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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 사정 기업들 “언프렌들리 MB”

[비즈니스 언프렌들리②] 전 정권 관련기업은 샅샅이, 현 정권 관련 기업엔 시늉만
등록 2008-10-17 07:56 수정 2020-05-02 19:25

“친기업 정부라고 하더니, 오히려 ‘비즈니스 언프렌들리 정부’다. 지금처럼 표적 사정을 하면 정치권 눈치를 안 볼 기업이 몇 개나 되겠나. 앞으로 청와대와 한나라당에 정치자금 가져다주기 위해 줄을 설 게다. 그나마 이전 정부에선 정치권 눈치는 안 봤는데, 이 정부에선 기업들이 정치권에 알아서 기어야 할 것 같다.”
한 대기업 임원의 말이다. 술에 취한 그의 말투는 다소 격했지만, ‘기업 프렌들리’를 들고 나온 현 정부에 대한 배신감이 묻어 나왔다.
검찰은 물론 국세청까지 동원한 ‘표적 사정’이 이어지고 있다. 검찰의 압수수색과 소환조사가 줄을 잇고 있다. 기업들 안팎에선 ‘좌파정권 10년’을 손보기 위한 수사란 얘기가 나돈다. 수사 방향은 물론 그 범위와 대상까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분위기다. 검찰과 국세청이 건드리는 기업마다 대부분 지난 정권과 연관이 있거나 특정 지역에서 성장한 기업들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기본적으로 관련 첩보에 의해 수사를 할 뿐 특정 기업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 기왕에 제기된 의혹들을 확인하는 과정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서울중앙지검 수사관들이 9월17일 서울 중구 태평로 엔디코프 사무실에서 압수한 종이박스를 밖으로 꺼내고 있다. 한겨레 김종수 기자

서울중앙지검 수사관들이 9월17일 서울 중구 태평로 엔디코프 사무실에서 압수한 종이박스를 밖으로 꺼내고 있다. 한겨레 김종수 기자

청와대 관계자 “투서 쏟아져 내년 초까지 사정”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표적 사정이란 표현에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지난 정부와 관련된 기업이나 기업인들을 고발하는 투서와 제보가 청와대는 물론 대검 범죄정보담당관실 등 사정기관 쪽에 수도 없이 쏟아지고 있다”며 “사정기관의 특성상 이를 외면할 수도 없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이 관계자는 “현재 분위기로 보면 내년 초까지 사정이 계속될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진행 중인 KFT와 KT에 대한 수사도 청와대와 대검 범죄정보담당관실에 쏟아진 투서 때문에 시작됐다고 한다.

기업비리, 특히 공기업 비리는 철저한 수사를 통해 밝혀야 한다. 문제는 형평성이다. 업계에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관련된 기업의 의혹에 대해서는 수사하는 시늉만 하는 반면, 어떤 기업에는 현미경을 들이댄다는 볼멘소리를 한다. 검찰이 현미경을 들이대는 것으로 보이는 기업들은 이전 정권에서 ‘대어를 낚은’ 업체나, 성장세가 유난히 두드러졌던 곳들이다.

공적자금으로 회생시킨 대우건설·동아건설 등의 ‘월척’을 LBO(자금 차입에 의한 기업 인수) 방식으로 인수·합병한 기업들은 이미 사정당국의 칼 아래 놓여 있다. 대우건설을 인수한 곳은 재계 순위 8위인 금호아시아나그룹이다. 대검 중앙수사부는 지난 7~8월 금호아시아나의 공시 및 회계자료 등을 정밀 검증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2006년 12월 금호아시아나가 대우건설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정권 차원의 특혜나 비리 의혹은 없는지 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검찰은 지난 9월2일 프라임그룹을 압수수색했다. 프라임그룹도 노무현 정부 때 동아건설을 인수하는 등 급성장세를 보였다. 금호아시아나그룹과 프라임그룹은 모두 호남권을 배경으로 성장한 회사이기도 하다. 이 중 프라임그룹은 공격적인 인수·합병으로 20여 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기업이 됐다. 백종헌 프라임산업 회장은 참여정부 실세인 이아무개씨와 절친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근 백 회장의 동생인 백종진 벤처산업협회장은 회사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체포됐다.

