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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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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특창, 그 몸서리치는 기억

등록 2007-03-16 00:00 수정 2020-05-03 04:24

76년 징집된 윤봉근·최창섭·류기린씨가 갇혔던 높이 2m×너비 60cm×깊이 1m 독방…말처럼 서서 불시점검에 잠도 못 자며 최장 2개월… “차라리 빨리 구속되기를 바랐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그해 겨울은 혹독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게 1976년 1월의 겨울은 혹독한 시련의 계절이었다. 논산훈련소 헌병대에는 그들을 위한 특별한 감옥이 마련돼 있었다. 이름하여 ‘독거특창’. 높이 2m, 너비(가로) 60cm, 깊이(세로) 1m로 추정되는 독거 감옥이었다(그림 참조). 벽돌을 쌓아서 만들어 국방색 페인트를 칠했다고 수감자들은 증언한다. 당시 수감자들은 “헌병대에서 ‘혼자 거하는 특별한 영창’이란 뜻으로 그렇게 불렀다”고 전했다. 그들은 또 “어른 어깨가 꼭 끼는 너비에 겨우 다리를 뻗고 앉을 수 있을 정도”라고 증언했다. 그나마 키가 약 185cm에 90kg이었던 한 수감자는 다리를 펴고 앉지 못할 정도로 좁았다. 그들은 관을 세워놓은 것 같은 독거특창에서 “말처럼 서 있었다”. 잠들지 못하게 하는 장치도 마련돼 있었다.

천장에는 언제나 30W 백열등이 켜져 있었다. 그 옆에는 스위치가 달려 있었다. 그들을 감시하는 헌병들 앞에도 스위치가 있었는데, 헌병들이 스위치를 누르면 “따르릉” 소리가 울리고, 수감자들은 천장에 달린 스위치를 재빨리 눌러야 했다. 그러면 독거특창 앞에 달린 빨간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헌병들은 수시로 스위치를 눌렀다. 독거특창은 6개가 벽면을 따라 ㄱ자 모양으로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수감된 6명 중에서 1명이 스위치를 늦게 누르면 단체로 매질을 당했다. 그들은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깜빡 서서 졸았다.

독거특창에 수감됐던 증언자들에 따르면, 논산훈련소 헌병대에는 76년 1월부터 10월까지 독거특창이 있었다. 2007년 3월3일, 서울에서 중장년 사나이 세 명을 만났다. 독거특창에 수감됐던 여호와의 증인 윤봉근(55), 류기린(53), 최창섭(52)씨는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증언했다. 윤씨는 76년 1월 독거특창에 처음 갇힌 사람이었다. 이어서 최씨가 2월, 류씨가 3월에 들어갔다. 들어간 시기는 조금씩 달랐지만, 그들의 독거특창 생활은 겹쳐져 있어서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재연됐다.

대통령의 ‘한 말씀’ “입영률 100% 달성”

그들이 만든 감옥에 그들이 갇혔다. 최씨는 “75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논산훈련소 헌병대에 수감됐던 증인들이 벽돌을 찍어서 독거특창을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최씨가 당시 독거특창을 만들었던 증인들과 함께 영창에 있으면서 들었던 말이다. 75년은 병역거부자들이 논산훈련소로 밀려온 시기다. 거슬러 시련은 73년 시작됐다.

유신헌법을 선포한 박정희 정권은 73년 ‘병역법 위반 등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특별조치법)을 만들어 입영 기피에 대한 형량을 3년 이상 10년 이하로 대폭 강화했다. 병역거부자는 73년 이전에 1년 이하의 형을 받았다. 게다가 병역 기피 미수범도 처벌하고, 재징집도 가능해졌다. 역대 최장기 병역거부 수감자인 정춘국씨가 7년10개월을 복역한 것도 특별조치법의 ‘효과’였다. 그는 69년 10개월을 민간교도소에 수감됐고, 73년 특별법으로 재징집돼 군사법원에서 3년형을 받고 복역했다. 또다시 출소하는 날, 병무청 직원에게 교도소 앞에서 연행돼 항명죄로 4년을 복역했다. 73년 이전까지 병역거부자들은 병역 기피로 민간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지만, 특별조치법 이후에 강제로 징집되기 시작했다. 특히 75년 대통령의 ‘한 말씀’으로 군대로 끌려가는 사람이 급격히 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입영률 100% 달성”을 지시하자 병무청은 증인들을 강제 입대시켰다. 독거특창에 수감된 증언자 세 명도 강제 징집을 당했다. 윤씨와 류씨는 집에서 잠을 자다가, 최씨는 외국인 선교사와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들이닥친 병무청 직원들에 연행돼 군대로 끌려갔다. 심지어 조영헌씨는 결혼식장에서 곧바로 잡혀갔다.

