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화 시대에는 IT(정보기술) 접하는 사람은 소득이 높고 접하지 못하는 쪽은 소득이 낮기 때문에 소득 격차가 벌어집니다. IT 기술은 일자리를 계속 줄였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9월9일 ‘국민과의 대화’ 도중 이렇게 말했다. ‘녹색성장’에 대한 소신을 밝히다가 나온 말이다. ‘정보화는 소득의 불균형을 확산시키고 일자리를 줄였다 → 녹색화는 소득 균등화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것이다 → 일자리는 3배가 더 늘어날 것이다.’ 대통령의 결론이었다.
이용운(40·가명)씨는 그 방송을 보다가 맥이 탁 풀렸다. 그는 중견 소프트웨어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 직전에 한 공기업에서 계약까지 끝난 프로젝트를 취소하자고 해서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공기업과의 주계약자는 외국계 컨설팅 회사였지만, 우리 회사도 소프트웨어를 납품할 예정이었다. 결국 그 프로젝트는 취소됐다. 아직도 눈앞이 캄캄하다.”
계약을 파기한 공기업은 외국계 기업 쪽에 관련 사실 일체를 대외비로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대외 신인도 하락을 염려한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뭘까. 정부는 올해 공기업 예산을 10%씩 일괄적으로 삭감하라고 지시했다. 경제 살리기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 방침에 따라야 하는 공기업들이 가장 많이 ‘칼질’한 예산이 IT 쪽이라고 IT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국내 IT 업계는 최악의 빙하기를 예고하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에, 정부와 공기업의 홀대까지 겹친다. ‘일자리 창출’이 지상 과제인 이명박 정부에서 ‘일자리 축소’의 주범으로 찍혔으니 두말할 나위 없다.
정부의 ‘IT 줄이기’는 내년 예산 편성에서도 확연하다. 행정안전부가 올해 기획재정부에 올린 내년 정보화 예산안은 2300억원. 이 중 1052억원만 확정됐다. 절반 이하다. 올해 예산인 1450억원에 비해서도 27%나 줄었다. 특히 김대중 정부 시절 시작된 ‘전자정부’ 사업 등 마무리 사업뿐이다. 신규사업 예산은 ‘0’이다.
한 대기업의 IT 계열사에서 일하는 고동우 차장은 “정부의 공공 정보화 프로젝트는 정부가 정책적으로 중견 벤처기업들을 육성해 온 일종의 자양분이었다”며 “경기침체로 민간기업들이 앞다퉈 IT 예산을 삭감하는 상황에서 정부 프로젝트도 줄어 내년에는 벤처업체들의 줄도산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도미노는 이미 넘어지기 시작했다. 중소규모 벤처들의 연합체인 한국콘텐츠산업연합회 최동진 사무총장은 “올해 들어 협회 산하 이사회에 소속돼 있던 큰 규모의 회사 중 1곳이 폐업을 했고 2곳이 흡수 합병됐다”며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일반 회원사들은 20% 가까이 폐업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국콘텐츠산업연합회에 소속된 업체가 200곳이 넘는 것을 감안하면 40곳에 가까운 업체들이 문을 닫았다는 추산이다. 최 사무총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의 벤처 육성 의지가 지난 정부부터 약해지다가, 현 정부에서는 정부 조직(정보통신부) 자체가 없어졌다”며 “현재로서는 벤처를 창업하거나 계속할 동기부여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정책으로도 확인된다. 시스템통합(SI) 업계의 한 임원은 “올해 지식경제부에서 발표한 ‘뉴 IT 정책’을 보면, 기존 사업과 IT의 융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정보기술 자체에 대한 정책은 사실상 없다”며 “이는 기존 산업의 정보기술화로, 굳이 정보기술 쪽 사업으로 발표하지 않아도 이미 각각의 산업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들”이라고 말했다. ‘뉴 IT 정책’ 내용을 보면, 독자적인 원천기술을 개발하기보다는 조선산업과 IT 기술을 융합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식이다. 이런 식의 개발은 이미 이번 세기 초반부터 산업계의 대세가 돼 있다. 이른바 ‘자동차 정보화’라고 표현할 수 있는 텔레매틱스가 대표적이다.
여당 주류도 IT 독립 육성에 부정적이는 한나라당 주류의 생각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친이’ 의원으로 꼽히는 공성진 의원은 지난 5월 정보통신 쪽 인사들이 주최한 포럼에 연사로 참여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반도이기 때문에 원천기술 확보보다 융합이나 복합된 기술에 더 관심을 갖는 게 좋다. IT 강국이 된 우리나라는 이젠 IT 및 소프트웨어를 일부 특정 분야로 한정시켜 별도의 산업으로 육성한다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원천기술이 없으면 종속된다. 한국의 IT 산업이 고용을 촉진하는 효과가 적었던 근본 이유는 원천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품은 일본에서 사오고, 로열티는 미국에 지급했다. 남는 돈이 없는데 어떻게 고용을 늘릴 것인가.
