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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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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공화국의 막강 ‘청와대’

등록 2005-09-06 15:00 수정 2020-05-02 19:24

삼성과 관련된 온갖 불법 행위의 배후에 구조조정본부 등장
권한 행사하되 책임은 지지 않는 ‘황제경영’의 전위대인가

▣ 곽정수 대기업 전문기자/ 한겨레 경제부 jskwak@hani.co.kr

“구조조정본부 핵심 책임자의 퇴진은 시간문제 아니겠나. 사회적 파장이 이 정도로 큰데 누군가는 책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후임 자리를 놓고 벌써 그룹 내 유력 후보들간에 물밑 신경전이 시작됐다는 얘기가 들린다.” “스스로 물러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고비만 잘 넘기면 이전의 태평성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 텐데. 워낙 민감한 비밀들을 많이 알고 있어, 이건희 회장도 함부로 내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국 사회가 옛 안기부 불법 도청 테이프(X파일) 사건의 해법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쉽사리 이루지 못하는 가운데 삼성 안에서도 구조조정본부(이하 구조본)를 바라보는 시각이 엇갈린다. X파일 사건에서 옛 안기부 불법 도청과 함께 또 하나의 중심축을 이루는 게 삼성의 불법 로비 의혹이다. 그 한복판에 삼성 구조본이 자리잡고 있다. 재계에서는 삼성 구조본을 ‘삼성공화국의 청와대’라고 부른다. 이건희 회장이 절대 권한을 행사하는 황제경영 체제에서 삼성의 돈과 사람, 정보 등 주요 경영자원을 장악하고 그룹 전체의 핵심 의사결정을 주도한다.

초고속 승진, 엄청난 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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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구조본은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 전문경영인의 능력과 함께 삼성이 뛰어난 경영실적을 올리는 3대 원동력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동안 삼성과 관련된 불법 행위의 배후에는 항상 구조본이 등장하면서, 두 얼굴의 ‘야누스’에 비유된다. 비자금 조성을 통한 불법 정치자금 제공, 계열사간 부당 내부거래, 총수 3세로의 세금 없는 대물림, 강압적 노조 결성 방해 등은 대표적 사례들이다. X파일 사건에서 정치권과 검찰을 상대로 한 불법 자금 제공을 논의한 장본인은 구조본의 최고책임자인 이학수 부회장이다. 2003년 말 대선자금 수사 때나 1999년 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에 대한 불법 자금 제공 사건 때도 모두 구조본이 주도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가 1995년 말 단돈 60여억원을 증여받은 뒤 계열사 주식을 헐값으로 사는 방법으로 엄청난 시세차익을 올리고 핵심 계열사의 주식을 확보한 ‘세금 없는 대물림’ 작전도 구조본의 작품이다.

삼성 구조본의 임직원들은 다른 계열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고속 승진을 한다. 한 예로 김인주 사장은 97년 이사, 98년 상무, 99년 전무, 2001년 부사장, 2004년 사장으로 거의 매년 승진했다. 구조본 책임자들은 스톡옵션 등을 통해 엄청난 보상을 받는다.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이 스톡옵션으로 갖고 있는 삼성전자 주식의 평가액만 각각 1천억원과 500억원이 넘는다. 삼성 임원 출신인 ㅇ씨는 “구조본 간부들이 특혜를 받는 것은 ‘악역’을 마다않고 충성한 데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삼성 구조본이 출범한 것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이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를 계기로 재벌 체제의 상징인 그룹 회장비서실을 없애고 대신 2~3년 한시적으로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인정해 구조본 설치를 용인했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실질적으로 극복된 지 6년 이상 흘렀지만 삼성 구조본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다른 그룹의 경우 구조본을 아예 해체했거나 일부 구조본 기능이 남아 있어도 삼성처럼 그룹 전체를 장악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곳은 거의 없다. 삼성 구조본에는 재무, 인력, 기획, 홍보, 경영진단, 비서, 법무 등 6팀 1실에 100여명의 임직원이 일하고 있다. 과거 회장비서실과 본질적으로 달라진 게 없어 간판만 바꿔 달았다는 지적을 받는다.

