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지배구조와 충돌 빚는 금융·산업 자본 분리 원칙 존폐 논란
상호 감시하는 네트워크 없으면 사회 전체적으로 비효율적인 투자 이뤄져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밖으로는 삼성그룹과 우리 사회, 안으로는 삼성이란 기업과 이건희 회장 일가의 이해 충돌을 빚어내는 주요한 법·제도적 환경은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 원칙이다. 금융산업구조개선법 24조, 공정거래법 11조, 금융지주회사법 등 삼성의 지배구조와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키는 금융관련법은 재벌 금융사의 계열사 지분 보유를 일정하게 제한하는 것으로, 금융·산업 자본의 분리 원칙를 바탕에 깔고 있다. 총수 일가의 그룹 지배력을 지켜내기 위해 이들 실정법과 벌이는 싸움은 삼성이란 기업에 막대한 유·무형의 비용을 끼치고 있다.
역선택과 모럴 해저드의 문제
그렇다면 금융·산업 자본의 분리 원칙은 꼭 필요한 것일까? 일각에서 지적하듯이 삼성을 겨냥한 손보기용 잣대인가?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는 자본부의 시장경제 질서의 한 축으로,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금융정책의 중요한 목표로 채택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글래스-스티걸법 이래 은행업과 상업의 분리(separation of banking and commerce)를 원칙으로 삼고 있으며, 1999년 그램-리치-블라일리법 이후 이런 정책 방향에 일부 수정이 가해졌어도 금융·산업 자본의 분리라는 정책의 뼈대는 유지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제1금융권(은행)에서는 산업·금융 자본의 분리를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재벌의 은행 소유를 막아왔다. 외환위기 뒤 공적자금 회수 실적을 높이기 위한 금융기관 민영화 등으로 금융·산업 자본의 분리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일시적으로 높아지기도 했지만,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금융·산업 자본의 분리는 다시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여기에 2003년 중 금융시장을 뒤흔든 재벌계 신용카드사의 재무 위기는 이런 분위기에 힘을 실었으며, 정부는 지난해 ‘산업자본의 금융지배에 따른 부작용 방지 로드맵’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금융·산업 자본의 분리 필요성은 주로 ‘정보의 비대칭성’에서 비롯된다. “돈을 꿔준 쪽(금융자본)이 빌려간 쪽(산업자본)의 정보를 제대로 알 수 없고, 여기에서 역선택과 모럴 해저드(도덕 불감증)의 문제가 생겨나기 때문에 양쪽의 분리를 통한 감시·감독이 필수적이다.”(전성인·홍익대 경제학과 교수)
묘목업자가 은행에서 돈을 꾸는 상황을 예로 들어보자. 묘목업자는 ‘이번에 대출을 해주면 사과를 많이 생산해 갚겠다’고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은행쪽은 그 묘목이 시장에서 잘 팔리는 후지사과의 묘목인지, 잘 안 팔리는 능금 묘목인지 제대로 분별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겉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선 후지 묘목을 심는 사람이나 능금 묘목을 심는 사람이나 아무런 차별을 받지 않게 돼 후지 묘목 업자는 시장을 떠나게 되는 이른바 ‘역선택’의 문제가 나타난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 부문은 이런 역선택의 문제를 줄이기 위해 끊임없이 묘목에 대한 정보를 생산해야 하는데, 돈을 꿔주는 쪽과 빌려가는 쪽이 한 몸인 상태에선 이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해당 금융기관에 손해를 끼치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자원 배분의 비효율성으로 이어진다.
금융자본이 수익만 내면 된다?
역선택이 사전적인 문제라면, (돈을 꿔준) 사후적으로는 도덕 불감증 문제가 대두된다. 똑같이 묘목을 심어놓고도 열심히 김매고 거름 주는 이가 있는가 하면, 묘목은 내팽겨친 채 낚시질로 소일하는 업자가 있다. 금융 부문이 이런 도덕 불감증을 감시하고 감독해야 사회적인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꾀할 수 있음에도 금융·산업 자본이 샴쌍둥이처럼 한 덩어리로 돼 있을 경우 이런 감시 메커니즘 또한 작동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전성인 교수는 “산업자본의 역선택과 모럴 해저드를 막기 위해 금융자본은 경기의 심판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산업 자본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는 경기자가 심판을 맡는 격이며 감독 없이 시험을 보게 하는 것이다. 이는 성인군자들이 사는 동네에서나 어울릴 뿐 이윤 동기로 피가 터지는 자본주의 질서에서는 통할 수 없다.”
