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8일. 그날은 모든 것이 일사불란했다. 아침 7시30분 청와대 지하벙커(지하별관).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비상경제대책회의’가 처음 열렸다. 이 대통령은 간단한 국민의례를 마친 뒤 곧바로 말문을 열었다. “지금부터 실물경기 침체가 본격화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더욱 치밀하고 선제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모든 부처가 서로 긴밀히 협력해 대응책을 마련해야 효율성이 높아집니다. 그런 점에서 협력도 선제적으로 해야 합니다.” 대통령 말의 핵심은 ‘빨리빨리’였다. ‘속도전’이었다. 비상경제대책회의가 열리는 지하벙커에는 ‘워룸’(war room)이란 별명을 붙인 비상경제상황실이 가동되고 있었다. 지하벙커는 지난 1975년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북한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대형 방공호에서 시작됐다. 위치는 당연히 비밀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대통령은 이곳에 상주하며 전시 상황을 총괄 지휘한다. 대통령이 이런 지하벙커에서 회의를 주재한다는 것은 전시 상황이라는 뜻이 된다. 속도전, 지하벙커 그리고 워룸. 청와대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표면상의 전쟁은 ‘경제전쟁’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현재의 경제 상황을 준전시 상태로 보고, 그만큼 긴박하게 움직이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 전쟁은 경제 상황에만 국한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최근의 이명박 대통령의 말과 청와대의 움직임을 보면.
다시 1월8일. 오전 11시께 박상옥 서울북부 지검장이 법무부에 사표를 냈다. 새해 벽두부터 법무부는 검사장·고검장급 인사들에게 고위직 명퇴 시한(1월15일)에 맞춰 거취를 정하라는 압력을 계속 넣었다. 박 지검장은 검사장급으로는 처음 사표를 낸 것이었다. 대검찰청 관계자는 “검사장급 간부들의 사퇴 도미노가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곧바로 김태현 법무연수원장과 박영수 서울고검장 등 고검장 2명과 이복태 서울동부지검장도 사의를 표명했다는 말이 나왔다. 검찰 관계자들은 설 연휴 전에 핵심 요직인 서울중앙지검장, 법무부 검찰국장,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과 공안부장이 대부분 바뀌는 큰 폭의 인사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입을 모았다.
비슷한 시간 YTN이 정부 고위 관계자의 말을 빌려 어청수 경찰청장이 12일께 사퇴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곧바로 “논의된 바 없다”고 부인했다. 경찰 조직은 술렁거렸다. 경찰의 한 지방청장급 인사는 “어청수 청장이 지난해 말 치안정감과 치안감, 경무관급 고위 간부에 대한 인사안을 청와대에 올렸는데, 청와대가 별다른 이유 없이 반려했다”며 “청와대에서는 어청수 청장 후임 체제에서 대대적인 간부급 인사를 하겠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어청수 청장의 교체와는 무관하게 경찰에서도 검찰과 유사한 대대적인 인사가 있을 것이란 말이 돈다”고 덧붙였다.
검찰과 경찰에 대한 큰 폭의 인사는 권력·사정기관의 대대적인 쇄신을 뜻한다. 이들 기관에 대한 정권의 장악력을 한 단계 더 높이는 작업으로 읽힌다. 전쟁으로 치면, 군대의 전열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셈이다.
