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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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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변절 맞습니까

문인 18명이 말하는 황씨 논란…
‘진정성’만이 무기인 진보의 콤플렉스인가, 신자유주의의 저주인가
등록 2009-05-29 08:03 수정 2020-05-02 19:25
황석영, 변절 맞습니까 / 컴퓨터그래픽 장광석

황석영, 변절 맞습니까 / 컴퓨터그래픽 장광석

진보 진영의 대표 작가로 평가받아온 소설가 황석영(66)씨가 진보 인사들로부터 비난 세례를 받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을 따라 중앙아시아를 방문하며 한 말들이 빌미가 되었다. “현 정권은 중도실용 정권이다.” “(용산 참사는) 현 정부의 실책이라고 본다. 광주 사태가 우리에게만 있는 줄 알았는데, 70년대 영국 대처 정부 당시 시위 군중에게 발포해 30~40명의 광부가 죽었고,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사회가 가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에서 타전된 몇 마디는 즉각 ‘변절 논란’으로 도화했다. ‘변절’이라는 단어가 그렇듯, 논란이 전개되는 과정은 때론 즉자적이고 감정적이다. 과하다는 이 있고, 당연하다는 이 있다. 중견·원로와 30~40대 소장파 등 문인 18명을 꼽아 긴급 설문조사를 벌였다. 다들 황씨가 고문으로 있는 진보적 문인단체, 한국작가회의 소속이다. 반응은 다앙했으나 상처는 하나같이 깊다. 편집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시의 제목은 ‘사랑법’이다. 시인 강은교는 사랑하는 사이, 행위의 정석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당초 사랑이 없다거나, 배신당했다 생각할 때 이는 가당치 않다. 떠나고 싶은 자에겐 돌을 던지고, 잠들고 싶은 자에게 악몽을 희구한다.

설문에 응한 한 문인은 “진보 진영이라는 게 있다면, 그 진영의 유일한 무기는 ‘진정성’이다. 진정성을 훼손하는 순간 당연히 변절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한편엔 양심과 신념의 우월에 기반한 자긍심, 다른 한편에는 진정성밖엔 가진 게 없는 데 따른 콤플렉스가 공존한다.

김지하·박노해보다 더 혹독한 평가

한국 문단에서 저마다 이름값을 지닌 문인 18명이 최근 황석영씨의 행보에 내린 평가는 가혹하다. 11명이 이명박 대통령과 ‘동행’한 것부터가 문제라고 꼽았다.

한 소장파 문인은 “자신의 주장대로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는지 욕망을 위한 행동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경솔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그는 “현 정권에 동참하는 일을 (황석영 작가를 게스트로 세웠던 문화방송 프로그램 의)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는 일과 비슷하게 이해한 게 아닌가 싶다”며 “무엇보다 광주와 용산에 대한 발언은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원로 소설가는 “변절이다 아니다를 넘어, 경망함을 느낀다”고 말하고, 한 중견 문인은 “공부를 게을리한 데서 온 전략적 실수”라고 꼬집는다.

1990년대 이후 변절 또는 훼절이라는 논란에 휩싸였던 진보계 인사로 김지하·박노해 시인이 대표적이다. 70~80년대 민주화·노동 운동의 아이콘으로 수많은 추종자를 이끌던 이들이, 가파르게 생명·나눔 사상으로 ‘귀의’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황석영씨는 표면적으로 그들보다 더 혹독한 평가를 받는다. 한 문인은 “김지하·박노해씨는 기득권을 좇아 움직이지는 않았으나, 황석영씨는 권력을 좇고 획득하려는 모습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 소장파 작가는 “이명박 정권에선 남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인 상황에서, 그간의 정치적 행보가 너무 노골적이었다”고 평가한다. 한 원로 작가도 “황석영씨 문제엔 권력이 개입되어 있기에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예전보다 상실감이 더 큰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작가회의 소속 문인 18명에게 물은 ‘변절’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한국작가회의 소속 문인 18명에게 물은 ‘변절’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한국작가회의 소속 문인 18명에게 물은 ‘변절’

한국작가회의 소속 문인 18명에게 물은 ‘변절’

못박진 않고 ‘경박하다’ ‘우습다’

작가 18명 가운데 3명은 ‘발언’만을 문제 삼았다. 이념을 떠나 최선의 결과를 위한 실리적 선택을 모색하는 게 비난받을 수는 없다는 태도다. 반면 ‘동행’과 ‘발언’ 모두 납득할 수 있다고 답한 이는 1명이다. 그는 “현 정권에 대한 중도보수 규정이 희망사항이라고 스스로 분명히 했다”며 “지금 행보는 통일에 대한 실천 의지이며 문학적 도정을 감안할 때 정치적 활동이 아닌 문학적 활동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문수 경기도지사, 문부식씨나 신지호 의원(한나라당) 등을 위시한 진보계 출신 뉴라이트 계열은, 진보가 보기에 ‘변절’이고 보수가 보기엔 ‘귀순’이다. 자명하여, 논란은 생략된다.

