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원시 단세포동물이 있었다. 바다를 떠다니는 단백질 덩어리였던 녀석은 어느 날, 무작정 물결에 몸을 맡기는 대신 ‘하나의 방향’으로 헤엄치기 시작한다. 먹이를 섭취하는 데는 그 편이 훨씬 유리하다. 녀석의 몸뚱아리엔 이제 앞과 뒤의 구분이 생긴다. 단세포동물의 ‘앞 몸통’은 모든 얼굴의 시초다.
먹이에 빠르게 접근하려는 추진력은 몸통의 ‘뒤’에서 생겨난다. 먹이를 삼키는 것은 ‘앞’의 몫이다. 그게 생존을 위해 더 효율적이다. 지금도 인간의 얼굴에서 가장 먼저 모양을 갖추는 기관은 입이다. 이제부턴 입에 들어갈 먹이를 놓치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 시각·청각·후각 기관이 입 주변에 자리를 잡는다. 그것들은 입을 배려한다. 눈은 입 위에, 귀는 입 뒤에 생겨난다. 그래야 입에 들어가는 먹이를 분간하면서도 포식을 방해하지 않는다.
얼굴을 완성시키는 것은 뇌다. 감각 정보를 빨리 처리하려면 ‘거리’를 좁히는 게 좋다. 뇌는 입과 눈의 바로 뒤에 자리를 잡는다. 눈은 입 아래에, 뇌는 항문 위에 붙어 있는 생명체가 존재했던들 진화의 역사는 그런 생명을 일찌감치 도태시켰을 것이다. 뇌와 감각기관을 잇는 것은 신경과 뉴런 덩어리다. 연약하지만 핵심적인 그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단단한 외피가 생겨난다. 머리를 둘러싼 뼈는 하나의 형상을 이루고, 그것이 얼굴의 기초가 된다.
기나긴 진화를 거쳐 현생인류의 얼굴이 지구상에 등장한 것은 13만 년 전이다. 아프리카에 처음 등장한 호모사피엔스는 오늘날의 인간과 해부학적으로 똑같은 이마와 광대뼈, 그리고 이빨을 갖고 있다. 이전 원시인류에게 있었던, 뾰족하게 튀어나온 주둥이가 사라지고 마침내 평평한 얼굴을 갖췄다. 이는 다른 동물의 얼굴과 인간의 얼굴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큰 차이다. 동물들은 여전히 입을 ‘옹립’하는 얼굴이고, 인간은 입이 다른 기관과 ‘평등’을 이룬 얼굴이다. 인간에게는 먹이를 먹는 것 말고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 얼굴로 소통하다인간의 얼굴에는 털이 없다. 보온 기능보다 더 절실한 것은 소통 기능이었다. 털 없는 얼굴은 표현을 크게 확장했다. 사람은 소음 속에서 상대의 말을 23%만 이해한다. 이때 얼굴을 보여주면 65% 이상을 알아듣는다. 얼굴은 무수한 정보를 발산하는 신비로운 신호 장치다.
이는 세 가지 신호에 의해 이뤄진다. 우선 정적인 신호가 있다. 얼굴의 형상, 골격, 피부색, 이목구비의 크기 및 위치관계 등은 일생을 통틀어 거의 변하지 않는다. 이 신호는 인간에게 ‘고유성’을 부여해 개체를 구분하게 한다. 얼굴 윤곽, 홍채 무늬, 얼굴 체온 발산 패턴, 귀 모양, 목소리 등은 얼굴에 새겨진 지문이다. 이와 달리 성장하면서 변화하는 신호가 있다. 주름살과 얼굴 근육의 발달 상태는 나이에 따라 다르다. 이 신호는 인간의 ‘번식’ 또는 ‘건강 상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내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려면 늙고 병든 이를 가려내야 한다. 눈썹, 입, 뺨 등은 그때그때 순간적으로 변하는 신호다. 감정·심리 등을 전달한다. 상대가 나를 적대한다면 짝짓기의 열망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얼굴의 다양한 신호 속에서 언어를 해석한다.