자유기업원의 김정호 원장은 이와 관련해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을 겸하다 보면, (금융기관에) 돈을 맡긴 고객에게 손해를 입힌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듯한데, (금융자본이) 최대 수익을 올려 높은 수익을 돌려줄 수 있다면, 그 방법이 뭐든(분리돼 있거나 합쳐져 있거나) 상관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금융기관이) 계열사에 투자하든, 어디에 투자하든 가장 높은 수익을 올려 고객에게 돌려주면 그만이다. 예금자나 돈을 맡기는 소비자에게 선택의 기회가 넓게 열린다면 낮은 수익률을 주는 금융회사에는 돈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 어떤 금융기관이 계열사를 지원하느라 수익을 내지 못하든가 위험을 안게 된다면 고객의 돈이 금방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융기관이 부도날 것에 대비한 장치는 어느 정도 필요해도 그게 아닌 것들은 필요 없다”는 설명이다.
금융·산업 자본의 분리에 대한 재계쪽의 인식은 대략 이와 맥을 같이하는데, 전성인 교수는 이에 대해 “금융·산업 자본의 분리는 해당 금융기관의 수익성 차원을 넘는 사회적 자원 배분의 문제”라며 “금융기관이 (산업자본과 분리돼) 모니터링(감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경우 사회 전체적으로 비효율적인 투자가 이뤄지게 된다”고 말했다.
예컨대 아이스크림 가게를 한다며 은행에서 돈을 빌려가서는 경마를 했고, 요행히 돈을 벌었다고 치자. 경마를 한 해당 개인에겐 효율적인 투자였다 하더라도 사회 전체적으로는 자원의 비효율적인 배분일 뿐이다. 왜냐하면 경마 게임은 전체적인 리스크(위험)보다 리턴(수익)이 작게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돈을 꿔간 이가 경마로 돈을 벌었든 날렸든 사회 전체적인 차원에서 비효율적이라는 점에선 아무런 차이가 없다. 경마를 하느라 꾼 돈은 불특정 다수의 고객 주머니에서 나왔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산업자본이 경마를 하는지, 약속대로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는지를 감시·감독하는 기능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금융자율화에서 분리 원칙마저 없으면…
이같은 이론적인 논의를 떠나 당장 자본시장의 현장에서 금융·산업의 분리 필요성을 쉽게 볼 수 있다. 외환위기 전 ‘금융사고의 백화점’이란 오명을 쓴 상호신용금고(현 상호저축은행)가 대표적인 예다. 옛 신용금고에서 벌어진 대형 사고는 거의 예외 없이 출자자(대주주) 대출금지 규정을 어긴 데서 비롯됐다. 감시망의 부재로 사주가 고객 돈을 빼돌리는 일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우 사태에 휘말려 치명상을 입은 대우증권의 불운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 1999년 삼성생명이 한빛은행(현 우리은행)에게 삼성투신 주식을 이건희 회장 아들인 이재용씨에게 싸게 팔도록 하고, 보유하고 있던 한일투신운용과 한빛투신운용 주식을 한빛은행에 싸게 팔았다가 들통난 일도 금융·산업 자본의 문제에서 불거졌다. 삼성자동차 사업에 삼성 계열 금융사가 자금을 지원했다가 막대한 손해를 입은 예도 있다.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그나마 금융 부문은 정부의 통제 아래에 있었지만, 지금은 금융자율화로 정부 통제권을 벗어나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금융·산업 자본의 분리를 통해 자율적으로 상호 견제하고 감시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진방 인하대 교수는 “1920년대 미국의 대공황은 금융기관이 부실한 대출을 감시·통제하는 역할을 제대로 못한 데서 비롯됐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고, 우리나라의 외환위기 역시 국가가 장악했던 금융자본을 손에서 놓는 순간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을 압도하면서 생겨난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금융·산업 분리 원칙이 희미해지고 있지 않으냐는 일각의 지적에 대해 김 교수는 “금융업 내 은행과 비은행의 벽은 낮아지고 있지만, 금융과 산업자본의 구분은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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