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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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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낳은 엄마는 없었다

등록 2005-09-28 15:00 수정 2020-05-02 19:24
출산의 기쁨도, 육아 걱정도 한산해진 한 산부인과 병동의 풍경
“체력 되면 둘째 낳고 싶다”지만 “키울수록 낳는 게 무섭다”는데…

▣ 하정민 인턴기자 foolosophy@naver.com

“괜찮아요, 겁먹지 말고 집에 가서 푹 쉬어요.”

지난 9월9일 오후 4시 침묵 속에 잠들었던 서울 중구 충무로 삼성제일병원의 분만 대기실이 갑자기 시끌시끌해졌다. 젊은 임신부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분만실에서 걸어나왔다. 출산 예정일을 일주일 넘겼지만, 그의 뱃속 아기는 아직 세상 구경을 할 준비가 안 된 모양이었다. 그는 “유도 분만을 하려고 해도 아이가 나오지 않는다”며 울먹였다. “아이는 건강하다”는 병원 간호사들의 다독거림이 있은 뒤에야 그의 울먹임이 잦아들었다. 대기실은 다시 깊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저출산을 가장 먼저 체감하는 이들은 분만실에서 직접 아이들 받아내는 직원들이다. 여성 한명이 가임기간(15~49살)에 낳는 출생아 수를 뜻하는 ‘합계출산율’은 지난 1980년 2.83명에서 1990년 1.59명으로 곤두박질친 데 이어, 지난 2003년 1.19명, 지난해에는 사상 최저 수준인 1.16명까지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이대로 가다가 우리나라는 2026년에 초고령 사회로 접어들고, 2050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국가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엄살이야” 대기실 할머니들은 못마땅

이 병원 간호부에서 근무하는 신연지씨는 “지난해에 견줘 출산이 한달에 100건 정도 줄어든 느낌”이라고 말했다. 특히 올해 1월 이후로는 저출산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애 낳는 산모 수가 줄었다. 신생아 기념품 창구 직원도 “아이가 태어나는 장면을 촬영해 담아주는 ‘첫울음 동영상 CD’ 제작에 3년 전만 해도 하루 평균 30~40건 정도 신청이 들어왔는데 최근엔 가장 많을 때가 하루 20건이 안 되는 정도”라고 말했다.

분만대기실과 분만실 주변에서 딸과 며느리의 출산을 기다리는 할머니들은 “애 낳기를 꺼리는 젊은 사람들이 못마땅하다”고 입을 모았다. “요즘 애들은 엄살이 심해. 자기가 조금만 힘들면 안 하려 하고. 잔걱정도 너무 많아.” “우리는 뭐 편했나? 다 참고 견딘 거지. 요즘 애들은 너무 이기적이고, 힘든 걸 감수하려고 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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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출산의 고통과 육아의 짐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달랐다. 지난 9월2일 첫째와 5살 터울의 둘째를 낳은 안은주(34)씨는 “치솟는 교육비와 육아 부담 때문에 둘째를 낳아야 할지 크게 망설였다”고 말했다. 밤샘작업이 많은 설계일을 하던 안씨는 5년 전 첫째아이를 가지려고 일을 그만뒀다. 그는 하루 24시간 동안 아이 곁에서 ‘스탠바이’하느라 강박증까지 생겼다. 그는 “나이도 있고 아이 키우기도 너무 힘들어 둘째까지만 낳기로 했다”고 말했다. “큰애 한달 유치원비만 30만원이고, 이것저것 합치면 애한테 들어가는 돈이 매달 60만원이 넘어요.” 유치원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일주일에 5일 동안 아이를 맡아준다. 안씨는 “둘째가 자라면 비용도 두배로 늘어날 것 같아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엄선옥(42)씨는 세 번째 아이의 엄마가 된 동생의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병원에 왔다고 했다. 엄씨의 동생 성옥(39)씨는 한달 전 세 번째 딸을 낳았다. 큰아이는 여섯살, 작은아이는 세살이다. “나도 두 아이의 엄마”라며 웃던 그는 출산 장려를 위한 정부의 육아 지원금에 회의적이었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려면 이것저것 합쳐서 한달에 50만원, 유모를 쓰려면 60만~70만원 정도 들거든요. 지금 이 아기 이불만 해도 5만원이 넘어요. 애 키우는 엄마들은 다 알겠지만, 애 하나 키우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요. 지원금으로 얼마를 줄지는 모르겠지만, 돈 몇푼 준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죠.”