“소명 부족” 세 차례나 영장 기각

검찰은 10월3일에는 강원랜드, 4일에는 애경백화점과 산업은행 등에 대해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벌였다. 강원랜드의 경우 열병합발전 설비 공사비가 부풀려졌고, 이 중 수십억원이 정·관계에 비자금으로 흘러들었다는 의혹이 수사 대상이다. 여기서도 민주당 소속 이아무개·김아무개 의원 등 전 정권 실세 이름들이 오르내린다.

검찰의 이런 의욕적인 수사가 얼마나 성과를 낼지는 아직 모른다. 검찰은 지난 6월 한국교원공제회 김평수 전 이사장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프라임그룹 계열사인 프라임엔터테인먼트의 비자금 조성에 연관됐다는 의혹이 있다고 했다. 애초 김 전 이사장은 공제회 돈으로 2006년 2월 프라임엔터테인먼트의 주식 240만 주를 93억원에 사들였다가 14억원을 받고 되팔아 약 79억원의 손실을 공제회에 입힌 혐의(배임)를 받았다. 법원은 영장을 기각했다. 검찰은 10월1일과 6일 두 차례에 걸쳐 김 전 이사장이 실버타운에 무리하게 투자했다가 수백억원의 손실을 냈다며 다시 영장을 청구했다. 이번에도 다 기각됐다. 영장 청구 때마다 법원은 “범죄 사실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고 밝혔다.

올 초 검찰이 의욕적으로 진행한 공기업 수사는 모두 ‘의혹 제기’ 수준에서 끝났다. 한국관광공사·대한석탄공사·한국증권선물거래소 등에 대한 수사에서도 전 정권 실세 연루설이 파다했지만, 검찰의 잇단 압수수색과 수사에도 거물은 건져내지 못했다. 부장급 실무진 처벌 선에서 끝났다.

조영주 전 KTF 사장의 수뢰 혐의에 대한 검찰 수사도 제 속도를 내지 못하는 모습이다. 수사 초반부터 조 전 사장이 돈을 줬다는 전 정권 실세 이름이 거론됐지만, 검찰은 아직 확증을 잡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조 전 사장이 이강철 전 청와대 수석과 골프를 자주 쳤다는 정도의 의혹만 나왔다. 이 때문에 검찰이 의혹을 품은 만큼의 비리가 없든가, 현 여권 실세들까지 대거 연루돼 있어 검찰이 수사를 덮으려 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검찰은 남중수 KT 사장도 출국금지하고 본격적인 수사를 펼치고 있다.

검찰과 경찰이 마치 경쟁하듯 기업 수사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경찰은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진이 대형 공사 발주에 외압을 행사했다는 단서를 잡고 홍경태 전 청와대 총무행정관의 구속영장을 신청하기도 했다.

기업들은 대놓고 말은 못하고 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는다. ‘강 건너 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대기업 부장은 “경기도 안 좋은데 무차별 사정으로 기업 경영의 발목을 잡고 있다. ‘아니면 말고식’의 검찰 수사는 기업 대외신인도나 투자에 타격을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검찰의 기업 압수수색 일지

검찰의 기업 압수수색 일지

부산고 출신으로 노 전 대통령과 막역

국세청도 사정 정국에서 한몫하고 있다. 국세청은 이전 정부 후원자들에 대한 세무조사를 벌이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허리 수술로 화제를 모았던 ‘우리들병원’이 대표적이다. 서울지방국세청은 지난 8월28일부터 우리들의료재단에 대해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지방국세청 직원 60여 명이 들이닥쳐 2003년부터 2007년까지의 장부를 가져갔다.

이번 조사는 일반적인 병원 세무조사와 차이를 보인다. 대기업 상대 기획 조사를 담당하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이 투입됐기 때문이다. 부산·대구 등 전국 지방국세청의 ‘특명조사국’까지 한꺼번에 참여시켰다. 국세청 쪽은 “1999년 이후 처음 하는 정기 세무조사”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우리들병원 창립자인 이상호 우리들의료재단 이사장은 부산고등학교 출신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오래전부터 막역한 사이다. 1980년대 노 전 대통령은 이 병원의 고문변호사로 활동했다. 우리들병원은 부산에서 시작한 척추 전문병원으로, 지난 2003년 초 노 전 대통령의 허리 수술을 맡으면서 유명해졌다. 우리들병원은 그 이후 잇달아 기업을 인수했다. 현재 17개 관계사를 거느린 우리들의료재단으로 성장했다. 우리들병원은 지난 2003년 계열사인 아스텍창투를 통해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에게 1억9천만원을 건넨 사실이 드러나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아스텍창투는 지난 2000년 말까지 노 전 대통령이 운영했던 ‘장수천’ 주식 1천만원어치를 보유한 적이 있다.

