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를 아시아 최초로 도입한 대만, 그 현장을 가다
“대체복무제는 절대 안 된다.” 1997년 대만의 국방부 장관은 이렇게 단언했다. 하지만 불과 3년 뒤인 2000년 1월 ‘분단국가’인 대만의 입법원(국회)은 대체복무법안을 통과시켰다. 1987년에 이르러서야 계엄령이 해제되고, 90년대 중반까지 2천여만명의 인구로 남한에 조금 못 미치는 60만명의 병력을 유지할 정도로 대만은 ‘병영국가’였다. 그리고 여전히 군대 내 자살률이 사회의 3∼5배에 이르고 군 의문사도 발생한다. 그런데도 대체복무제가 시행된 것이다.
96년부터 대체복무제의 입법을 위해 노력해온 치엔시치에(簡錫皆) 입법위원(국회의원)은 “처음에는 아무도 상상치 못했던 일”이라며 “빠른 도입에 나조차 놀랐다”고 말한다. 2000년 7월부터 시행된 이 법에 의해 대만 젊은이들은 병역과 공익서비스를 ‘선택’할 기회를 갖게 됐다. 그리고 서른한명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도 감옥 속에 갇히는 대신 사회 속에서 봉사할 기회를 얻었다.
지정쭝 3형제의 17년 감옥생활
3월9일 오후 1시, 타이베이(臺北)를 출발해 고속도로를 타고 3시간 남짓 내달리자 타이중(臺中)에 다달았다. 도심의 단조로운 회색건물들 사이를 지나 멀리 야트막한 산들이 보일 무렵, 타이중 시립 런아이즈지아(仁愛之家)라는 붉은 색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대체복무를 하고 있는 양로원이다. 정문에 들어서자 땀에 젖은 반팔 T셔츠를 입은 건장한 청년 한명이 차를 향해 달려온다. 정문 옆 화단을 가꾸던 가오즈청(24·高智誠)이다. 화단에서는 서너명의 청년들이 여전히 삽을 들고 땅을 고르고 있다. 이 양로원에서 조경반으로 일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다.
가오즈청은 지난해까지 감옥에 묶인 몸이었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로 종교적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했던 탓이다. 98년 입대해 2년을 감옥에서 보낸 그는 대체복무제가 입법되면서 겨우 감옥을 벗어날 수 있었다.
대체복무제가 입법되기 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대만의 처벌은 가혹했다. 7년형 이상 선고를 받고 4년 이상 수감생활을 해야 군입대가 면제됐다. 그나마 형량이 누적되지 않아 연속된 수감기간이 4년에 하루라도 모자라면 45살이 될 때까지 되풀이해 감옥에 끌려가야 했다. 고의적으로 형기 4년을 눈앞에 두고 석방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형편이다보니 최고 15년까지 감옥생활을 한 사람도 있다. 여호와의 증인인 가오즈청의 아버지도 20대 청춘을 내내 감옥에서 보냈다. 신앙이 곧 감옥행이 되는 이런 가족사는 비단 가오 집안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타이베이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지정쭝(42·姬正中) 3형제는 모두 병역거부로 감옥생활을 했다. 이들 형제가 치른 감옥생활을 합하면 무려 17년. 76년에 입대한 형은 항명죄로 11년형을 선고받아 7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형이 채 형기를 마치기도 전인 80년부터 지정쭝도 같은 이유로 6년 동안 투옥되었다. 80년에서 83년까지 3년 동안은 두 형제가 동시에 갇혀 있었다. 그 기간 동안 어머니는 타이베이에 수감된 큰아들과 타이난(臺南)에 수감된 둘째아들을 면회다니느라 일주일에 두번씩 타이완 섬 양 끝을 오가며 눈물을 뿌려야 했다. 86년 둘째아들이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이번엔 막내가 수감되었다. 4년의 옥고를 치른 막내가 91년 출감하고서야 이들 가족은 감옥과 멀어졌다. 지정쭝은 “온몸에 피멍이 들 정도로 폭행을 당한 적도 많았다”며 “더구나 아버지가 직업군인이었던 탓에 가족들의 마음고생은 더욱 심했다”고 돌이킨다. 형이 수감된 지 얼마 뒤 아버지는 군생활을 접었다.
