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재벌의 특권과 반칙 용인한 대법원

법철학의 빈곤 드러내… 소수의견이 올바른 법리로 평가받는 날 올 것
등록 2009-06-02 11:58 수정 2020-05-03 04:25

삼성에버랜드 배임 무죄, 삼성SDS 배임 유죄. 5월29일 대법원은 삼성SDS 사건에도 무죄를 선고하리라는 일반적인 예측을 뒤엎고 이건희 전 삼성 회장에게 절반의 패배를 안겼다. 더욱이 에버랜드 사건 무죄판결도 언론의 추측 보도와 달리 6 대 5로 단 한 표 차이였다. 이건희 전 회장이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로 아슬아슬한 결과다. 아마도 촛불 재판 개입으로 촉발된 ‘제5차 사법 파동’이 대법관들의 규범적 긴장도를 높인 덕분이 아닌가 싶다.

5월29일 대법원2부(주심 김지형 대법관)는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 사건과 관련해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이날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양창수 대법관이 주문을 읽고 있다. 사진 연합 서명곤

5월29일 대법원2부(주심 김지형 대법관)는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 사건과 관련해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이날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양창수 대법관이 주문을 읽고 있다. 사진 연합 서명곤

실질을 따지고 들면 오늘의 대법원 판결은 삼성의 완승이나 진배없다. 이건희 전 회장 일가도 속으로 쾌재를 부를 것이다. 무세(無稅) 승계의 핵심 고리인 에버랜드 사건에서 이건희 전 회장의 무죄가 확정돼 앞으로 이재용 전무 등 자녀들의 에버랜드 지분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물론 유죄 취지로 고법에 파기환송된 삼성SDS 사건이 남아 있다. 하지만 결론이 어떻게 나든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삼성SDS 배임 유죄의 결과로 이 전 회장의 형량이 늘어날 수 있지만, 병들고 은퇴한 그에게 실형이 선고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폭탄 돌리기’ 바빴던 대한민국 검찰

요컨대, 아직 삼성SDS 사건이 꼬리를 남기고 있지만 삼성그룹의 3세 무세 승계 작업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오늘의 대법원 판결로 사실상 끝이 났다. 필자가 배임죄 처벌을 공론화한 지 무려 12년, 법학교수 43명이 검찰에 이건희 전 회장을 고발한 지 9년, 검찰이 공소시효 하루를 남겨놓고 허태학 사장 등 이른바 ‘깃털’만 기소한 지 6년, 김용철 변호사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도움을 받아 양심고백을 감행한 지 1년6개월, 삼성특검이 ‘몸통’ 이건희 회장을 에버랜드와 삼성SDS 배임 혐의로 기소한 지 1년 만의 결과다.

긴 세월만큼이나 우여곡절과 진기록도 많았다. 에버랜드 사건의 경우 세상이 다 아는 ‘몸통’을 놔두고 애꿎은 ‘깃털’만 기소돼 맥 빠진 재판이 진행됐다. 에버랜드 사건의 몸통에 대해서는 5년이 더 지나서야 특검의 기소로 재판이 진행됐다. 100% 동일한 사건이건만 깃털 재판에선 1심과 2심 모두 유죄가 선고된 반면 몸통 재판에선 1심과 2심 모두 무죄가 선고된 것도 장안의 화젯거리였다. 역시 돈이 세다는 수군거림이 한동안 돌아다녔다.

에버랜드 재판은 대법원에 와서도 순탄치 못했다. 관련 재판부의 전원합의체 회부 결정이 불이행되는 상황에서 소수의견 대법관을 배제한 재판부 구성 변경이 단행됨으로써 법원 안팎에서 큰 물의를 빚었다. 이용훈 대법원장과 안대희 대법관이 에버랜드 사건에 얽힌 과거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역사적 재판에서 제척된 사실도 이채롭다. 판결 내용도 6 대 5로 아슬아슬하게 갈리는 진풍경을 보였다. 법학교수들의 집단고발로 검찰 수사가 개시됐다는 점도 동서고금의 역사상 유례없는 일로 특기할 만하다.