유신 체제인 75년 징집된 증인들은 일벌백계로 가중 처벌을 받았다. 최창섭씨는 “75년 징집돼 독거특창을 만든 증인들은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첫 재판에서 징역 2~3년에 집행유예 2~3년을 선고받았다. 집행이 유예된 그들은 영창에서 다시 훈련부대로 돌려보내졌고, 또다시 거부하면 항명죄로 기소돼 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4~5년씩 수감됐다. 군사법원이 당시 항명죄의 최고형인 2년보다 높은 형량을 주기 위해 개발한 편법이었다. 이렇게 곱살이 징역을 살았던 사람이 우웅섭씨 등 10여 명. 게다가 목숨도 잃는 흉흉한 때였다. 75년 11월14일 여호와의 증인 김종식씨가 논산훈련소에서 숨졌다. 증언에 따르면, 김씨는 훈련을 거부하다 연병장에서 중대장에게 구타를 당해 쓰러졌고 며칠 뒤에 죽었다. 이런 배경에서 독거특창이 ‘개발됐다’. 논산훈련소 헌병대에서 나름대로 때리는 것을 피하면서 가혹행위를 하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6개의 방이 찰 때까지 ‘생체실험’

독거특창이 생긴 사연을 증언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너무 쉬우니까 군복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냐 그랬을 것이다. 원래는 훈련연대에서 집총 거부를 하면 영창으로 보내져서 구속이 되는 게 정상적인 절차인데, 바로 구속을 안 시키고 15일 징계를 줘서 독거특창에 넣는 거다. 왜 15일이냐면, 징계 30일이 넘으면 구속시켜야 되니까. 15일 징계하고 훈련연대로 사나흘 돌려보냈다가 다시 15일 징계를 줘서 영창으로 또 보내는 거다. 그렇게 30일씩 살았다.” 새로운 거부자가 들어와 ‘만실’이 되면 오래 있던 사람을 영창 ‘큰방’으로 보내서,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개 보름이나 한 달 독거특창에 수감됐다. 윤봉근씨와 강영호씨처럼 2개월을 갇힌 경우도 있었다.

76년 1~10월 독거특창에 수감된 사람은 파악된 인원만 22명에 이른다. 최씨는 “김연환, 박홍규, 유재술…”이라며 이름을 기억했다. 윤봉근씨는 첫 번째이자 최장기 독거특창 수감자다. 그의 고생은 남달랐다. 스물여섯의 윤씨는 1월에 혼자 들어가 6개의 ‘방’이 찰 때까지 두 달을 수감됐다. 윤씨는 “잠을 한숨도 못 자고 7일을 버텼는데, 8일째 그대로 넘어갔다”고 돌이켰다. 그에게 당시의 상태를 물었다. 그는 “안 자봐야 알겠죠”라며 웃었다. 두 달을 지내자 몸무게가 11kg 빠졌다. 헌병대도 독거특창에서 사람이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에 대한 경험이 없었던 터라 쓰러질 때까지 윤씨를 괴롭혔다. 그러니까 ‘생체실험’을 당한 셈이다.

“원산폭격이 가장 쉬웠다”

옆에 있던 독거특창 ‘후배’ 최씨는 “이틀 만에 쓰러졌어야 우리가 고생을 덜했지”라고 농담했다. 헌병들의 가혹행위에 재소자들의 따돌림까지 더해졌다. 15일 징계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다 다시 영창으로 돌아오자 다른 재소자들이 “저놈들에게는 밥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따돌렸다.