병력감축, 절호의 기회를 잡아라
92년 항명죄의 최고형이 7년에서 5년으로 낮아졌지만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고통은 더욱 커졌다. 7년형 이상을 선고받고 4년 이상을 복역해야 군이 면제되는 법은 그대로인 채 선고되는 형량만 낮아져 군문제 해결이 더욱 난망해진 것이다. 타이난에 살던 커장원(32·柯掌文)은 89년 7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하던 중 91년 1월1일 타이완 건국 기념일에 특사로 풀려났다. 하지만 그에게 출감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4년형을 채우지 못해 다시 투옥될 형편이었던 탓이다. 더구나 재판을 기다리던 92년 항명죄의 최고형이 5년으로 낮아져 더욱 난감했다. 92년 다시 재판을 받은 커는 군법무관에게 “제발 다른 죄명을 붙여서라도 7년형을 받게 해달라”고 애원했고, 결국 법무관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그에게 7년형을 선고했다. 4년형을 꽉 채운 96년 5월 비로소 그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이처럼 가혹한 처벌을 받았지만 대만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존재는 반세기 동안 늘 감춰져 있었다. 한국의 여호와의 증인이 8만명인데 비해 대만은 4천명에 지나지 않아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국의 위협을 빌미로 한 안보론이 사회를 휘어잡고 있었던 탓이 크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존재는 90년대 후반 병력감축이 논의되면서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올랐다. 97년 45만명의 병력을 40만명으로 줄이는 감군 계획에 따라 매년 14만∼15만명에 달하던 징집인원이 2000년부터 13만명선으로 줄어든 것이다.
징집대상 인원이 넘치다보니 징집대상자들은 입대를 하려면 6개월∼1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 대체복무제를 추진하던 세력에는 절호의 기회였다. 장애인, 여성, 노인단체 등 대체복무의 혜택이 돌아가는 민간단체들은 사회역(대체복무)민간단체추진연맹을 결성했고, 치엔 위원 등 56명의 입법위원들은 ‘초당파 사회역 추진팀’을 구성했다. 젊은이들도 국방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97년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내정부(행정자치부) 징집국에 부임한 충타이리(鍾台利) 국장을 중심으로 초과인력을 활용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관료들의 유럽의 대체복무제 시찰은 ‘행정원대체역 추진위원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유럽의 대체복무제는 원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해 마련된 제도이다. 대체복무제 도입을 검토하면서 자연스럽게 대만 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존재가 부각되게 되었다. 때마침 법조계도 양심적 병역거부자 문제를 제기했다. 리니엔추(李念組) 변호사를 중심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피해사례를 모아 위헌소송을 낸 것이다. 리 변호사는 “92년 법개정 이후 오히려 더 자주 투옥되고, 모범수로 가석방되는 것이 본인에게는 불이익이 되는 상황은 법의 모순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였다”고 소송 이유를 설명한다.
전통적 안보위기론을 돌파하다
논의가 공개화된 98년부터 대체복무제 도입은 급류를 탔다. 우선 15년의 군관련 업무 경험을 가진 국민당의 장치원(江綺雯) 입법위원, 민진당의 치엔시치에(簡錫皆) 입법위원 등 정치인들이 수십 차례 공청회를 열며 초당적 입법활동에 나섰다. 침묵하던 지식인들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부당한 처벌을 지적하고, 대체복무제 도입을 주장하는 글을 각종 매체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국가정책연구기금회의 첸신민(陳新民) 교수 등 유럽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학자들의 활동이 도드라졌다. 첸 교수는 특히 대체복무제의 도입이 인권존중뿐 아니라 사회전체에 이익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초과인력 1만명이 양로원, 장애인시설 등 일손이 부족한 사회복지기관에서 대체복무하게 되면 복지서비스의 질이 얼마나 향상되고, 이들의 낮은 임금을 감안할 때 얼마만큼의 국가예산이 절약되는지를 구체적인 통계를 들어가며 설득했다.
물론 군내부의 반발과 여론의 우려도 만만치 않았다. 먼저 중국의 위협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안보위기론이었다. 중국의 위협이 여전한 상태에서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면 국방력이 약화될 것이란 우려였다. 장 입법위원 등은 “군인 수로 국방력을 과시하는 시대는 지났다”며 “무력보다 안보에 대한 국민의 태도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반박했다. 치엔 입법위원도 “대체복무제의 도입을 통해 복지제도를 튼튼히 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안보”라는 논리로 거들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 인정은 가장 핵심적인 논란거리였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제도화가 형평성에 어긋나고, 군회피 수단으로 악용될 염려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수십년 동안 증명된 바와 같이 이들을 감옥에 넣는다고 병역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며,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대체복무기간을 길게 하면 형평성에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맞섰다. 또 국제 인권기준에 걸맞게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면 국가위상이 올라갈 것이란 점도 강조되었다.