삼성SDS 사건의 경우 참여연대가 고발한 1999년 이래 무려 6번이나 검찰에서 불기소처분을 당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삼성SDS 사건도 결국 삼성특검에 와서 간신히 기소될 수 있었다. 김용철 변호사와 삼성특검은 삼성SDS 헐값 발행이 무세 승계 완료 축하와 공로 인정 잔치의 일환으로 기획된 사실을 밝혔다. 이건희 전 회장이 뜻밖에도 자신과 김인주 사장을 특정해 네 자녀들과 똑같은 특혜 조건으로 각각 100억원대 규모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 기회를 특별히 부여했다는 이학수 부회장의 법정 진술이 이를 뒷받침한다. 1심과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이 사건을 대법원이 유죄판단 아래 고법에 파기환송한 점도 이변이다.

삼성 사건으로 씨름한 지난 10년의 대장정 기간에 대한민국 검찰은 어떤 선의로도 이해할 수 없는 치욕스런 행태를 줄곧 보였다. 2000년 이후만 쳐도 검찰총장이 무려 8명이나 바뀌었지만 누구도 이건희 전 회장을 소환조사하지 못한 채 ‘폭탄 돌리기’에 바빴다.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 분명했지만 누구도 삼성SDS 사건의 불기소처분을 뒤집지 않았다. 이건희 전 회장의 소환조사와 삼성SDS 사건 기소는 결국 김용철 변호사가 역사의 무대로 걸어나와 메가톤급 폭로를 감행한 끝에 삼성특검이 도입돼 이뤄졌다. 김 변호사가 생생하게 밝힌 ‘삼성 장학생 떡값 검찰’ 수뇌부의 한계였다.

총수 일가를 위한 특혜성 헐값 발행 사건은 법리적으로는 그다지 복잡하거나 난해한 사안이 아니다. 그래도 여러 차례의 재판 과정을 통해 유의미한 법리적 공방이 없었던 건 아니다. 특히 에버랜드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한 표 모자란 소수의견은 신주 발행과 배임죄에 관한 가장 정치한 법리 전개로 평가할 만하다.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은 주주배정의 경우 적정가 발행 의무가 없지만, 제3자 배정의 경우 적정가 발행 의무가 있다는 데 동의한다. 삼성SDS 경영진은 처음부터 제3자 배정 방식을 취하면서도 적정가 발행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고, 그 결과 회사에 손해를 끼쳤으므로 유죄가 인정된다는 데에도 이견이 없다.

에버랜드의 경우 다수의견은 주주배정으로 보는 반면, 소수의견은 주주배정을 가장한 제3자 배정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다. 하지만 주주배정으로 인정하는 경우에도 양자의 의견은 갈린다. 이른바 실권주 처리 방법에 이견이 있다. 주주배정 방식을 채택해도 실권분에 대해서는 제3자 배정을 허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때 실권분이 ‘상당한 정도’에 이른다면 이사회가 제3자 배정의 성격에 맞게 적정가를 따로 책정해야 한다는 것이 소수의견의 견해다. 에버랜드 사안에서 그랬듯이 실권분 인수로 지배권의 변동이 초래될 정도라면 더욱 타당한 법리가 아닐 수 없다.

지배권 변동될 수준이면 헐값 발행 더욱 안 돼

그럼에도 다수의견은 기존 주주들이 실권할 때 이미 이런 가능성을 용인한 것이며, 여기에 법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여긴다. 다수의견에 따를 경우 한국의 재벌 구조에서 총수 일가를 위한 배임성 헐값 발행을 막을 길이 없다. 다수의견의 대법관들은 세금 없는 부와 권력의 부당 세습이 계속 이뤄져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인지 묻고 싶다. 사실 대법원의 다수의견은 그 어디에서도 총수 일가를 위한 배임성 헐값 발행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지 않는다. 재벌그룹 소유지배 구조의 특징이 무엇이며 그것이 회사법과 회사형법의 집행에 어떤 함의를 갖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신주 발행 배임죄에 관해 어떤 법해석을 전개해야 재벌 총수의 특권과 반칙을 바로잡을 수 있는지 고민한 흔적이 없다.

한마디로 다수의견은 철저하게 탈맥락화한 가운데 단순한 개념조작과 형식논리에 기대 손쉬운 결론을 도출한다. 법철학의 빈곤이 이보다 더할 수 없을 정도다. 다수의견이 정의의 여신이 그렇듯이 눈에 가리개를 쓰고 피고인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재판을 진행했더라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을지 의문이다. 소수의견을 낸 이홍훈·김능환·김영란·전수안·박시환 대법관에게 갈채를 보낸다. 단언컨대, 이들의 소수의견이 머지않아 올바른 법리로 평가받고 다수의견이 될 것이다.

곽노현 방송통신대 교수·법학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