경제 명분으로 이념 공세 의도이명박 대통령은 1월5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대한상공회의소 신년인사회에서 “경제위기의 역풍을 나라의 근본 체질을 바꾸는 개혁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바꾸려는 나라의 ‘근본 체질’은 경제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12월22일 “(국가 정체성 훼손이) 깊고 넓은 상황”이라며 “이러한 국가 정체성 문제는 지난 10년에 (원인이) 있는 부분도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제 대한민국은 확고한 국가 정체성을 기초로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다음날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이 대통령이 말하는 국가 정체성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라고 말했다. 이동관 대변인은 국가 정체성 확립 방안에 대해 “이를테면 좌편향됐던 역사 교과서의 제자리 찾기나 ‘법치가 존중되는 사회’ 등이 있겠다”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의 ‘국가 정체성 확립’ 발언은, 경제위기를 계기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적인 영역을 보수 우위의 구조로 만들겠다는 뜻이 포함돼 있었다. 이 대변인은 “그동안 대통령은 국가 정체성 발언과 유사한 말씀을 여러 차례 했었다”며 “특히 한나라당에 있는 분들을 만나면 편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대통령의) 평소 생각을 말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수단은 ‘법’이다. 전쟁으로 치면 무기다. 한나라당이 85개 법안의 일괄 처리를 계속 시도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박형준 청와대 홍보기획관은 1월5일 CBS와의 인터뷰에서 “(한나라당이 처리하려고 한) 85개 법안이 원래 정부가 제출했던 법안 전체가 아니”라며 “당에서 추리고 추려서 85개 법안을 최종 통과될 법안으로 상정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박 홍보기획관은 “최소한 85개 정도는 통과돼야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청와대는 지난 연말까지 이 법들이 통과되기를 원했다”는 진심도 털어놨다. 그는“지금 주요 법안들이 다 국회에 계류 중인데, 이 법안들이 통과가 안 되면 저희가 계획했던 속도를 내기가 어렵고, 위기를 극복하는 데도 큰 장애가 조성되지 않을 수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단독 처리 부담 없을 것으로 오판85개 법안의 핵심에는 방송법 등 7대 언론관계법과 민주당에서 이른바 ‘MB악법’으로 명명한 법들이 자리잡고 있다. 통신비밀법 개정안(이동통신사를 통한 도청 허용 등)과 국정원의 기능을 대폭 강화한 국정원법, 마스크처벌법(집시법 개정안)과 사이버모욕죄(형법 개정안) 등이다. 여당에서는 이들 법안을 ‘사회개혁 법안’이라고 부른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12월31일 이전에 이들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되기를 원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이명박 대통령은 한나라당 단독으로 직권상정해서 처리해도 부담이 없다고 생각한 것으로 안다”며 “민주당이 한-미 FTA 비준안 저지 과정에서 보인 폭력적인 모습을 보고, 이후 국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충돌에 대한 책임은 민주당으로 돌아갈 것으로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법안들의 일괄 직권상정을 거부하는 김형오 국회의장과 민주당과의 협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홍준표 원내대표에게 청와대의 압력이 쏟아진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홍준표 원내대표가 지난해 12월 중순께 기자들에게 경제 관련 법안과 이념 법안을 분리해서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적이 있다”며 “이명박 대통령이 이 사실을 보고받고 ‘이런 법안 저런 법안이 어디 있느냐’고 반공개적으로 일괄 처리를 요구한 것”이라고 전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12월31일을 고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청와대가 12월31일에 집착한 이유는 단순하다. 각종 법안들을 부정적 논란의 소지가 있더라도 2008년에 종결시키고, 2009년부터는 새로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라며 “2009년 초반도 국회에서 충돌하다 보낼 경우 국정 전반의 흐름을 놓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올해 2~3월은 이명박 정부에는 불안한 시기가 될 수밖에 없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을 통해 “내년 봄에 대규모 군중시위가 벌어지는 일은 그 누구도 막기는 어려울 듯하며, 정권이 하기에 따라 겨울이 채 가기 전에 그런 사태가 도래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대규모 군중이 인터넷으로 조직되고, 이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사이버 공간의 통제(사이버모욕죄)와 집회·시위의 자유를 제한할 필요(마스크처벌법)가 있었다. 이 무기를 가지고 현장에서 불만스런 대중을 진압해야 하는 것이 검찰과 경찰의 역할이다.