한 중견 문인은 이런 말을 한다. “황석영씨는 ‘실수’를 한 것이다. 하지만 김문수 지사 같은 변절보다 자잘한 실수가 더 큰 피해를 가져온다. 어디부터 변화이고 변절인지, 그 경계를 허물고 판단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황석영씨의 행보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 문인 14명의 답변엔 ‘경박하다’ ‘당혹스럽다’ ‘우습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논박이라기보다 풍자다. 여러 평가를 가로지른다. 크게는 황씨 행동의 변화 과정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는 것과 그 변화가 지속되진 않을 거라는 기대다. 실제 전체 작가들 가운데 3명만 “황씨가 변절했다”고 잘라 말했다. 더 지켜보아야 한다는 이가 2명인 반면, 변절이 아니라고 말한 이는 6명이었다.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거나 ‘노 코멘트’로 갈음한 이들은 7명이다. 대신 그 가운데 4명은 “안쓰럽다. 지지성 발언도 그렇지만, 이후의 (자기변론식) 해명이 더 큰 문제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해독이 안 된다. 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따위의 수사로 비꼬거나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들조차 변절이라고 못박진 않는다. 저어하는 분위기다.

한국작가회의 산하의 자유실천위원회와 젊은작가포럼이 지난 5월20일 성명을 통해 황석영씨를 공식 비판했다. 그의 발언이 공론화된 지 일주일 만이다. 그 사이 김지하씨가 황씨를 지지한 발언을 빼면, 비판이든 옹호든 문인이나 문인단체로는 처음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을 광주 사태로 호명 △현 정권을 중도실용으로 규정 △현 정권의 대북정책·냉전사고에 대한 무비판 등을 이유로 꼽았다. 그러면서 이들은 “우리 젊은 작가들은 황석영의 안이하고 주관적인 현실 인식이 메시아적 오만함과 과도한 개인적 욕망으로 인해 나타난 게 아닌가 우려한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변절’은 등장하지 않는다.

학계나 진보단체가 황석영씨의 ‘훼절’에 무게를 두고, 미디어나 대중이 거푸 확대재생산하는 것과는 다르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의 집권을 막기 위해 비상시국 선언까지 했던 분이 (현 정부를) 실용적 중도 정권이라고 돕겠다고 한다. 기억력이 2초짜리 금붕어도 아니고. 욕도 웬만해야 하는 거지 이 정도의 극적인 변신이라면 욕할 가치도 없다.”(진중권 중앙대 교수)

“진보 정당에 주는 쓴소리가 궤변으로만 읽힌다. 황 작가야말로 중도에서 뉴라이트로 월경한 것 아니냐.”(민주노동당)

“황씨는 (현 정부가 중도실용 정부라는 설명의) 파문이 커진 뒤 이명박 정부를 진짜 중도실용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이 대통령이 중도실용을 들고 나와서 당선됐잖냐’고 답했다. 이는 우리가 한 정치 세력의 성격을 그들의 구체적인 정책이나 실천이 아니라 말로 주장하는 것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기이한 논리이다. 그렇다면 광주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 정권과 민정당(민주정의당)은 학살 세력이 아니라 ‘민주정의 세력’이다! 민정당, 만만세다!”(손호철 서강대 교수)

“(알타이문화연합 프로젝트를 실현하려면) 문학이 정치가 되는, 곧 권력화되는 도리밖에 없다. 그리고 대개 이는 ‘훼절’로 나타난다. 대중이 작가에게 기대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속 깊은 관찰과 애정이다. 그러나 황 작가의 국제정치 프로젝트에서 드러나는 것은 자원에 대한 권력의 욕망과 자본의 상업주의, 그리고 신식민주의가 아닐까.”(이해영 한신대 교수)

진보에서만 논란이 되는 단어

발언에 대한 비난에서 개인에 대한 불신, 발상의 맹점까지 황씨에 대한 비판의 수위가 커져간다. 반면 문단은 말을 아낀다. 무엇보다 논란만으로 증폭되는 낙인 효과를 경계하는 분위기다. 같은 문인으로서의 자세나 입장, 이전의 개인적 관계라는 두 변수가 함께 작동한 탓이 있다.