“문서 대신 구두로만 지시한다”

구조본 임직원들은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의 구조본에서 일하지만, 법적으로는 각 계열사에 속해 있다. 내부 자금조달이나 정확한 활동 내역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삼성 구조본을 거친 한 임원은 “비자금을 조성해서 정계·관계·언론계 등을 관리하는 것은 구조본의 주요 업무로, 대외협력사업이라고 부른다”면서 “구조본은 계열사에 지시를 하더라도 흔적이 남는 문서가 아닌 구두로만 하는데, 구조본이 계열사 감사 때 주로 보는 게 지시 흔적을 남겼는지 여부”라고 말한다. 삼성 임원 출신인 ㄱ씨는 “비자금 조성에 쓰이는 가장 흔한 수법은 계열사들이 들여오는 고가의 설비를 실제보다 비싸게 산 걸로 꾸미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지금까지 삼성 구조본이 직접 사법 처리 대상이 된 적은 없다. 개인적으로는 이학수 본부장이 지난해 불법 대선자금 제공으로 기소된 게 유일하다. 공정위 독점국 간부는 “구조본 지시로 계열사간 부당 내부거래를 했더라도, 법적 처벌은 계열사 실무자들만 받는다”면서 “공정거래법상 제재 대상은 법인과 개인사업자로 국한돼 있는데, 구조본은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구조본이 각종 불법 행위에 연루됐는데도 ‘법의 사각지대’가 된 것은 검찰의 ‘봐주기’ 탓도 있지만, 이처럼 법적 실체도 없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는 운영방식 때문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참여연대 김상조 경제개혁센터 소장(한성대 교수)은 “재벌을 해체하지 않는 한 구조본과 같은 지휘부 기능은 필요하다”며 “다만 권한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를 제대로 지지 않는 게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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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위는 지난해 5월 책임·투명경영 원칙에 맞게 구조본의 활동 내용과 경비 조달, 경비 사용 내역, 계열사간 비용 분담 계약을 의무적으로 공개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삼성이 “사업상의 비밀 침해”라고 반대하고, 금감원과 재경부가 동조하면서 좌절됐다. 당시 공정위 방침에 대해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며 반대를 주도했던 금감원의 담당간부 ㅇ씨는 올해 초 삼성 계열사 임원으로 자리를 옮겨 삼성과의 유착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X파일 사건 이후에도 삼성 구조본의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삼성은 “계열사별로 따로 경영을 한다면 훨씬 비효율적이고, 투자계획, 광고, 어떤 사건에 대한 법률적 대응 등 모든 면에서 구조본이 움직이는 것이 효율적”이라며 구조본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삼성은 구조본의 해체 약속과 관련해서는 “외환위기 당시 정부 주도의 개혁 과정에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삼성은 구조본의 자금조달과 활동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여전히 부정적이다. 구조본은 투명경영과 책임경영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사실은 계열사의 불법적인 경영을 감시하는 역할이 더 많다”면서 “전문경영인들은 자기 실적을 올리기 위해 여러 가지 유혹에 빠지기 쉬운데, 구조본은 재무팀과 감사팀을 동원해 그것을 견제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이같은 태도로는 구조본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풀기 힘들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그동안 삼성 안에서 ‘성역’으로 여겨져온 구조본에 대한 비판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구조본 개혁 포함한 지배구조 개선부터

구조본에 있었던 한 임원은 “삼성을 진정 위한다면 바깥의 쓴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면서 “구조본의 핵심 책임자들은 삼성과 삼성의 사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방어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계열사의 한 임원은 “기업 이익을 위해 정치인들을 상대로 로비하는 것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면서도 “구조본은 로비 차원을 넘어 친삼성 정치인들을 직접 만들겠다는 위험한 시도를 했다”고 비판했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은 “계열사간에는 구조본의 독주와 월권을 지적하는 얘기가 많다”며 구조본의 해체를 주장했다. 결국 삼성의 해법은 구조본의 개혁을 포함한 지배구조의 개선에서 찾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또 삼성 지배구조의 개선은 궁극적으로 총수 일가가 최고 의사결정권과 이익을 사실상 독점하는 황제경영 체제의 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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