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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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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4용지 달랑 3장에 담은 구제금융안으로 금융산업 통째로 국유화 추진
등록 2008-10-03 14:11 수정 2020-05-03 04:25

‘9조7908억8786만7532달러.’
그리니치 표준시간으로 9월26일 새벽 5시15분 현재 미국의 국가채무 액수다. 이를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경1416조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얼마나 큰돈인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보자. 기획재정부가 지난 7월9일 집계해 내놓은 ‘각 부처가 요구하는 2009년도 예산·기금의 총지출 규모’는 올해보다 7.4% 증가한 276조2천여억원이었다. 그러니까 미 연방정부의 빚이 우리나라 내년 예산의 약 41배란 얘기다. 같은 시각 미국의 인구 추정치는 3억479만6105명이다. 미 국민 1인당 3만2122달러가량의 채무를 지고 있는 꼴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 2월 내놓은 자료를 보면, 미국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약 13조7940억달러에 이른다. 국가채무가 GDP의 70%에 육박한다는 뜻이다. 이 수치가 높을수록 ‘채무불이행, 국가 파산’ 가능성이 높다고 보면 된다. 아직은 ‘상환 능력’에 여유가 있다고 판단한 걸까? 미 연방정부가 국가채무를 7천억달러 늘리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최악의 위기로 내몰리고 있는 금융시장 안정화를 위한 ‘구제금융’이란 이름으로.

조지 부시 대통령(왼쪽에서 네 번째)이 9월25일 민주당 출신인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왼쪽에서 세번째)을 비롯한 미 의회 지도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구제금융 법안 통과를 위한 초당적 협력을 역설하고 있다. REUTERS/ JIM YOUNG

조지 부시 대통령(왼쪽에서 네 번째)이 9월25일 민주당 출신인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왼쪽에서 세번째)을 비롯한 미 의회 지도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구제금융 법안 통과를 위한 초당적 협력을 역설하고 있다. REUTERS/ JIM YOUNG

“미국 경제가 중대한 국면을 맞고 있다. 많은 분들이 금융시장과 미래에 대해 우려하고 계실 줄 안다. 증권시장은 세 자릿수 등락을 반복하고 있다. 주요 금융기관이 파산 위기로 내몰리고 있고, 이미 파산한 곳도 있다. 불확실성이 증대되면서 많은 은행이 대출을 제한하고 있다. 신용시장은 냉각됐다. 가계와 기업은 돈 빌릴 곳을 찾기 더욱 어려워졌다. 우리는 지금 심각한 금융위기에 빠져 있다.”

9월24일 밤 9시1분(미국시각)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상기된 얼굴로 백악관 이스트룸에 마련된 연단에 섰다. 백악관이 홈페이지에 올린 동영상을 보면, 12분여 동안 담화문을 읽어가는 동안 부시 대통령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목소리도 가라앉은 채였다. 부시 대통령이 저녁 황금시간대에 경제 문제에 집중해 연설을 한 것은 지난 8년여 임기 동안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이라크전쟁으로 상징되는 외교적 실패에 더해, 임기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경제마저 무너져내렸다. 부시 대통령으로선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어 보인다.

“즉각 대응 안 하면 공황” 협박성 발언

부시 대통령은 위기의 뿌리를 부동산 가격 폭락으로 인한 주택담보대출 관련 금융자산 부실화, 이로 인한 신용경색으로 풀이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미국 경제 전체가 위험에 빠져들었다”고 무

겁게 말했다. 부시 대통령이 ‘위기’의 심각성을 이 정도로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도 처음있는 일이다. 9·11 동시테러 직후의 긴박한 위기감이 배어났다. 그는 이어 “하루가 다르게 불확실성이 높아가고 있다”며 “상황 타개를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느냐, 아니면 일부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전체 금융시장의 안정을 해치게 되는 걸 두고만 보느냐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자유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사람으로서, 처음에는 정부의 직접적 개입에 반대했다. 잘못된 결정을 내린 회사는 파산을 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위기는 일반적인 상황을 뛰어넘는다. 시장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신뢰의 위기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의회가 즉각 대응하지 않으면 금융공황으로 이어질 것이다.” 부시 대통령의 ‘위협성 경고’는 한동안 이어졌다.

사안의 급박성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게다. 증시는 폭락과 급반등을 되풀이하며 요동치고 있다. 이달 초까지도 “미국 경제는 여전히 강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부시 대통령으로선 뒤늦은 위기 인식이 한스러울 터다. 그새 미국 경제는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 신세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헨리 폴슨 재무장관이 구제금융 법안을 내놓은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의회에선 격론이 계속되고 있다. “지나치게 서두르고 있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일부에선 “9·11 동시테러 이후 인권침해 가능성이 높은 애국법을 졸속 처리하고, ‘옥상옥’인 국토안보부를 만들고, 결국 이라크 침공이란 잘못된 결정을 내린 수순과 유사하다”는 비판까지 내놓고 있다.