인간의 얼굴은 소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눈의 흰자위는 홍채의 움직임을 돋보이게 한다. 내 시선의 방향을 상대방이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동공의 팽창은 호감을 표시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배려·걱정하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커다란 동공의 소유자는 곧잘 상대방의 마음을 끈다. 인간의 입은 다른 동물에 비해 작다. 얼굴의 근육은 입술이 작을수록 더 능숙하게 조종할 수 있다. 작지만 섬세한 입과 혀, 입주름은 미소·분노·슬픔을 표시하는 핵심 기관이다.
■ 얼굴을 파악하다얼굴을 해석하는 것은 인간 생존의 핵심 기능이다. 출생 뒤 이틀이 지난 아기들에게 친어머니와 친어머니를 닮은 다른 산모를 보여줬더니, 아기들이 시선을 보낸 시간의 60%가 친어머니에게 향했다. 사람은 이틀 전에 처음 본 얼굴을 96%의 정확도로 기억해낸다. 이런 정확도는 4개월까지 지속되다가, 그 이후 급격히 감소한다.
얼굴 근육은 표정의 기초다. 좌우에 각각 22개씩 모두 44개의 얼굴 근육이 있다. 어떤 동물보다 많은 수다. 심리학자인 폴 에크먼은 이 근육이 만들어내는 표정 가운데 ‘아무 의미 없는’ 표정이 무엇인지 연구했다.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감고 볼을 불룩하게 부풀린 표정이 거기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표정에는 정말 아무 의미가 없다.
얼굴에서 나오는 정보와 신호는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 1980년대 후반, 미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연구소는 독립적으로 변화하는 부위를 중심으로 얼굴을 약 100개의 조각으로 분류했다. 각 부분은 다시 약 100개의 다양한 변화를 일으킨다. 100의 100승만큼의 다양한 얼굴 표정을 지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가공할 신호를 잡아내기 위해 인간의 뇌는 특별한 기능을 발달시켰다. 얼굴 피질, 이름 회로, 일대기적 지식 회로 등을 동시에 작동시켜 얼굴의 정보를 분석한다. 얼굴 피질은 뇌 위부터 아래까지 폭넓게 포진해 있다. 오직 얼굴에만 반응하는 이 피질은 신원을 확인하고, 표정을 해독하며, 눈과 머리의 방향을 읽어낸다. 동시에 왼쪽 중앙 측두엽에 저장된 이름 회로에서 얼굴의 주인공을 불러내고, 측두엽 전방에 저장된 일대기적 지식 회로를 가동시켜 그에 대한 기억을 결합시킨다. 얼굴 정보를 읽어내는 뇌 기능의 핵심은 자기편을 가려내는 데 있다. 어머니인가 아닌가? 저 수컷(또는 암컷)은 찍짓기에 응할 것인가 아닌가? 이 판단이 이뤄지지 않으면 인간은 생명을 부지할 수 없다.
■ 얼굴을 숨기다뇌의 얼굴 인식 기능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지만, 그 신뢰도는 여전히 높지 않다. 인간의 뇌는 성별, 나이, 얼굴 모양, 머리카락에 대한 정보만큼은 거의 확실히 분간해낸다. 나머지에 대해선 그 정확도가 크게 떨어지는데, ‘종의 번식’을 고려할 때 다른 정보는 중요성이 덜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뇌는 얼굴 신호를 읽을 때 ‘패턴’을 읽는다. 이목구비의 배열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70년대 ‘아이덴티키트’라는 새로운 몽타주 작성 기법이 미국 경찰에 소개됐다. 얼굴을 눈·코·입으로 나누고 각각의 다양한 형태를 샘플로 보여주면서 합성하는 방법이었다. 그전까진 목격자의 진술을 받아 펜으로 그렸다. 새 방식은 얼핏 과학적으로 보였지만 실효는 없었다. 인간의 뇌는 눈·코·입의 개별 특성이 아니라 그것들이 배열된 패턴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얼굴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를 아예 차단하려는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배타적·독점적 짝짓기의 본능에 충실한 가부장 문명은 여성의 얼굴을 가리는 문화를 발전시켰다. 고대 카르타고와 파르티아 여성들은 베일을 쓰고 은둔 생활을 했다. 초기 기독교인들 역시 여성의 머리카락이 천사를 혼란스럽게 한다며 베일을 쓰고 예배에 나오게 했다(지금도 성당에선 그렇게 한다).
