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능 누출의 가장 직접적인 인체 증거, 한국도 비껴가지 않아… 사고 당시 성급한 결론으로 덮은 정부는 역학조사로 불안 없애야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체르노빌 폭발이 일어나고 몇 년이 지난 즈음, 갑상선암에 걸린 어린이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방사선 동위원소 ‘요오드 131’. 긴 잠복기를 깨고 하나둘씩 어린이들의 목에 종양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2차 대전 히로시마 원자탄 투하 뒤에도 나타났던, 체르노빌 방사능 누출의 가장 직접적인 인체 증거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수는 불어나 현재까지 4천여 명의 체르노빌 어린이들이 갑상선암 판정을 받았다.
파문 일으킨 녹색연합의 발표
참사가 일어나기 전 1981~85년에 체르노빌 주변 국가인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러시아의 갑상선암 발병률은 100만 명당 4~6건이었다. 그러나 참사를 겪은 뒤 1986~87년의 통계에선 45명으로 훌쩍 뛰었다. 특히 15살 이하 갑상선암 환자 가운데 64%가 인근 지역 출신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세계보건기구(WHO)도 1992년 사고 지역 인근에 사는 어린이들에게서 다른 지역에 비해 80배가 넘는 갑상선암이 발병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갑상선암은 목 아래에 멍울이 지는 증상으로 시작된다. 심하면 피로감과 함께 목소리가 쉰다. 완치율이 높지만, 종양을 제거한 뒤에는 평생 호르몬제를 투여해야 하는 등 고통이 따른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9명의 어린이가 갑상선암으로 숨졌다.
그렇다면 체르노빌의 방사선이 한국에 영향을 끼치진 않았을까. 방사성 낙진은 한반도에도 닿았다. 미국의 로런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가 당시 대기 순환을 토대로 작성한 낙진 지도에 따르면, 1986년 5월 초 한반도 상공은 이미 방사성 낙진으로 덮여 있었다. 체르노빌 폭발 뒤 북서풍이 불어 “아시아는 피해를 모면했다”는 말이 나돌았지만, 불행은 아시아를 비켜가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해 10월 녹색연합은 “한국에서도 갑상선암 환자가 증가하고 있다”며 “이는 체르노빌 폭발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비유럽권에서 이런 주장은 처음이었다.
석광훈 녹색연합 정책위원은 “국립암센터 자료를 분석해보면, 다른 연령에 비해 20대 갑상선암 비중이 지나치게 많다”고 말한다. 2002년 국립암센터 통계치를 보면, 20~24살 여성의 경우 전체 암 가운데 갑상선암 비중이 30% 이상을 차지한다. 더욱이 1996년보다 8.6%가 늘어난 수치다. 암 발생이 많은 40~50대 여성에서 갑상선암 비중이 10% 내외를 기록하는 것에 견줘 분명 특이한 현상이다. 인구 10만 명당 여성 갑상선암 발생률도 15.7명으로, 체르노빌 주변국을 제외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갑상선암의 발병 요인인 요오드 131은 반감주기가 8일입니다. 즉, 8일이 지날 때마다 그 양이 절반으로 줄어들지요. 일본 측정치를 보면, 요오드 131은 6월 초까지 동아시아 상공에 머무른 것으로 나타납니다. 당시 한반도에 사는 태아나 어린이들이 요오드 131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죠.”
사람에 따라 잠복기 20년 이상
체르노빌 폭발 당시의 영·유아와 어린이는 지금 20~30대의 젊은이로 자랐다. 갑상선암은 사람에 따라 잠복기가 20년 이상에 이른다. 따라서 특정 시기 대규모 인구가 방사능에 노출됐다면, 해를 거듭할수록 환자 수가 늘어난다. 체르노빌 어린이 갑상선암 환자도 2005년까지 4천여 명까지 늘어났으며, 2010년께 피크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2005년 유엔 보고서를 반박하는 ‘체르노빌의 또 다른 보고서’(TORCH)는 벨로루시에서만 최대 6만6천 명까지 이를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녹색연합의 주장에 대해 국립암센터는 초음파 장비 등 검진기술이 발달해 늘어난 일종의 착시현상이라고 반박해왔다. 하지만 석 위원은 “체르노빌 인근에서 서구 장비로 갑상선암 검진에 착수한 1990년대 초반에도 같은 논쟁이 있었다”고 말했다. 유엔 원자력방사선에 대한 과학자문위(UNSCEAR)는 2000년 이런 가능성에 대해 검토했는데, “검진기술 발전이 환자 수 증가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밝혔다. 윤기돈 녹색연합 녹색도시국장의 말이다. “우리는 갑상선암 증가가 체르노빌 사고의 결과라고 단정하는 게 아니에요. 가능성이 있으니 국가적 차원에서 역학 조사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죠.”