여론이 우호적으로 흐르자 1999년 장 위원과 치엔 위원 등 초당파사회역추진팀의 50여명 의원들은 대체복무법안의 발의에 서명했다. 이 법안은 국방위원회 소속 21명 의원이 전원 동의해 입법원 본회의 안건으로 상정되었고, 결국 2000년 1월15일 본회의에서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대체복무는 크게 경찰, 소방업무 등 사회치안분야와 의료서비스, 환경보호, 교육봉사 등 사회봉사분야로 나뉜다. 일이 험해 일손이 모자라고,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일들이 대체복무의 주영역인 셈이다. 대체복무법안과 더불어 군복무기간을 24개월에서 22개월로 단축하는 법도 동시에 통과되었다.
예상 밖으로 첫해 신청자 모자라
국민당에서 민진당으로 정권이 바뀌고 난 뒤인 2000년 12월4일 세계인권의 날에 첸수이볜 총리는 양심적 병역거부로 감옥에 투옥돼 있던 6명과 가석방중이던 13명을 특별사면했다. 이들 중 3년 미만 형을 산 7명은 남은 형기를 살거나 다시 대체복무를 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지만, 2년4개월의 형을 이미 마친 사람조차 기꺼이 33개월의 대체복무를 받아들였다. 워치타워협회 관계자는 “국민당 정부는 대체복무법을 통과시켜 미래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구하고, 민진당은 특별사면을 통해 과거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구제한 셈”이라고 말한다.
통과된 대체복무법안에 따르면, 대체복무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먼저 일반적인 대체복무자이다. 대만의 징집대상자는 일단 신체검사를 통해 현역, 대체복무자, 면제자로 나뉜다. 하지만 현역 판정을 받은 사람도 본인이 원하면 대체복무 신청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한마디로 ‘선택권’을 준 것이다. 단, 신청자가 필요인원을 넘어서는 경우 추첨을 통해 대체복무 여부가 결정된다. 복무 기간은 맡은 업무에 따라 현역보다 4∼6개월 더 길다. 지난해 5월과 9월에 걸쳐 5천명씩을 모집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시행 첫해에는 신청자가 모자랐다. 관계자들은 “대체복무가 현역보다 쉽지 않다는 인식이 강한 탓”이라고 분석한다.
일반 대체복무자들이 4주 군사훈련을 받고 각 기관으로 배치되는 데 반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군사훈련을 받지 않는다. 이들은 2주 기초교육과 2주 전문기술교육을 받은 뒤 각 기관으로 배치된다. 군사훈련이 면제되는 대신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복무 기간은 현역의 1.5배인 33개월이다. 심사제도도 엄격하다. 일단 양심상 이유로 대체복무를 신청하려는 사람은 이유서와 회고록을 쓴 뒤 종교단체의 보증서를 받아야 한다. 워치타워협회 대만지부는 “일단 각 지역의 원로들이 엄격한 자격심사를 한 뒤 대만지부 차원에서 다시 한번 더 검토를 한다”고 밝혔다. 최종적으로 내정부 징집국의 심사위원회가 지원자들이 제출한 서류를 심사한다. 대체복무법안은 시행조례에서 대상을 “2년 이상 신앙생활을 한 자로 양심상 이유로 병역을 할 수 없다고 인정되는 자”로 한정하고 있다. 그리고 지속적인 관찰을 통해 양심상의 이유가 허위로 판명되거나 3번의 경고를 받으면 대체복무가 취소된다. 시행된 지 6개월이 넘었지만 지금껏 종교적 양심상의 이유로 대체복무를 하고 있는 사람은 31명에 불과하다. 28명이 여호와의 증인이고 나머지 3명은 승려다. 현재 양심적 병역거부자 31명은 모두 타이중에서 대체복무를 하고 있다. 이들 중 14명은 98년 이 지역에서 일어난 지진재해복구지원 업무를 하고, 나머지는 가오즈청처럼 런아이즈지아(仁愛之家) 양로원에서 일하고 있다.