차도르로 대표되는 이슬람 문명권의 여성 복식을 통틀어 ‘푸르다’라고 부른다. “아무것도 내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알제리 사막에 사는 투아레그족 남자들은 ‘체첸’이라는 터번으로 머리와 얼굴을 가리고 눈만 드러낸다. 얼굴을 가려야 힘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얼굴에 드러나는 가공할 정보를 고려하면, 나름대로 근거 있는 판단이다.
‘기독교 문명의 차도르’는 화장이다. 17세기 유럽에서는 가난하고 미천한 자들만 얼굴을 드러냈다. 왕족·귀족은 물론 시민들까지 남녀 가리지 않고 항상 두꺼운 화장을 했다. 흰 납으로 만든 분에 달걀 흰자와 식초를 섞어 얼굴 전체에 두껍게 발랐다. 여기에 가발을 썼고, 종종 가면도 애용했다. 꼭 필요한 의사소통은 ‘미용점’으로 대체했다. 즐거운 기분을 드러낼 경우엔 뺨에 점을 찍었다. 입술 위의 점은 키스를 원한다는 뜻이었다. 영국의 휘그당원은 오른빰에, 토리당은 왼뺨에, 중도파는 두 뺨에 점을 찍었다.
■ 얼굴을 해석하다인류는 얼굴 해석의 강박증을 갖고 살았다. 아군인가 적군인가, 진실인가 거짓인가. 얼굴을 들여다봐도 분간되지 않는 질문에 답하겠다며 관상학자들이 등장했다. 관상학은 문명의 탄생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생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유적에서 발견된 서판 가운데는 일종의 관상학 ‘핸드북’이 있다. “만약 비뚤어진 얼굴에 오른쪽 눈이 튀어나와 있다면, 그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개떼에게 잡아먹힐 운명이다.”
관상학은 문명사를 통틀어 줄곧 번성했으며 지금도 강력한 문화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 동양에선 얼굴을 통해 길흉화복을 점치는 ‘예언적 관상’이 발달한 반면, 서양에선 개인의 성격·감정·지성 등을 파악하는 ‘성격분석적 관상’이 발전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관상학자였다. 이라는 저서에 이렇게 썼다. “둔한 사람의 눈은 창백하고 멍하며 턱은 크고 살이 쪘으며 이마가 넓고 둥글다.” 성격을 추론하고 인간형을 구분짓는 분석형 관상의 본질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규범에 어긋나는 인간을 미리 알아내서 멀리하겠다는 것이 분석형 관상의 알파요 오메가다.
18세기 관상학자 카스퍼 라바터는 “인간의 본성은 얼굴에 나타나므로 범죄자를 구별할 때 관상학을 사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관상학과 범죄학을 연결시키는 발상은 이후 우생학으로 이어져 인종차별과 인종학살로 이어진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신입사원 면접 때 관상을 봤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일본의 심리학자 아사노 하치로가 쓴 〈CEO, 얼굴을 읽다〉의 부제는 이렇다. ‘당하지 않으려면 사람 보는 눈을 키워라!’
“관상학은 구별짓기의 역사이자 타자에 대한 경계와 배타의 역사”라고 설혜심 연세대 교수(사학)는 지적했다. 얼굴을 통해 타자의 사회적 정체성을 인식하려는 관상학적 관음의 욕망은 “차별과 박해의 정당성을 확보해가는 마음속의 정형화 작업”이다.
현대적 의미의 관상학이 르네상스 시기에 태동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회적 관계는 폭발적으로 확대됐지만, 종교·신분의 낙인이 누그러들면서 상대를 파악할 수 있는 표상은 급격히 사라졌다. 판단의 근거는 오직 ‘겉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설혜심 교수는 “타인을 주시한다는 것은 사회적 관계 속에 상당한 긴장이 내재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자신의 과실과 상관없이 누군가에 의해 피해를 입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팽배한 것이다. 이런 불안과 긴장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 되도록 한다”고 분석했다. 현대에 이르러 누군가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이제 자신을 방어하는 동시에 누군가를 공격하는 무기가 됐다.