10월10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국세청 국정감사에서도 우리들병원에 대한 특별 세무조사가 노무현 정부에 대한 정치보복성 표적조사가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종률 민주당 의원은 “서울국세청이 지난 8월부터 조사4국 직원 60명을 투입해 우리들병원과 계열사에 대해 강도 높은 특별 세무조사를 벌였는데, 이는 정치보복성 표적조사 성격이 짙다”고 지적했다. 김 의원은 “보통 의료기관에 문제가 있으면 보건복지가족부가 실사를 하거나 세무조사가 필요할 경우라도 특정 의료기관이 아니라 몇 군데를 묶어서 조사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우리들병원은 특별 케이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갑순 서울국세청장은 “세금을 탈루해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가 있다”며 “문제가 있는 병원과 기업에 대한 통상적인 세무조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국세청은 최근 노 전 대통령 후원자인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운영하는 회사 2곳에 대해서도 세무조사를 벌이고 있다. 국세청의 세무조사와 함께 검찰도 박 회장이 국내외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비자금을 조성했는지 조사하고 있다. 또 태광실업이 특혜로 농협 자회사인 휴켐스를 헐값에 매입한 의혹도 수사선상에 올려놓고 있다.

검찰은 8월 말 이후 일사불란하게 지난 정권과 관련된 기업들에 사정의 칼날을 겨누고 있지만, 이명박 대통령과 관련된 기업들에 대한 수사는 지지부진하다.

효성그룹의 불법 비자금 조성 의혹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9월29일 최근 관련자들을 불러 조사했다고 밝혔다. 의혹 제기 7개월 만이다. 지난 1월 국가청렴위원회는 효성그룹의 내부 고발자를 통해 효성물산 일본 법인이 2000년께 수입 부품 납품단가를 부풀리는 방식으로 수백억원을 횡령했다는 제보를 입수해 이를 검찰에 통보했다. 1990년대 말 일본 현지법인을 통해 비자금 200억~300억원을 조성했다는 것이 의혹의 뼈대다.

민주당 의원들이 6월20일 한상률 국세청장을 만나 한국방송과 인터넷 포털업체 다음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에 항의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민주당 의원들이 6월20일 한상률 국세청장을 만나 한국방송과 인터넷 포털업체 다음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에 항의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MB 사돈 기업 효성 수사는 지지부진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사돈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셋째 사위 조현범 한국타이어 부사장이 조석래 회장의 조카다.

조현범 부사장도 주가조작 개입 의혹으로 검찰의 수사 대상에 들어 있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1부는 지난 9월17일 재벌 2·3세들이 주가를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엔디코프와 코디너스 본사 2곳을 압수수색했다. 조 부사장은 코디너스 제3자 유상증자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금융감독원의 제지로 무산된 바 있다. 이 대통령 부인인 김윤옥씨는 청와대에서 열린 여기자들과 오찬에서 셋째 사위 조 부사장에 대한 질문을 받고 “사위를 믿는다”고 말했다. 국민들은 과연 누구를 믿을까?

뉴욕 다우지수가 8500선으로 몰락한 10월10일. 코스피 지수도 전일 대비 53.42포인트(4.13%) 내린 1241.47에 마감됐다. 하지만 원-달러 환율은 이틀 연속 떨어졌다. 이날 외환시장은 일중 변동폭이 무려 235원이나 되는 등 롤러코스터 장세를 탔다. 외환위기 당시인 1997년 12월30일 495원 등락한 뒤 10년10개월 만에 최대 변동폭이다. 환율 하락을 주도한 것은 대기업들이다. 8일 대기업들의 ‘달러 사재기’를 비판한 이명박 대통령 발언이 나오자 삼성전자는 9일부터 상당한 물량을 외환시장에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에 이어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대기업들도 10일 달러 매도를 주도했다. 환율이야 하락했지만, 기업의 팔목을 비틀어 달러를 매도하게 한 것은 ‘비즈니스 프렌들리’와는 한참 먼 정책이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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