갑상선암이 발병한 어린이들은 대부분 우유 섭취를 통해 방사능에 피폭된다. 그래서 우유의 방사능 양을 측정한 뒤, 판매 금지 등 적절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 프랑스와 불가리아를 제외한 유럽 국가는 이같은 조처를 취했다.
1986년 4~5월 한국의 방사선 대응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한국에너지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11개 관측소에서 빗물 조사만 여러 차례 벌였을 뿐, 우유에 대한 시료조사는 5월6일과 12일 충주와 대전에서만 각각 1회씩 실시했다. 게다가 체르노빌의 방사능은 사고 당일은 물론 사고 20일째인 5월 중순까지도 유출되고 있었다. 적어도 아시아에는 6월 초까지 영향을 미쳤겠지만, 한국은 너무 이른 시기의 간단한 조사 한 번으로 ‘발견되지 않았음, 큰 영향 없음’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정부는 “빗물에 방사성 낙진이 없으니 안심하라. 우리나라에는 별 피해가 없다”(5월1일)고 했다가, 빗물 속에 방사능이 검출되자 “빗물을 주의해야 한다. 빗물을 마시지 말라”는 엉뚱한 지침만 내렸다. 석 위원의 말이다. “일본은 전국 31개 측정소에서 매일 우유·채소 시료조사를 벌인 뒤 이 수치를 공개했어요. 일본 전역에서 유의미한 수치가 나타났고요. 이바라키에서 채취된 채소에서는 유럽이 규정한 안전치를 넘어서는 방사능이 검출됐습니다. 그런데 한국만 발견되지 않았다는 건 좀 이상하지요.”
일본에선 유의미한 수치 나타났는데…
프랑스는 유럽에서 체르노빌 사고 직후 우유·채소 등의 판매 금지 조처를 취하지 않은 나라였다. 프랑스 정부는 사고 직후 “방사능 낙진이 고기압으로 인해 라인강을 건너지 못했다”고 발표했다가 이후 “프랑스까지 미친 방사능이 미미하기 때문에 별도의 조처가 필요 없다”고 번복했다. 한국과 닮은꼴이다. 그러나 프랑스 동부에서 높은 수준의 방사능 오염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갑상선염 환자들은 2000년부터 정부를 상대로 집단소송에 들어갔다.
체르노빌은 현재진행형이다. 현재 시점에서 젊은이들 몸속에 종양을 잉태하고 있느냐 아니냐는 어쩌면 중요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체르노빌로 폭발된 심리적 불안감을 갖고 있고, 국가가 이에 대해 아무런 신뢰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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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상선암에 걸렸다 하더라도 방사능 때문인지는 명확히 가려내기 불가능하다. 단지 히로시마 원폭 투하와 체르노빌 폭발 뒤 환자가 늘어났다는 통계적 사실만 있을 뿐이다. 체르노빌 참사 당시 적극적이고 투명한 안전대책을 세우지 않은 국가의 갑상선암 환자들이 자꾸 체르노빌의 악령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프랑스가 그와 같은 경우다.
프랑스의 갑상선암 환자들의 집단소송은 2000년 31살의 반 웨인버그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프랑스 정부가 다른 유럽 국가와 달리 아무런 경고 없이 방사능에 오염된 식품을 섭취하도록 방치했다고 주장했지만, 같은 해 소송은 기각됐다.
이듬해인 2001년에는 84명의 갑상선암 환자가 다시 정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냈다. 그해 10월 134명의 환자가 대열에 합류해 세기의 소송으로 번졌다. 법원은 전격적으로 전문가 위원회를 구성해 1986년 사고 당시 정부 문서를 압수해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중앙방사선방호청(SCPRI)이 코르시카 지역이 높은 수준의 방사능에 오염된 것을 알고도 은폐한 사실이 한 조사위원의 폭로로 지난해 12월 드러났다. 이로써 원고 쪽이 한 발짝 승소에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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