칼끝은 여의도를 향할 수도 있다. 친이계의 다른 의원은 “이명박 정부가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기회는 2009년 한 해뿐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10년에는 5월 지방선거와 한나라당의 전당대회가 있다. 임기 2년3개월째에 맞는 지방선거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을 띤다. 노무현 정부는 지방선거에서 지기 시작하면서 재·보선 전패라는 치욕 속에 급격히 레임덕에 빠져들었다. 이명박 정부도 지방선거에서 패배하면 정국의 주도권은 박근혜 전 대표에게 급격히 쏠릴 수밖에 없게 된다는 설명이다.
친이계의 한 초선 의원은 “국민들이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하고, 한나라당까지 원내 다수당을 만들어준 것은 이명박식 개혁을 한번 해보라는 뜻”이라며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남은 4년의 국정운영 전권을 행사하고 4년 뒤에 국민의 심판을 받으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야당 의원들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뒤에서 팔짱 끼고 있는 친박계 의원들을 겨냥한 말로도 들렸다.
이동통신사를 통한 합법적인 도·감청(통신비밀법 개정안)이 가능해지고, 국정원의 감찰 기능이 대폭 강화되면 여당에 대한 정권의 장악력도 높아질 수 있다. 이 법안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발하는 것은 민주당 등 야당이지만, 긴장해야 할 것은 여당 의원들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홍준표 원내대표는 지난해 11월께 일부 기자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올해(2008년)까지는 전 정권 비리가 터지지만 내년(2009년)부터 2년은 현 정권 비리가 터질 것이다. 한나라당이 다시 집권하려면 보수를 대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법무장관에게 가서 보수와 정치권을 한꺼번에 대개혁하려 한다.” 홍준표 원내대표는 한나라당 관련 비리가 터질 때마다 “권력형 비리가 더 있을 것”이라는 말을 거듭해왔다. 권력형 비리를 감지하고 증거를 모으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 합법적인 도·감청일 것이다. 청와대와 여당 지도부가 의원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수단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채찍일 수도 있다.
청와대로서는 2월이 가기 전에 이들 입법이 완료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그런 바람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변하지 않는 일방주의 때문이다.
내부 반성없이 다시 밀어붙이기친박계에 속하는 한 의원은 “이번 입법 전쟁은 청와대가 강행하고 친이계 의원들이 지원사격을 했지만, 결국 실패하면서 대통령의 모든 권위가 추락했다”며 “대야 관계나 대국민 관계뿐만 아니라 당내 관계에서도 결정적으로 권위가 떨어져버렸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은 “이번 국회 파행은 지난해 정국을 뒤흔들었던 쇠고기 파동과 발생 원인이 본질적으로 같다”며 “상대방에 대한 설명과 설득을 생략하고 일방적으로 결정한 뒤 밀어붙인 것이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말했다. 친이계 내부에서도 조심스런 비판이 나온다. 친이계에 속하는 한나라당의 한 초선 의원은 “청와대는 85개 법안만 통과되면 세상을 다 바꿀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며 “세상을 바꾸려면 먼저 사회 통합과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정치학 박사)은 “마키아벨리는 에서 군주는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아야 하지만, 사랑받지 못한다면 사람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썼다”며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이명박 정부로서는 대중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을 집권 2년차의 전략으로 세운 셈”이라고 말했다. 박상훈 주간은 “문제는 이명박 정부가 계속되는 권위의 추락으로 국민의 무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라며 “국민은 이명박 정부를 겁내지 않고 있다”고 분석했다.
1월8일의 마지막 뉴스는 검찰이 인터넷 경제논객 ‘미네르바’를 긴급체포했다는 소식이었다. 혐의는 허위사실 유포였다. 김유정 민주당 대변인은 곧바로 “검찰의 ‘미네르바’ 체포는 청와대 지하벙커에 마련된 비상경제상황실 워룸의 첫 작품”이라고 비꼬았다. 진보신당의 이지안 부대변인도 “경제위기 예측이 유언비어와 허위사실 유포라면, ‘정치인’의 유언비어는 왜 처벌하지 않는가”라며 “이명박 대통령의 장밋빛 거짓말 ‘747’공약도 처벌 대상인가”라고 비판했다. 이명박 정부의 권위가 또 한 번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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