“미 합중국을 ‘월스트리트인민공화국’쯤으로 만들려는 모양이다.” 미 정가 안팎에선 폴슨 장관이 마련한 구제금융안에 대해 이런 비아냥이 나오고 있다. 패니메이·프레디맥·AIG 등 거대 금융기관을 사실상 ‘국유화’한 데 이어, 아예 대놓고 부실 채권을 정부가 사들이겠다고 나선 발상 자체가 ‘자본주의적이지 않다’는 게다. 더구나 구제금융안이 적절히 작동할 것인지에 대한 확신도 없다. 격한 논쟁을 피하기 어려운 이유다. 더글러스 엘멘도프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9월22일 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린 칼럼에서 구제금융안의 문제점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탐욕에 면죄부 줘 도덕적 해이 조장

엘멘도프 연구원은 우선 부실화한 채권의 복잡성에서 문제를 찾는다. ‘첨단 금융기법’으로 만들어진 복잡다양한 파생금융상품의 특성으로 인해 △어느 정도 규모의 채권을 △어느 금융기관에서 △어느 정도의 가격에 사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조차 명확히 세우기 어렵다는 게다. 매수 대상인 부실 채권에 각각 신용등급을 부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태에서, ‘역경매 방식’이란 구매 선언적인 원칙만 제시된 상태다. 부실 채권을 보유한 금융기관은 결국 보유 채권 가운데 가장 악성인 채권만 정부에 팔려들 게 뻔하다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정말?’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왼쪽)과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9월24일 미하원 금융위원회에 출석해 구제금융 법안에 관한 증언을 하고 있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정말?’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왼쪽)과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9월24일 미하원 금융위원회에 출석해 구제금융 법안에 관한 증언을 하고 있다.

둘째, 최악의 투자 결정을 내린 금융기관이 구제금융 최대의 수혜자가 될 것이란 점도 문제다. 지난해부터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가 본격화하면서 일부 금융기관은 일찌감치 악성 채권을 헐값에 처분해 파국에 대비해왔다. 상대적으로 건실한 투자 결정을 한 이들 금융기관은 이번 구제금융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반면 끝까지 ‘탐욕’에 눈이 멀어 위기를 키운 대형 금융기관들은 막대한 지원을 받게 됐다. 형평성 논란은 물론, 정부가 나서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는 비난 여론이 비등하는 이유다.

셋째, 국민의 세금으로 위험한 ‘투자’를 하면서도 정작 수익이 나면 이를 흡수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다. 패니메이나 프레디맥·AIG 등은 정부가 구제금융의 대가로 지분을 소유함으로써, 시장이 안정화해 주가가 오르면 원금 회수는 물론 ‘수익’까지 낼 가능성도 열어뒀다. 하지만 이번 구제금융안에선 이런 내용은 빠진 채, ‘위험’만 무제한적으로 받아안는 꼴이 됐다. 구제금융법을 논의하는 상하 양원 의원들이 입을 모아 ‘지분 확보 관련 조항 신설’을 요구하고 있는 이유다.

애초 미 재무부가 내놓은 구제금융법안은 A4용지 단 3장 분량이었다. 하지만 요구하는 ‘권한’의 수위는 지나치게 높다. 이를테면, 폴슨 재무장관은 오는 12월까지 미 의회에 보고조차 하지 않아도 된다. 그나마 마련해둔 안전장치라곤 “재무장관이 금융시장의 혼란을 방지하고 안정을 유지하는 한편, 납세자를 보호하기 위한 고려를 해야 한다”는 정도가 고작이다. 이미 2년여 전부터 현 금융위기를 ‘경고’해온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가 와 한 인터뷰에서 “엄청난 권력을 요구하면서도, 부시 대통령은 ‘나를 믿어라, 완벽한 힘을 내주면 제대로 해 보이겠다’고 말하고 있다”며 “절대왕정이나 다를 바 없는 발상”이라고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에서 경제자문위원장을 지낸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 역시 “역사상 이번 구제금융안처럼 규제 조항은 거의 없고 액수는 천문학적인 사례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자본의 첨병들이 자본주의 유린

부시 대통령은 9월25일 구제금융법안 조기 처리를 위한 초당적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비롯한 의회 지도부와 버락 오바마·존 매케인 등 민주·공화 양당 대선 후보까지 참석한 자리였지만, 구제금융법안을 최종 매듭짓지 못했다. 현재로선 7천억달러의 구제금융이 한꺼번에 제공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AP통신〉은 9월26일 바니 프랭크 하원의원(민주당·매사추세츠주) 등의 말을 따 “일단 1500억달러 수준의 긴급자금을 내줘 급한 불을 끄게 한 뒤, 구제금융의 효과를 면밀히 분석해 추가 자금 투입 여부를 결정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고 전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한때 철강산업을 국유화하려 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 파업이라도 벌어져 생산 차질이 생겨선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물론 미 대법원은 이를 가로막았다. …금융시장 관리·감독 노력은 자유시장 경제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고 주장했던 부시 행정부가 무차별 파생금융상품 투자로 AIG가 파산 위협에 처하자 국가적 위기 상황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리처드 닉슨 같은 보수반공 인사였기에 ‘공산 중국’과 대화하는 데 따른 국내적 반발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말이 있다. 만약 진보적 민주당 정권이 주요 금융업체를 국유화했으면, 보수층이 뭐라 했을지 불을 보듯 뻔하다.”

는 지난 9월16일 부시 행정부가 구제금융을 통해 AIG의 지분 79.9%를 확보하자 “21세기형 사회주의”라고 비꼬았다. 루기 징갈리스 미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교수도 인터넷매체 와 한 인터뷰에서 “구제금융안은 미국 금융산업 전체를 사실상 국영기업화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극소수 금융인들의 이득을 위해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본적인 작동 원리를 침해하고 있는 지금, 자본가로부터 자본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투기자본에 날개를 달아준 신자유주의, 시장 숭배의 뒤안길에서 자본주의가 위협을 받고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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