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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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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자통법 짝사랑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여전히 부르짖는 ‘동북아 금융 허브’…
통제 안 되는 금융재벌 키울 위험 커
등록 2008-10-02 17:08 수정 2020-05-03 04:25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자는 ‘소박한’ 주장에도 청와대와 여당은 귀를 막고 있는 듯하다. 세계 자본시장을 수십 년간 호령하던 월가의 5대 투자은행 중 3곳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뒤인데도 말이다. 바로 그 투자은행들을 발전 모델로 삼은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을 밀어붙이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용감한 짝사랑’은 전세계의 관심을 살 만한 사건일 게다. 지금은 메릴린치, 리먼브러더스 등 실물경제와 무관한 돈놀음에 몰두하던 외눈박이 거인들이 도덕적·재무적 파산을 맞았고, 미국 본토에서마저 ‘국가 규율의 귀환’이 환영받는 때가 아닌가.

9월13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거시경제 정책협의회에서 주요 참석자들이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을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 김현태

9월13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거시경제 정책협의회에서 주요 참석자들이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을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 김현태

“방화벽 허무는 것” 여당 내에서도 반론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미약한 반성의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종구 한나라당 의원은 9월22일 “공매도 금지, 금융감독기관의 정보 공개 확대, 증권사의 소액결제 금지 등의 내용을 담은 자본시장통합법 개정안을 이달 안에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파생상품들이 복잡하게 연결돼 ‘독’이 어디까지 퍼졌는지 알 수 없는” 미국 금융시장의 사례에 견줘보면 “앞으로 시행될 자본시장통합법은 업종간 ‘방화벽’을 허물어 금융시장의 안전성을 침해할 위험이 크다”는 게 이 의원의 생각이다.

한나라당 내부의 대표적인 경제정책통인 이한구 의원도 “금융회사에서 새로운 파생상품을 금융감독 당국에 신고할 때, 그 자산이 다른 파생상품에서 비롯되는지 또는 자체 신용을 가지고 있는지 등을 적시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종구 의원이 자통법 체제 자체를 문제 삼는다면, 이한구 의원은 시행령 개정 등을 통한 보완을 주장한 셈이다. 조윤선·김성식·배영식 의원 등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의원들도 금융감독 기능의 강화와 파생상품 규제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은 이런 한나라당 내부의 흐름에도 금융규제 완화 방침을 바꿀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지난 9월20일 오전 청와대에서는 금융관계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금융 상황 점검을 위한 조찬모임이 열렸다.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HSBC은행의 외환은행 인수협상 결렬은) 정부가 신속한 결정을 하지 못해 실기한 측면이 있다”면서 “상황에 앞질러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국회에 제출된 금산분리 완화 법안 등 규제개혁 법안들이 신속히 처리되도록 당정 간 협조하고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신속히 행동으로 옮기라”고 말했다.

홍콩 3위·싱가포르 4위인 금융지수, 한국 40위권

사흘 뒤 기자들과 만난 청와대의 한 핵심 관계자도 “최근 미국 금융시장 불안에 대해 ‘신자유주의 파탄’이라는 해석이 있으나 이는 지나친 단순화”라며 “교각살우하는 것은 세계적 추세와도 다르고, 최근 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을 투자은행에 돌리는 것은 지나치다”라고 말했다. 금융규제 완화 방침에 변화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못박은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9월20일 청와대에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대통령 왼쪽 첫 번째),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대통령 왼쪽 두번째) 등 경제부처 수장들을 불러모아 금융상황 점검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명박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9월20일 청와대에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대통령 왼쪽 첫 번째),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대통령 왼쪽 두번째) 등 경제부처 수장들을 불러모아 금융상황 점검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참여정부의 유산이라면 무엇이든 거부하는 이명박 정부가 참여정부 때 입안해 통과된 자통법을 금과옥조처럼 받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전창환 한신대 교수(국제경제학)는 이런 사태를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금융화’라는 명제 속에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이때 금융화는 △예금과 대출업무 위주인 상업은행의 역할 감소 △주식·채권·파생금융상품 등이 거래되는 자본시장의 중요성 강조 △증권사·자산운용사·투자자문사·뮤추얼펀드 등 자본시장 중개자의 경제·사회 전체에 대한 지배력 강화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지속적으로 확대돼온 이런 신자유주의적 금융화는 ‘747’로 표상되는 이명박 정부의 성장지상주의 경제정책과 맥이 닿게 된다. 실제 새 정부 출범 뒤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7% 성장 능력을 갖춘 경제 전략’을 보면, ‘금융의 글로벌 스탠더드화’가 지속 성장을 위한 전략으로, ‘외환 자유화 계획의 조기 이행’과 ‘자유무역협정(FTA)의 확대’ 등이 신성장 동력 확충을 위한 전략 요소로 제시돼 있다.

제조업 대신 동북아 금융 중심의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고도 경제성장을 이루겠다는 금융 엘리트들의 신자유주의적 프로젝트의 일차적 문제는 이것이 냉철한 현실 인식에 바탕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둔 금융전문기관 런던시티공사에서 발표하는 국제금융센터지수(GFCI)를 살펴보자. 각 도시의 국제 금융센터로서의 경쟁력을 계측한 이 지수는 2007년 3월과 9월, 그리고 올해 3월에 각각 발표됐는데, 한국은 42~53위권에 머물고 있다. 반면 홍콩과 싱가포르는 런던·뉴욕의 뒤를 이어 3위와 4위 자리를 굳게 지켰고, 중국 상하이나 일본 오사카 같은 도시들도 한국보다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서울은 도무지 자신을 경쟁 상대로 생각하지 않는 국가들과 ‘동북아 금융허브’를 놓고 다투고 있는 셈이다.

“기본 인프라 구축부터”

자통법은 증권사나 보험사를 계열사로 갖고 있는 재벌들에 은행업을 허용함으로써 이들의 경제지배력을 더욱 키워줄 우려가 크다. 또 투자자 보호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뿐만 아니라 기업경영 투명성도 선진국보다 떨어지는 한국에서 추진되는 ‘금융중심지’ 구상은 엄청난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또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체계 안에서는 새로운 금융상품 개발을 예외적으로만 금지하는 ‘포괄주의’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서브프라임’ 사태의 주역들과 비견되는 금융공학적 기법들이 등장할 가능성도 크다. 이른바 금융시장 발전을 위해 외환보유고나 국민연금이 증시 부양책 등으로 동원될 경우 국민 세금과 노후자금이 한순간에 큰 손실을 볼 가능성도 있다.

진보·개혁 진영의 전문가들은 정부의 자본시장 발전전략과 자통법 밀어붙이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우리보다 시장 감독 능력이나 사법 시스템이 잘돼 있는 미국에서조차 금융위기 사태가 빚어진 상황인데, 이런 기본 인프라 구축을 위한 노력을 무시한다는 것이 이명박 정부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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