윤씨는 사흘간 밥을 굶으며 저항했다. 윤씨가 들어온 지 20일이 넘어서 두 번째 거부자가 들어왔다. 그는 어떻게 고문과 고립을 견뎠을까. 윤씨는 웃으며 “목포 교도소에서 경험을 해봤거든”이라고 말했다. 그는 병역 기피로 73년 목포교도소에서 1년6개월을 살았던 경험이 있었다. 그는 “교도소 생리를 아니까 견뎠다”고 말했다. 최씨가 2월 중순 독거특창에 갔을 때, 윤씨의 발은 홍시처럼 벌겋게 부어 있었다. 최씨는 “누르면 쑥 들어갈 정도”라고 돌이켰다. “끝없이 조인트를 까였지만, 좁은 공간이라 양말을 벗어서 무릎 아래를 살펴볼 생각도 못했다”고 말하는 윤씨의 얼굴에는 회한이 스쳤다. 윤씨는 민간교도소에서 1년6개월 복역한 죄로, 재범으로 분류돼 4년형을 선고받아 모두 5년6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들은 두려움을 떨치기 힘들었지만, 독거특창에 놀라진 않았다. 최씨 등은 “정말로 죽을 각오로 군대에 갔다”고 말했다. 입대 한두 달 전에 김종식씨가 논산훈련소에서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였다. 3월에 독거특창에 수감된 류기린씨는 “헌병이 오더니 ‘내가 이 곤봉으로 증인 일곱 명을 때려 죽였거든’이라고 말해서 정말로 믿었다”고 말했다. 사람은 죽었고, 정보는 없었던 탓이다. 그들이 군대로 끌려가기 전에 증인들은 입대를 거부했다. 그래서 군대에서 어떤 절차로 처벌되는지 정보도 없었다. 스물두 살 류기린씨, 스물한 살 최창섭씨는 그렇게 독거특창을 들어갔다.

그리고 사생결단의 일주일이었다. 독거특창에 들어간 첫 번째 일주일은 ‘설득’의 명목으로 구타가 심했다. 류씨는 “상부에서 타협시키라고 하면, 아래서는 때리는 방법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최씨는 “미제 야전침대 옆에 끼는 각목이 있다. 각목으로 허벅지를 치면 (살이) 터진다. 피와 진물이 섞여서 말라붙어버린다. 그러면 헐렁한 작업복 바지가 백바지가 된다. 앉으라 그래도 못 앉는다”고 말했다. 그렇게 각목에 맞아서 최씨는 세 번을 기절했다. 그들은 “피티는 체조였고, 조인트는 기본에 원산폭격이 가장 쉬웠다”고 말했다. 대화도 금지돼 있었다. 그래도 서로 격려하면서 고통을 견뎠다. 최씨는 “헌병들이 ‘너희들 말했지’ 물으면 우리는 ‘그랬다’고 해서 또 맞았다”고 돌이켰다. 양심을 속이는 거짓말을 못했던 것이다. 각각의 수감자에게 이른바 ‘임자’가 있었다. 아직도 그들은 자신을 찍어서 괴롭히던 헌병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한다. 류씨가 “김○○ 심하지”라고 말하자 최씨가 “그래도 정○○ 못 잊지”라며 웃었다. 그들은 아직도 기억한다. “당시 논산훈련소 소장이 김영선씨였고, 육사 8기로 투스타였다. 나중에 유정회 의원도 했다.”

류씨의 고생은 더했다. 그의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마침 헌병대 중령이 고향 사람이어서 아버지가 영창으로 면회를 왔다.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었던 아버지는 아들을 설득하지 못하자 “내 자식 아니니 어쨌든 군인으로 만들라”며 떠났다. 류씨는 “그것을 지켜보던 형무과장이 ‘이건 개만도 못하다’고 하면서 정말 개처럼 패더라”고 말했다. 형무과장의 ‘특별한’ 지시로, 류씨는 사나흘 동안 20kg짜리 모래 가마니를 지고서 기합을 받았다. 결국 류씨의 아버지는 사표를 써야만 했다. 당시에 육본 대령이었던 윤봉근씨의 작은아버지도 결국 옷을 벗었다. 그렇게 연좌제는 또 다른 고문이었다. 일주일이 지나면 가혹행위가 덜해졌다. 그들은 “까닭 없이 미워하는 군인도 있었지만, 정말로 고마운 사람도 있었다”고 돌이켰다. 운 좋게 맘 좋은 헌병을 만나면 2~3시간 수면도 취했다. 최씨는 “그냥 기대서 앉아도, 옆으로 구부려도 힘들다. 태아처럼 웅크리고 옆으로 누으면 편하다. 자다가 다리가 저려서 깨지만 40~50분 자도 정말로 단잠이다”고 돌이켰다.

군은 그들의 믿음을 ‘교정’한다는 명목으로 군종장교와 면담을 시켰다. 류씨는 “군종참모가 왜 거부하느냐고 물어서 대답하니까 ‘성경에 그런 게 어딨어’라며 뺨을 때렸다”고 돌이켰다. 그는 “날 데리고 갔던 헌병이 ‘군종이 사람 때리나’ 그러더라”며 웃었다. 최씨는 어느 날 밤에 헌병참모 방으로 불려갔다. 중령인 참모는 최씨에게 “훈련을 거의 받지 않는 꽃 가꾸는 부대로 보내주겠다”며 설득했다. 최씨는 “참모의 아들이 내가 다닌 고교에 다녀서 각별히 신경을 써줬다”고 설명했다. 설득당하지 않자 헌병들은 “감히 참모 말을 듣지 않는다”며 구타했다. 최씨는 기절했다. 그는 “사실 맞는 것보다,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 사람 같지 않은 대접을 받을 때 가장 괴로웠다”며 “그래도 참모는 나를 존중해주었다 싶어서 맞아도 원망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타협”을 거부해 맞았던 경험은 흔하게 있었다.