가정 화합 알지만 양육비가 가슴 눌러

이날 정오께 둘째를 낳으러 가족분만실로 들어간 동시통역사 김화정(34)씨의 경우는 운이 좋은 편이다. 그는 친정에서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데다, 유모를 둘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도 갖췄다. 김씨의 친정어머니는 “역시 가정엔 아이가 있어야 화합이 된다”며 육아 예찬론을 폈다. “마땅한 화제가 없는 어른들에게는 아기 우는 입술만 봐도 너무 예뻐서 분위기가 싹 바뀌거든요.” 그렇지만 김씨도 직장에서 되도록 일을 안 맡으려고 애쓰는 등 육아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둘까지는 어떻게 해보겠는데, 셋 이상 낳기는 좀 힘들 것 같아요. 개인 여력으로는 도저히 안 되죠.”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교육이다. “사교육이 필요 없을 만큼 교육제도가 제대로 갖춰진다면, ‘기러기 아빠’ 같은 것도 없어지고 아이 낳는 부담도 줄지 않겠느냐”고 김씨는 말했다. 그는 진통 다섯 시간 만에 3.5kg의 건강한 남자아이를 낳았다.

박혜숙(57)씨는 큰딸 차은정(30)씨가 낳을 첫 손자를 기다리며 흐뭇해하는 모습이었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박씨는 손자를 맞으러 단숨에 비행기를 탔다. 그 역시 출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가정에 아이가 중요한 건 말할 것도 없어요. 캐나다에서는 아이를 평균 3~4명은 낳거든요. 특히 4를 좋은 숫자로 여겨 동네에 사남매가 많죠.” 차씨는 캐나다 시민권을 갖고 있어, 그쪽에서 아이를 낳으면 매달 16만원 정도의 양육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지만, 사위가 “아기는 무조건 한국에서 낳아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고 했다.

분만대기실의 가족들은 “어이쿠, 머리통도 예쁘다”며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태어난 아기들의 수는 “아이는 많을수록 좋다”는 ‘할머니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분만실에서 이날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모두 20명. 첫째로 태어난 아이가 15명, 둘째가 5명, 셋째 이상은 없었다. 병원쪽은 지난해 총 분만 건수 8886건 가운데 둘째 이상을 낳은 것은 3319건으로 전체 분만 건수의 37%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아이는 396명, 넷째아이는 39명으로 전체 산모 중에서 삼남매 이상의 남매를 낳은 비율은 0.05%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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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은 뒤 몸조리를 위해 병원 3·5층 병실에 입원한 엄마들은 “아이를 낳아 키울수록 아이 낳는 게 점점 무서워진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아직까지 육아의 고통은 오로지 젊은 부모(특히 엄마)들의 몫이다. 아이를 낳아 길러본 엄마들은 현실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들로 고통받고 있었다. 첫 출산의 기쁨을 누린 엄마들은 “체력만 된다면 더 낳고 싶다”고 말했지만, 둘째를 낳은 엄마는 “교육이나 환경오염 때문에 아기 낳기도, 기르기도 좀 겁이 난다”고 말했다. 셋째를 낳은 엄마들은 “애 키우다 미치기 일보직전”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분만 건수, 조사 시작 7년만에 최저치

부모 귀에 사랑스럽게 들려야 할 ‘응애’ 소리가 많은 엄마들의 귀에 온갖 육아 문제가 ‘응’축된 ‘애’로사항쯤으로 들리는 비극이 연출되고 있다. 그래서일까. 분만실의 ‘응애’ 소리는 분명히 줄고 있다. 올해 6월까지 이 병원 상반기 분만 건수는 3991건을 기록했다. 이대로라면 올해 예상되는 분만 건수는 7900여건. 조사가 시작된 7년 만의 최저치다. 분만실의 한 간호사는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말에만 같이 자는데 미안해 죽겠어요. 아이가 외로워 보여 동생을 낳아주고 싶어도 큰애처럼 키우게 될까봐 엄두가 안 나죠. 정말이지 자기 밥그릇을 갖고 태어나기도 어려운 시대인 것 같아요.” 분만대기실의 정적이 잠시 깨지고 진통이 시작된 임신부의 비명소리가 방을 채웠다. “그래도 아이는 낳아야죠.” 그는 웃으며 비명이 흘러나오는 진통실을 향해 바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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