한국은 그동안 IT 산업 육성에 많은 정부 예산을 쏟아왔다. 그 결과 한국의 수출 총액에서 IT 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은 40%에 가깝다. 지난해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 비중도 16.9%를 차지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IT 아웃룩 2006’ 보고서를 보면, 전체 회원국 중 IT 산업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가 한국이다. 이런 상황에 조만간 변화가 올 수도 있다. 정부의 지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지난 8월12일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열린 회의에서 IT 관련 연구개발 예산을 대폭 줄였다. 전자정보통신미디어 사업 예산은 ‘투자 대폭 축소 등급’을 받아 올해 903억원에서 596억원으로 졸아들었다. 소프트웨어·컴퓨팅 예산은 ‘투자 축소 등급’을 받아 1418억원에서 1198억원으로 줄었다.
수출총액서 40% 가까운 비중 차지지식경제부가 지난 9월에 선정한 ‘신산업성장동력’에서 인터넷 비즈니스 등이 제외된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인터넷 산업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계속 된서리만 맞고 있다. 검찰은 10월7일 NHN과 다음커뮤니케이션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혐의는 저작권 침해 방조. 지난 7월 한국음악저작권협회가 NHN과 다음 등 포털이 음악 저작권 위반을 방조했다며 검찰에 포털 업체들을 고발했다. 이 덕분에 다음커뮤니케이션은 ‘4관왕’을 차지했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조사는 다 받고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그간의 일지를 보자. 공정거래위원회의 불공정 거래행위 조사(5월) → 서울지방국세청의 일반 세무조사(5월) → 국세청 특별 세무조사로 변경(6월) → 특별 세무조사 연장(7월) → 국세청 40억원 추징금 부과(8월) → 방송통신위원회의 개인정보 법령준수 여부 실태조사(9월) → 검찰의 본사 압수수색(10월).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각종 제재에 시달린 꼴이다.
인터넷 업체들의 시련은 지금부터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이번 정기국회에 강화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냈다. 그중 불법 정보에 대한 ‘모니터링 의무화’ 조항이 가장 논란이다. 이 법이 내년부터 시행되면 인터넷 업체들은 게시물이나 댓글의 불법성을 일일이 감시해야 한다. 불법성이 의심되면 30일간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막아두는 ‘임시 조처’를 해야 한다. 아니면 사후에 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문제는 인터넷 업체의 시련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가해질 수 있는 광범위한 사적 검열이다. 포털 업체의 한 관계자는 “그 법이 그대로 시행되면 업체들은 정치적으로 민감하거나 쌍방 간의 분쟁이 벌어질 것으로 보이는 글은 우선 무조건 차단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솔직히 힘있는 정부나 기관, 단체가 문제를 제기하면 임시 조처부터 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이미 경찰은 지난 5월 어청수 경찰청장 동생의 성매매 유흥업소 관여 의혹를 다룬 뉴스 동영상 게시물을 삭제해달라고 국내외 포털에 일제히 요청했다. 포털들은 이를 받아들여 게시물을 죄다 삭제했다. 대검찰청도 네이버 등 5개 포털 업체에 임채진 검찰총장을 ‘떡값 검사’로 표현한 글들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이들은 이렇게 ‘불법 게시물’이 아닌 ‘불편한 게시물’에도 칼을 휘둘렀다.
포털 게시물 삭제 외압 빈발힘있는 자와 힘없는 자의 분쟁에서 사업자가 판단 근거가 없을 때는 우선 힘있는 자의 편을 들 수밖에 없게 된다. 지난 8월14일 다음과 네이버 등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는 이랜드 파업 관련 게시물 수십 건이 한꺼번에 접근이 차단되는 임시 조처를 당했다. 이들 게시물이 회사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주)이랜드월드의 일방적인 주장에 따라 네이버와 다음이 취한 조치였다. 이랜드 노조와 문화연대, 인권단체연석회의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일제히 항의했다. 게시물은 일주일 뒤에야 정상화됐다. 다음을 사용하는 누리꾼 ‘일감 만들지 말자’도 10월9일 오후 잇따라 아이디 접근 제한을 당했다. 그는 “다른 포털에 있는 촛불문화제 관련 글들을 계속 퍼나르고 있는데, 이날 오후부터 계속 글쓰기가 차단됐다”며 “상담원에게 항의했더니 욕설이 들어간 단어를 썼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나는 욕설을 쓴 적이 없다”고 억울해했다.
인터넷 업계도 이것이 자신들을 서서히 죽이는 독임을 알고 있다. 한 인터넷 업체의 임원은 “의외로 인터넷은 죽이기 쉽다. 이용을 까다롭게 하고 불편하게 하고 불만이 쌓이게 하면 누리꾼들은 곧 외면한다. 우리도 정부가 이런 점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IT 업계는 이렇게 10월에 이른 겨울을 맞고 있다. 아주 추운.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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