“변절이 아니다”라고 답한 소장파의 한 작가는 “우리가 한 사람의 신의와 신념을 너무 평면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의문이 든다”고도 말한다. 김지하씨가 “작가는 좌우를 오갈 수 있다”며 황씨를 옹호한 것과 동닿는다.

반면 변절이라 지목한 문인은 “변절은 윤리적 판단이므로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적어도 이 사건에서 황석영 작가는 유죄”라고 말한다. “소설가적 양심을 저버린 행위로 논란조차 우스운 부조리 상황”이라는 이도 있다.

작가 18명 가운데 8명은 현재 ‘변절 논란’의 쟁점이나 수위가 타당하다고 밝혔다. 작가는 공인이니 그의 사회적 발언 또한 주목해 논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실천위원회·젊은작가포럼은 성명을 통해 “작가는 언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존재”라며 “시민사회의 생산적 담론을 창출하는 게 아니라 자기 부정적·퇴행적 담론을 만들어내 탄식과 냉소를 재생산하는 황석영의 언행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3명은 지나친 낙인찍기는 경계해야 한다는 태도다. 또 다른 3명은 ‘변절 논란’을 벗어나 좀더 본질적인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가령 현대사회에서 작가의 발언, 지성인의 실천이 의미하는 바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로 논의가 나아가야 한다는 제안이다.

‘변절’은 진보의 언어다. 이 때문에 대개 진보에서만 논란이 된다. 하승우 한양대 연구교수는 “보수는 이미 기득권자여서 변절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진보는 상대적으로 그 권력에 대한 유혹에 시달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진보 문인의 입장이 추가된다. 서해성 작가는 “정치인보다 문인에게 (변절 기준이) 더 가혹한 게 정당하다. 작가는 사회에서 윤리적 심판자 기능도 수행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변절(논란)이란 주홍글씨는 진정성밖에 가진 게 없는 진보 진영의 유일한 ‘징벌’이다. 보수우파는 문익환 목사가 좌파로 변절했을 때, 국가보안법으로 옥살이를 시킨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진보는 말로 단죄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대신 그 말이 호되다. 곧잘 인신공격으로 이어진다.

소설가 최일남씨는 “진보·좌파는 약자로서의 유대가 공고하고, 잇속이 아닌 이념·생각으로 뭉친 이들이기에 (내부 변절에 따른) 상처도 크다”고 말한다. 배신에 대한 공포는 변절 콤플렉스를 낳기도 한다. 소설가 박범신씨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격”이라며 “(황석영씨의) 발언에 동의하진 않고, 좌우 전선이 강화되는 시기에 그랬다는 문제가 있지만, 그럼에도 편협한 이데올로기로 재단하고 언론과 대중이 합세해 변절이다 아니다 단죄하는 건 또 다른 집단주의이고 과도한 폭력”이라고 말한다.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도 “변절이란 단어는 너무 정서적이고 이념적”이라고 꼬집는다. 기준이 모호한 도덕주의에 따른 이분법적 단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설문조사에서 “변절인지 지켜보아야 한다”고 말한 한 소장파 작가는 “운동권에 조금만 개량해도 변절이라 몰아세우는 경직성이 없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포털에서 ‘황석영’을 검색하면 ‘황석영 변절’이 자동 검색된다. 이미 대중에겐 동일시된 분위기다. 당초 “진보로부터 욕먹을 각오가 돼 있다”는 원대한 계획을 표명했던 황씨는 논란이 인 뒤 “일하는 과정에서 비난이 있을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 드셀 줄 몰랐다”며 “지금이라도 다 접고 조용히 글 쓰는 일로 돌아갈까 싶기도 하다”고 말했다.

유혹은 많고 평가는 가혹한 진보의 숙명

하지만 그가 돌아오든 안 오든, 못을 빼도 남는 못 자국처럼 그를 신뢰했던 이들의 상처는 남는다. 한 소장파 작가의 이런 평가도 오래 남을 것이다. “황석영에 대한 극도의 흥분을 보며, 이것이 현재 진보 진영의 가장 쓸쓸한 현실일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현 정부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크고 촛불까지 불태웠지만, 당시 원초적 힘이었던 청년 세대들은 여전히 진보 진영의 토대가 되지 못하는 가운데, 긴 세월 투쟁하고 헌신했던 어른들 중 한 분이 집을 나가버린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소설가 현기영씨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변절을 요구하는 시대다. 아주 저주스럽다. ‘신자유주의’라는 게 극단적 소비사회를 조장하고, 상품이나 엔터테인먼트가 안 되면 역사도 가치도 모두 저버리게 하는 본질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유혹은 많고 평가는 가혹하다. 진보의 숙명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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