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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핵심 ‘포스코 접수’ 원격조종

천신일·박영준 투톱 내세워 정준양 회장 카드 관철… 박태준 견제용 관측도
등록 2009-05-14 05:00 수정 2020-05-02 19:25

‘포스코의 배신.’
포스코 회장 선임 과정에 현 정권 실세들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의혹이 계속 불거지고 있다. 한 꺼풀씩 벗겨가다 보니, 권력과 실세들이 정부 지분 한 푼 없는 포스코의 인사를 쥐락펴락한 사실을 찾을 수 있었다. 포스코 고위층들도 앞다퉈 권력에 줄대기를 한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포스코는 ‘외풍’을 막아주려 한 국민적 여론에 부응하기는커녕, ‘자연인’인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과 박영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또 다른 ‘자연인’인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에 휘둘렸다. ‘국민기업’ 포스코의 배신이다. 이런 불합리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정권 실세들의 포스코 인사개입 논란의 배후를 추적했다.

5월8일 서울 삼성동 포스코센터 건물 앞에서 포스코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포스코 회장 선임 과정에 현 정권 실세들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포스코는 그 어느 때보다 뒤숭숭하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5월8일 서울 삼성동 포스코센터 건물 앞에서 포스코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포스코 회장 선임 과정에 현 정권 실세들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포스코는 그 어느 때보다 뒤숭숭하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 천신일 회장의 대통령 사칭? 대통령의 뜻?

1월28일 밤 10시20분. 포스코 최고경영자(CEO) 추천위원회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윤석만 당시 포스코 사장(현 포스코건설 회장) 휴대전화에 익숙한 번호가 찍힌다. ‘010-××××-1000’.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의 전화였다. 1월12일 밤 11시45분에 이은 두 번째 전화였다. 전화 통화는 12분간 이어졌다.

우제창 민주당 의원, 포스코 CEO추천위 관계자, 포스코 안팎 인사 등 복수의 취재원을 통해 확인한 결과, 그날 천신일 회장은 윤석만 사장에게 대통령의 뜻을 전하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대통령을 만나서 윤 사장 얘기를 했다.) 대통령께 ‘윤 사장이 중앙대를 나왔지만 연세대에서 석사 하고 중앙대에서 박사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대통령께서 ‘박사라고 경영 잘하냐’고 말했다. 감이 안 좋으니 그만두는 게 좋겠다.”

포스코의 한 관계자는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는데, 윤 사장은 천 회장의 말을 ‘대통령 재가가 났는데 회장에 도전하지 말라. 중앙대 나와서 무슨 회장을 하느냐’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또 다른 회장 후보였던 정준양 당시 포스코건설 사장(현 포스코 회장)은 서울대 공업교육학과를 나왔다. 윤석만 사장은 중앙대 행정학과를 나왔다.

물론 천 회장이 이 대통령의 이름을 판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천 회장과의 통화 사실을 윤 사장이 CEO추천위에서 직접 공개한 만큼 이 대통령의 관련 여부가 앞으로도 논란거리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천신일 회장이 포스코 인사에 깊숙이 개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포스코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정권 실세들이 민간 기업인 포스코 인사에 전면적으로 나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수 있겠느냐. 정권의 의중을 대신 전달해줄 대리인이 필요했다. 천 회장은 권력의 의중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사람 아니냐”고 말했다.

천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고려대 61학번 동기이자 ‘보이지 않는 핵심 측근’이다. 또 천 회장은 1973년 포항에서 제철화학으로 사업을 시작해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 매우 가까운 사이다. 천 회장은 포항에서 사업을 해 ‘대통령 형님’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과도 가깝다. 천 회장은 2007년 대선 바로 뒤 성탄절에 이 대통령과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이상득 의원 등과 함께 부부 동반으로 저녁식사를 함께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제창 민주당 의원은 “당시 윤 사장이 천 회장과 통화한 전화번호와 통화 내역을 누군가 갖고 있다. 윤 사장이 천 회장과 얼마나 통화했는지, 천 회장이 사용한 전화번호가 몇 번인지도 갖고 있다. 시간을 체크해놓고 통화 내역도 뽑아놓았다”고 말했다. 통화 내역만 체크해보면, 진실은 곧 밝혀진다는 얘기다. 민주당은 천 회장 등이 포스코 회장 선임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최철국 의원을 단장으로 하는 진상조사단을 구성했다.

천 회장은 과의 전화 통화에서 “회장이 누가 된다는 소문이 있기에, 윤 사장과 정 사장이 서로 화합해서 잘하라는 취지로 두 사람 모두에게 전화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우제창 민주당 의원이 폭로한 포스코 회장 선임 과정 재구성

우제창 민주당 의원이 폭로한 포스코 회장 선임 과정 재구성

## ‘자연인’이 회장과 명예회장 만난 이유는?

박영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은 지난해 11월부터 올 1월 초까지 포스코 회장 선임과 관련한 핵심 인사들을 두루 만났다. 포스코 새 회장을 스크린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박 차장이 지난 1월7일 이구택 당시 포스코 회장과 아침 식사를 하며 “정준양 사장으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는 게 우제창 의원의 주장이다. 이날 식사에는 대우 사장을 지낸 장아무개씨도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차장은 대우그룹 기획조정실 전략팀장을 지낸 ‘대우맨’ 출신이다. 이후부터 차기 회장을 둘러싼 분위기는 확 바뀐다.

