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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풀릴 문젠가

등록 2007-04-05 15:00 수정 2020-05-02 19:24

동료를 보낸 장영규씨의 절규… 서슬 퍼런 1970년대 끌려간 뒤 군대에서 의문사한 5인

기획연재 양심을 따른 사람들 ②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강용호~.“ “3.” “김낙정~.” “2.” “김영연~.” “3.” “김영진~.” “2.” “김창식~.” “두 번 산 거?” “다 합해서!” “4.2.” 지난 3월26일 오후 1시께 경기 이천시 장호원읍 국도변의 한적한 휴게소에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50대 남성 40여 명이 모였다. 1970년대 서슬 퍼런 군사정권 아래서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총 들기를 거부했던 여호와의 증인 ‘중립모임’ 회원들이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튀어나오는 수치는 20대 젊은 나이에 그들이 옥살이를 한 기간이다.

“1974년 2월 병역기피로 붙들려 들어가 이듬해 9월까지 1년7개월을 복역했다. 이어 1976년 6월 병무청 직원에게 강제로 끌려가 서울 수색 60훈련단으로 입소했다. 집총 거부로 11헌병대에서 ‘누범’이라는 이유로 4년형을 선고받았다. 1980년 6월 만기 출소했을 때, 내 20대는 끝나 있었다.”

입영률 100% 달성!

두 차례 투옥돼 5년7개월을 복역한 안영식(56)씨를 비롯해 3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군 영창에서 겪은 가공할 폭력과 가혹행위의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박희규(51)씨 등 이날 모임에 참석한 이들이 신념을 꺾지 않아 치른 대가는 총 137년이다.

중립모임 회원들이 수감생활을 했던 1970년대는 온 사회가 병영화를 향해 치닫던 때다. 학교에선 교련 수업에 열을 올렸고, 직장에선 예비군 훈련이 시도 때도 없이 이어졌다. 양심에 따라 총 들기를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겐 그야말로 수난의 시대였다. 박정희 정권은 1973년 1월30일 ‘병역법 위반 등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도 공포했다. 특별조치법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처벌 형량을 3년 이상 10년 이하로 대폭 강화하고, 이미 병역을 거부했던 이들에 대한 재징집과 미수범 처벌까지 할 수 있도록 했다. 이어 1975년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나서 ‘입영률 100% 달성’을 전국 병무청에 지시하기도 했다. 한바탕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우리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문제가 풀릴 상황이었다. 둘 중 하나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장영규(58)씨는 1976년 3월6일 새벽 낯선 사내들에게 이끌려 집을 나섰다. 병역법 위반죄로 1년6개월을 복역하고 출소한 지 두 달 만에 다시 경남 창원의 39사단 훈련소로 강제 입영을 한 것이다. 입소 첫 사흘 동안은 온갖 회유가 이어졌지만, 이내 헌병대 영창으로 옮겨졌다. ‘지옥’의 서막이었다.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온갖 기합과 매질이 끊이지 않았다. 밥도 주지 않았다. 헌병들이 먹다 남긴 밥을 얻어먹는 게 고작이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뭇매를 퍼부었다. 귀찮다는 게다. 그렇게 한 20여 일이 넘어가니 배에서 허리까지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극심한 변비 탓이었다. 항문으로 피를 토해냈고, 관장을 하다가 기절을 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매질은 계속됐다.”

‘특명’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모진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만큼 헌병들의 ‘살기’도 하루가 다르게 더해갔다. 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함께 갇힌 ‘형제’가 있다는 점이었다. 매질로 부어오른 발바닥을 어루만지고 있노라면 곁에 갇혀 있던 이춘길(당시 26살)씨가 위로의 말을 건네곤 했다. 자신보다 훨씬 많이 두들겨맞은 뒤에도 이씨가 “아프죠? 끝까지 인내합시다”라며 격려를 했다고 한다.

‘특명’을 받은 듯한 살기…

하지만 파국은 기어이 닥쳐왔다. 두 사람이 군 검찰로 조사를 받으러 가는 날이었다. 헌병들은 미리부터 “감방 안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유출하면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놨다. 검사가 물었다. “이춘길이는 10개월을 김해에서 살고 나왔고, 장영규는 1년6개월을 살고 나왔고…. 너희들은 이번엔 형을 얼마나 받을 걸로 생각하느냐?” 장씨는 헌병의 위협을 의식해 “나는 말 못합니다”라며 말을 아꼈다. 하지만 이씨는 “옆에서 감방 동료들이 2년 받는 걸로 얘기해서, 한 2년 받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곁에 지키고 선 헌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영창으로 돌아온 헌병들은 웃옷부터 벗어부쳤다. 침대를 받치고 있던 악귀 같은 각목을 꺼내 들었다. 욕설과 함께 이춘길씨가 끌려나갔다. 장씨는 곁에 꿇어앉은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매질’이 시작됐다. 무참히 이어지는 매질을 받아내던 이씨가 장씨 눈앞에서 널브러졌다. 눈의 흰자위를 드러낸 채였다. 헌병들은 익숙한 동작으로 물 한 양동이를 이씨에게 퍼부었다. 하지만 이씨는 깨어나지 못했다. 다시 한 양동이를 부었다. 이씨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세 번째 양동이가 퍼부어질 때, 장씨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사람을, 사람을 이렇게 개 잡듯 죽이다니….”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다. 꿇어앉은 채 절규하는 장씨에게 헌병들은 손을 대지 못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부랴부랴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이씨는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이춘길 형제가 죽는 바람에 나는 맞지 않았다. 이춘길 형제 때문에 내가 살았다. 그때는 둘 중 한 사람이 죽어야 문제가 풀릴 상황이었다. 누가 죽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가해자는 제대를 두 달여 앞둔 말년 병장이었고, 사인은 비장파열이었다. 가해자는 구속돼 실형이 선고됐다지만, 처벌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는 알 수 없다. 6개월도 복역하지 않고 석방됐다는 소문만 나돌 뿐, 군 당국은 이렇다 할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이씨의 죽음 이후 헌병들의 매질은 멈췄고, 밥도 정상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군사재판에 회부된 장씨는 징역 4년형에 처해져 민간 교도소로 자리를 옮겼다. 1980년 3월18일 만기 출소한 장씨는 “들어갈 때는 둘이었는데 나올 때는 혼자여서 숱하게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야만의 시대는 김연희(62)씨의 남동생 종식씨의 젊음도 앗아갔다. 1975년 11월14일의 일이다. “밤에 논산훈련소에서 동생이 죽었다는 전보를 보내왔다. 조치원에 있는 육군통합병원에 가보니 다리에 번호표를 단 주검이 장작더미처럼 쌓여 있더라. 한 사람이 다리를 잡고, 한 사람이 머리를 잡고 주검을 내왔다. 그런데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엉덩이에 있는 점을 보고서야 동생인 줄 알았다.”