불교의 자비를 실천하는 길
서서히 으스럼이 깔리던 3월9일 오후 5시30분. 양로원 건물 내부로 들어가자 또다른 양심적 병역거부자인 주앙신슝(22·莊信雄)이 설거지 거리를 가득 실은 카트를 밀고 있었다. 양로원의 이른 저녁식사 준비와 배식을 마치고 설거지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양로원에서 일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 7명 중 주앙과 첸난펑(28·陳南邦)은 노인을 돌보는 일을 한다. 식사를 담당하는 주앙은 아침 6시면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첸은 혼자서 32명의 노인을 돌보며 목욕에서 편지쓰기, 건강까지 일일이 체크해야 한다. 9월부터 이 일을 시작한 두 사람의 손은 벌써 노인에게서 전염된 피부병으로 울긋불긋했다. 마중을 나왔던 가오즈청을 비롯한 나머지 5명은 조경반이다. 이들은 8천평에 이르는 양로원 화단을 가꾸고 다듬는 일을 담당한다. 이날 이들은 하루종일 정문 담장 옆 화단의 잡초를 뽑고 땅을 고르는 일을 했다. 아열대기후의 뙤약볕 아래서 일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양심적 병역거부로 2년 동안 감옥을 다녀온 가오는 “양심도 지킬 수 있고 사회에 공헌도 하는 사회봉사가 감옥보다 훨씬 낫다”며 웃는다.
사무실에서 만난 양로원 관리자 허롱송(何榮松) 주임은 열심히 대체복무제도를 ‘찬양’한다. “그동안 일손이 너무 부족해 제때 기저귀를 갈아주고, 산책을 시켜줄 여유도 없었어요. 대체복무자들이 온 뒤 그런 일들이 수월해졌지요. 양로원 분위기마저 평화로워졌을 정돕니다. 저희 양로원에서는 20여명의 대체복무자들이 다들 열심이지만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일곱명이 성실합니다. 이렇게 좋은 제도를 왜 이제야 시작했나 싶어요.”
어둠이 점점 짙어지자 런아이즈지아 양로원 숙소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온 승려 홍미엔칭(21·洪敏淸)도 있었다. 하루 동안 10명의 독거노인을 돌보고 오는 길이라는 그는 합장으로 손님을 맞았다. 그는 “살생불계의 불교교리를 지키고 자비를 실천할 수 있다”며 대체복무선택 이유를 설명했다. 현재 타이중에는 각각 가오슝(高雄), 신주(新竹), 타이베이에서 온 승려 세명이 종교상 이유로 33개월의 대체복무를 하고 있다. 서로 종단도 다르고 얼굴도 몰랐던 이들은 정부의 공고를 보고 대체복무를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홍은 “만약 대체복무제가 없었다면 입대를 했을 것”이라면서도 “그렇다면 마음이 많이 괴로웠을 것 같다”고 고백한다. 입대를 앞둔 홍 주변의 몇몇 승려들은 대체복무를 선택할 계획이라고 한다. 사위가 고요한 어둠뿐인 타이중의 양로원을 뒤로 하고 나오며 치엔 입법위원의 말이 떠올랐다.
“대만은 40만 병력으로 280만의 중국 군대와 대치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중국은 ‘하나의 중국’ 정책을 강요하며 기회만 있으면 대만에 으름장을 놓지요. 얼마 전 대만의 국방장관도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는 데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인정하더군요. 하지만 무력으로 땅을 점령할 수는 있어도 마음을 점령할 수는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비폭력적인 대체복무를 통해 어려운 사람들의 삶과 사회에 대한 애정, 세계평화를 배우게 됩니다. 대체복무가 사회복지와 평화의 중요한 기반이 되는 거지요. 한국도 병력 수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대체복무 도입이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겁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한 대체복무제를 아시아에서 최초로 도입한 국가가 된 대만. 현재까지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이 안보를 위협하거나 군회피 수단으로 악용된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미래에 대한 염려와 실현된 현실 사이에는 가끔 거리가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인정도 어쩌면 그런 문제인지 모른다. 정작 문제는 반세기 넘게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아 온 허울뿐인 형평성, 끝내 지우지 못하는 불안감인지도 모른다. 한결같이 “대체복무제도가 생기지 않았으면 감옥으로 향했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대만 대체복무자들의 웃음 띤 얼굴 위로 감옥에 갇힌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모습이 겹쳐져 왔다.
타이베이=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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