박 차장의 표현대로 ‘자연인’ 신분으로 포스코 핵심 인사를 만난 이유는 무엇일까? 박 차장을 ‘대리인’으로 내세운 핵심 실세가 존재한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박 차장이 이번 사건의 ‘몸통’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박 차장은 이 대통령의 서울시장 재직 시절인 지난 2005년 서울시장 정무보좌역으로 옮기기 전까지 이상득 의원의 보좌관 생활을 11년 동안 했다. ‘형님’ 이상득 의원은 포스코 본거지인 포항 남구·울릉군에서만 6선을 했다. 이렇다 보니 자연스레 박영준 차장의 인사 개입설의 배후가 이상득 의원일 가능성에 시선이 쏠린다.

권력이 ‘정준양 카드’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박태준 명예회장의 강력한 후원 아래 있는 윤석만 사장이 회장이 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박 명예회장을 견제하기 위해 정준양 사장을 밀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포스코 관계자는 “포스코에 직·간접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일단 흠이 있는 사람을 회장에 앉히는 게 통제하기가 쉽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은 박 차장과 연락을 시도했으나, 끝내 통화를 하지 못했다. 대신 박 차장의 비서관은 “차장께서 말씀하실 답변은 지난 4월22일 정무위 속기록의 내용이 전부일 것이다. 추가로 말씀하실 내용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차장은 4월22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정준양 회장을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자연인 시절 행사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박태준 명예회장과는 밥만 먹었다”고 해명했다. 이구택 당시 회장을 만났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만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 이구택 전 회장은 왜 울어야 했나?

2008년 12월3일 서울 개포동 이구택 당시 포스코 회장의 자택 앞. 저녁부터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이주성 전 국세청장을 수사 중인 검찰이 로비 의혹과 관련해 이 회장 자택을 압수수색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이날 이 회장은 끝내 귀가하지 않았다.

포스코의 핵심 관계자는 “이날 이 회장은 포스코 지하 주차장을 통해 포항에 내려갔다. 이 회장은 포항 회장 숙소에서 윤석만 사장에게 전화해 ‘윤 사장, 당신이 앞으로 회장 하시오’라고 통보했다. 이 전 회장이 최종적으로 회장직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날이었다”고 말했다.

임기가 2010년까지 보장된 포스코 회장 자리 흔들기는 이명박 정부 출범 뒤부터 시작됐다. 세무조사에 이은 검찰 수사설이 정치적인 동기에서 출발한 ‘포스코 흔들기’라는 얘기가 끊임없이 나왔다. 입맛에 맞는 회장을 앉히기 위한 사전 작업이라는 얘기다.

‘포스트 이구택’ 0순위 인물은 정준양 사장이 아닌 윤석만 사장으로 통했다. 박영준 국무차장이 이구택 회장을 만난 1월7일 전까지 이 회장도 윤 사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러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다.

이구택 회장은 정 사장의 손을 들어준다. 그것도 노골적으로 지지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때문에 정치권 외압설이 불거졌다. 이 회장의 ‘변심’에 다른 배경은 없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된 것이다.

포스코 관계자는 “이 회장이 사외이사들에게 정 사장을 적극 추천했다. 이사회에서 명시적으로 정 사장이 되는 게 좋다고 본다고 밝히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처음부터 불공정한 게임이었다. 이 회장은 포항에 내려가 수십 명의 임원들 앞에서도 정 사장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고 밝혔다.

상황이 급변하자, 윤 사장이 1월 중순 이 전 회장을 찾아 대판 말다툼을 벌였다고 한다. 포스코 사정에 밝은 인사의 증언이다. “윤석만 사장이 1월 중순 이구택 회장한테 세게 대들었다. ‘내가 회장 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당신이 회장 하라고 해놓고 사람 바보로 만들어놓는 이유는 뭐냐. 박영준이 뭔데 회사를 팔아넘기느냐’고까지 했다. 결국 이구택 회장이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준다’며 울었다고 한다.”

우제창 민주당 의원이 폭로한 포스코 회장 인사 개입 의혹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우제창 민주당 의원이 폭로한 포스코 회장 인사 개입 의혹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박태준 명예회장이 말한 ‘물욕’이란?

지난해 12월 이구택 회장이 사의를 밝힌 뒤부터 포스코의 새 회장으로 여러 이름들이 솔솔 불거져나왔다. 장관 교체설이 나돌던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과 윤진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 같은 현 정부 실세 인사들의 입성 가능성이 거론됐다.

포스코에 앞서 KT는 세무조사와 검찰 수사를 거쳐 외부인이 CEO가 됐다. 포스코에서도 낙하산 인사 가능성을 점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론은 민간 기업 포스코에 외부인이 와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돌아갔다. 진보와 보수를 떠나 를 비롯한 대다수 언론들이 포스코의 독립성을 지원하는 기사와 칼럼을 쏟아냈다. 입맛에 맞는 CEO를 앉히기 위한 정권의 포스코 흔들기에 반대하는 것이 국민들의 뜻이었다.