대를 이어 감옥 가야 하나

그들은 구타를 당하면서 배고픔도 견뎌야 했다. 식사도 독거특창의 창살 사이로 지급됐다. 최씨는 “우리에게는 군대에서 주는 식사량의 3분의 1만을 주었다”고 말했다. 류씨는 “숟가락으로 세 번만 긁으면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그나마 먹는 시간도 딱 10초. 하나, 둘, 셋… 하다가 10초가 넘어도 씹고 있으면 번개 따귀를 때려서 밥풀이 튀었다”고 돌이켰다. 독거특창에는 분유통 모양의 ‘뺑기통’이 있었는데, 구타당할 때를 제외하면 그들이 독거특창에서 나오는 유일한 시간은 아침에 ‘뺑기통’을 비우러 갈 때였다. 류씨는 “뺑기통에 손잡이로 달린 철사를 개처럼 입으로 물고 가서 버렸다”고 돌이켰다. 그나마 6명을 한 명씩 보내 5분 안에 작업을 마치도록 했으니 양치나 세수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최씨는 사흘이 지나면서 밥을 먹지 못했다. 독거특창 수감 20일 만에 육군병원으로 후송됐고, 십이지장궤양 판정을 받았다. 구타로 쇄골에 금이 갔다는 진단도 받았다. 독거특창에서 20일 만에 9kg이 빠졌지만 병원생활 한 달 반 만에 5kg이 회복됐다. 최씨는 “병원 침대에 누우니 몸이 살살 녹았다”며 웃었다. 두 달을 갇혔던 윤씨는 “큰방으로 왔더니 서 있는 것이 정상으로 느껴지고 움직이기 싫었다”고 말했다. 그는 재소자들과 벽돌을 찍는 노역을 나가서도 일주일 이상 그냥 서 있었다. 그들은 하루빨리 구속되기를 바랐다. 큰방에서도 가혹행위가 끝나지 않았지만, 독거특창을 벗어나면 누워서 잤기 때문이다. 그들은 재판을 기다리며 영창에 짧게는 20일, 길게는 두세 달 머물렀다. 그리고 형이 확정되면 ‘육각’이라고 불렸던 육군교도소로 갔다가 민간교도소로 이감됐다. 최씨는 “백열등 아래서 성경을 읽으며 버텼다”며 “옆에 형제들이 있다는 것도 큰 힘이 됐다”고 돌이켰다.

독거특창은 77년부터 사용되지 않았다. 최씨는 “77년 1월에 들어간 형제들은 독거특창에 들어가지 않았다”며 “그들에 따르면, 육본 감사에 (독거특창이) 걸렸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76년의 악몽은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악몽은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최씨는 “나오고 15년이 되도록 독거특창에 갇힌 악몽을 꾸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면 정말로 한국을 떠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지긋지긋한 새마을 노래…”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여호와의 증인의 조사에 따르면, 70년대에 수감된 사람들 중에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 많았다. 신체적 후유증도 여전하다. 쇄골에 금이 갔던 최씨는 “한의사들이 마흔 넘으면 늑간 신경통으로 고생하겠다고 하더니 오늘처럼 궂은날에는 정말 그렇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류씨도 “골병은 다 들었지”라고 거들었다.

이제 그들은 아들을 걱정할 나이다. 70년대 중·후반 시련을 겪었던 세대의 2세들이 군대에 갈 시기다. 류씨가 묻는다. “대체복무 안 되는 겁니까?” 스물여섯인 그의 아들은 치과 전공의 과정을 밟고 있다. “저놈 (감옥에) 안 보내고 싶은데…”라고 말하는 류씨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다급하게 묻어났다. 옆에 있던 윤씨는 “우리 아들 두 놈은 벌써 갔다 왔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들은 “우리는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며 “대체복무가 도입돼 2세들이라도 감옥에 가지 않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70년대에도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벌에는 지역감정이 없었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류씨도, 전라도 순천에 사는 윤씨도, 경기도 출신인 최씨도 공평하게 독거특창에 갇혔다. 그리고 대를 이어 감옥에 가야 할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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