■ 그리고 얼굴의 권리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얼굴을 공중에게 드러내는 것은 그래서 천부의 권리를 침해받는 일이다. 법학 용어로는 이를 ‘초상권’이라 하는데, 그 용어는 일본에서 비롯했다. 영미법에서는 ‘이름과 외모에 관한 권리’(Name and Likeness Right)라고 부른다. 초상권은 얼굴의 무단 이용에 따른 당혹스럽고 모욕적인 감정을 보호하는 ‘프라이버시권’과 얼굴의 상업적 가치를 보호하는 ‘퍼블리시티권’으로 구분된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저작권법에서 초상권을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한국을 비롯한 나머지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초상권에 대한 명문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대신 판례를 통해 헌법적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미국에서 초상권에 관한 최초의 판례는 1905년 조지아주 대법원에서 나왔다. 보험회사가 무명 화가의 사진을 광고에 무단 이용한 사건이었는데, 보험회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일본은 60년대부터 초상권에 대한 법적 보호가 시작됐다. 1969년 일본 도쿄 최고재판소는 “어느 누구도 본인의 허락이 없는 한 함부로 그 얼굴과 자태를 촬영당하지 아니할 자유를 가지며, 이런 자유를 초상권이라 칭한다”고 판결했다.
국내에서 초상권 관련 판례가 등장한 것은 80년대 후반이다. 1988년 서울민사지법은 “초상권이라 함은 얼굴, 기타 통념상 특정인이라고 식별할 수 있는 신체적 특징에 관하여 이것이 함부로 촬영되어 공표되거나 광고 등에 무단 사용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초상의 인격 가치를 보호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인격권의 일부”라고 판결하면서 헌법 10조의 ‘행복추구권’과 16조의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에 관한 권리’를 근거로 초상권을 헌법적 기본권으로 인정했다.
초상권 침해를 인정하지 않는 예외적 상황이 있다. 본인이 승낙한 경우, 유명인의 경우, 범죄 수사를 위한 경우, 언론 보도를 위한 경우, 집회나 시위 참여자의 경우 등이다. 언론이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 사건 피의자 강아무개씨의 얼굴을 공개한 것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초상권의 가치가 충돌하는 경우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법학)는 “자의건 타의건 공적인 인물이 된 사람의 프라이버시권보다 국민의 알 권리나 보도의 자유와 같은 공익적 가치가 우선한다는 판례 이론이 미국 등에서 형성돼 있다”며 “최근 몇몇 언론이 강씨의 얼굴을 공개한 것은 그런 판례 이론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얼굴 공개를 필요 이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한 개인적 의문이 있다. (공익적 가치보다는) 피의자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의 시민언론센터(CCM)와 하버드 법대 버크먼센터가 합동으로 진행하는 ‘시민 미디어 프로젝트’의 홈페이지에는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권을 존중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미국에서도 표현의 자유는 초상권보다 상위의 가치다. 다만 이때 표현의 자유는 입맛에 따라 선별적으로 적용돼선 안된다는 전제가 있다.
“최근의 사건과 사회적 의제는 물론 과거 사건 및 (그것이 공익의 관심사가 될 만한지에 대한 논쟁이 있을 정도로) 가벼운 주제에 대한 모든 종류의 보도와 논평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적용해야 하며… 이는 온라인상의 개인적인 보도와 논평에도 적용된다.”
네티즌의 글을 유언비어로 폄훼하고 법적 처벌을 선동하던 언론이 범죄자의 얼굴을 공개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런 언론기관은 오랫동안 납 화장을 해왔는데, 화장 뒤편의 맨얼굴에는 시민의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함부로 폄훼했던 역사가 있다. 공포와 분노를 자극해 ‘악마의 형상’을 그려내는 일은 얼굴에 대한 최악의 ‘배타적 구분짓기’다. 얼굴은 그 정도로 가볍지 않다. 단세포동물의 앞 몸통 시절부터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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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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