포스코 사정에 정통한 인사는 “12월29일 이상득 의원과 박태준 명예회장이 회동을 가졌다. 이날 박 명예회장이 ‘어떤 일이 있어도 외부인이 회장 되면 안 된다’고 요청했다. 이 의원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 뒤 외부인의 이름은 쑥 들어가버린다.

하지만 권력 실세들은 ‘정준양 카드’를 뽑았고, 박 명예회장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포스코 관계자는 “1월14일 이구택 전 회장이 박 명예회장을 찾아와 퇴임 인사를 하며 ‘위에서 정준양으로 몰고 가는 것 같다’고 보고했더니, 박 명예회장이 불쾌하게 여겼다”고 말했다.

1월21일 ‘포스코 창설요원 및 중우회동지 일동’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견해/포스코 새 회장 선임에 대하여’란 제목의 글이 인터넷에 올라온다. 중우회는 포스코 퇴직임원 모임이다. 이들은 글에서 “회장 후보자는 최소한 ‘물욕’(物慾)은 반드시 초월해야 된다. 이는 본인은 물론 주변 일가친척에 이르기까지 이재(理財)와 관련해 물의(物議)를 일으키는 자는 배제되어야 한다. 특히 내부정보에 의한 주식 매매, 이를 통한 부당이익 창출 등 재부의 축적을 꾀하는 행태는 엄격히 다스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면으로 정준양 사장을 겨눈 것이었다. 포스코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한 인사는 “그 글은 ‘물욕’이라는 말에 방점이 있다. 박 명예회장이 당시 정 사장의 비리 의혹에 대해 듣고 ‘정 사장은 물욕이 많아서 안 되겠다”고 말했다. 박 명예회장의 의중이 들어간 글이었다. 퇴직 임원들은 윤 사장을 지지했다. 윤 사장이 뛰어나서라기보다 비리 의혹이라는 흠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권의 힘이 실린 ‘정 사장 대세론’을 꺾지 못했다. 1월29일 오후 2시에 열린 포스코 CEO추천위 회의에서 윤 사장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며 어렵게 입을 연다. ‘후보 사퇴 압력’을 받았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인사 개입 폭로는 15분가량 이어졌다. 일부 사외이사들은 충격받은 표정이 역력했다. 사외이사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첫 투표는 4 대 4 동수였다. 하지만 최종 투표에서 정 사장이 낙점됐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포스코 이사회의 사외이사 한분 한분은 다 명망이 있고 이사회도 평소에는 잘 작동해왔다. 하지만 포스코 인사 문제는 정부가 눈에 보이지 않는 수단을 동원했기 때문인 것 같다. 경제개혁연대 차원에서 CEO추천위 의사록 열람 청구를 검토 중이다. 법적으론 청구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어느 때보다도 포스코는 뒤숭숭하다. 여러 차례 회장이 바뀌었지만, 이번 같은 때는 없었다. 권력의 개입과 권력에 줄대기 실상을 뿌리까지 파헤쳐야만 국민기업 포스코의 제자리 찾기가 가능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인사 개입 의혹 부인한 천신일 회장
“윤석만·정준양 양쪽에 화합하라고 전화”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은 5월8일 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포스코 인사 개입을 비롯해 이명박 대통령의 30억원 특별당비 대납, 박연차 회장 세무조사 관련 청탁 등 자신에게 제기된 의혹들을 모두 부인했다. 그는 “(야당이나 언론에서 하는 말들은) 전부 사실이 아니다”라며 “검찰에 가면 진실이 다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천 회장은 지난 1월 윤석만 당시 포스코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던 사실은 인정했지만, “누가 회장이 되든 서로 도와 포스코의 위기를 극복하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주장했다. 윤 사장에게 “정준양 포스코건설 사장이 회장이 되면 잘 보좌해라. 정 사장이 엔지니어 출신이니 당신이 판매와 관리를 맡아서 해라. 반대로 당신이 회장이 되면 정 사장을 끌어안고 열심히 하라”는 조언만 했다는 것이다. 천 회장은 또 “당시 정준양 사장에게도 똑같은 내용의 전화 통화를 했다”고 말했다. 포스코와 오랜 인연을 가진 ‘원로’로서 회장 후보 모두에게 덕담을 하는 정도였고, 윤 사장이 사퇴 압력으로 느낄 발언은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천 회장은 박연차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를 무마시켜주겠다는 명목으로 돈을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 “대선 기간이나 세무조사와 관련해서 돈 10원도 받은 일이 없다”고 말했다. “박연차 회장에게는 베이징올림픽 때 2천만원 상당을 선수단 격려금으로 받은 게 전부”라는 해명이다. 천 회장은 특별당비 대납 의혹에 대해서도 이 대통령에게 친구로서 담보 제공 정도의 편의를 제공했을 뿐, 불법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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