지나 면소 판결이 난다. BW의 시가 산정 결과가 어떻게 달라지느냐에 따라 이건희 전 회장의 처벌 여부가 갈리는 것이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대법원 판결의 논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주식의 저가 발행은 주주들 사이의 민사사건일 뿐이니, 배임죄 혐의로 형사법원에 들고 오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에버랜드의 법인주주였던 제일모직과 삼성전자 등 당시 삼성 상장계열사의 수많은 소액주주들은 이 사건으로 회사가 갖고 있던 지분 가치가 내려가는 손해를 입었지만 민사적 손해배상을 물을 수 없다. 이는 배고프다고 아우성치는 민중에게 ‘빵이 없으면 쿠키를 먹으라’고 한 프랑스대혁명 당시의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과 같다”고 평했다. 민사소송으로 해결이 안 되니 형법을 들고 나왔는데, 결론은 다시 민사소송으로 돌아가란 셈이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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