주검은 온통 멍투성이었다. 사인을 묻는 가족들의 오열 앞에 군 당국은 “실수였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한 초급 장교가 가해자였다. 사복 차림의 낯선 사내들은 “망자가 나라에 충성하지 않았고, 집안도 사상이 불순하다”며 말을 돌렸다. 김씨의 남편 강예원(67)씨는 “군 당국은 자기들 잘못을 가리기 위해 가족들을 싸잡아 사상이 불순하다고 몰아갔다. 법적으로 따져묻고 탄원서도 내고 하자, 그때서야 논산훈련소장 명의로 처남이 죽게 된 경위를 담은 편지가 날아왔다”고 말했다. 편지에는 가해자에게 맞은 김씨가 뒤로 넘어가면서 침대에 엉덩이가 걸려 쓰러졌고, 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고 적혀 있었다. 입대 전 장티푸스를 앓았던 김씨의 연약한 몸이 입대 뒤 10여 일 동안 이어진 가혹행위를 견녀내지 못했을 게다.

국립묘지 장례식 연락이 오다

“처남이 죽은 뒤 한 달쯤 지났을까? 국립묘지에서 장례식이 있다고 오라고 해서 갔다. 가족들이 강하게 나가니까 무마를 하려고 그런 거겠지. 도대체 사람을 얼마나 때렸으면 죽기까지 했겠느냐….” 국립묘지 김씨의 묘비에는 그가 ‘순직’했다고 새겨져 있다. 아들 형제를 둔 강씨 부부는 1988년 아르헨티나로 이주를 선택했다. 강씨는 “아이들이 징역살이를 하게 될까 두려웠다”고 말했다.

1976년 3월28일 숨진 정상복(당시 24살)씨도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그의 사인은 공식적으론 ‘병사’다. 그해 해병방위 14기로 포항 해병훈련소에 입소한 정씨는 3주 훈련 기간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오던 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져 그대로 세상을 등졌다. 형 상조(56)씨는 “동생이 훈련소에서 마음을 고쳐먹고 훈련을 받은 뒤 나왔지만, 미리 맞은 매질 때문에 속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고 했다. 하지만, 훈련소 영창에 갇혀 있는 정씨를 숨지기 며칠 전에 면회했던 서영태(72)씨는 다른 얘기를 했다.

“면회를 하러 갔더니 손발과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모진 매질을 견뎌내며 끝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끝까지 매질을 해대다 마침 훈련 기간이 끝나니 일단 내보낸 게 아닌가 싶다.” 정씨가 끝까지 훈련을 거부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도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군 당국은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고, 순진 다음 날 서둘러 화장을 하도록 종용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아래서 가족들은 그나마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했다.

억울한 죽음이 석연찮은 정황 속에 ‘자살’로 둔갑한 사례도 있다. 1986년 1월 논산훈련소에서 숨진 계명대생 김영근(당시 23살)씨가 그렇고, 1981년 8월15일 태릉 71사단 훈련소에서 숨진 김선태(당시 22살)씨가 그렇다. 선태씨의 형 윤태(53)씨는 “입대한 다음날 아침 동생이 숨졌다는 전화를 받고 부대로 달려갔더니, 군에선 동생이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꾸며놨더라. 하지만 주검을 보니 타박상이 곳곳에 나 있었고, 가슴에도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는 계엄 치하였다. 군 당국은 “당신도 군대 문제로 피해다니지 않느냐. 다시 구속해버릴 수도 있다”며 윤태씨를 위협했다. 그러는 사이 가족들의 항의는 점차 통곡으로 바뀌어갔고, 동생을 화장해 재로 뿌린 지 석 달여 만에 윤태씨는 병무청 직원들에게 이끌려 강제 입영돼 3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동생 사망 석 달 만에 형이 끌려가다

군사정권이 막을 내린 지 14년여가 흘렀다. 병역거부자에게 퍼부어지던 가혹한 매질도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무한폭력의 시대, 억울한 죽임을 당한 이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반성을 기대하는 건 여전히 무리일까? 오늘도 양심에 따라 총 들기를 거부한 젊은이들이 줄지어 감옥으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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