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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4대 가문은 이렇게 살아남았다

등록 2005-09-07 00:00 수정 2020-05-03 04:24

기업 경영권을 전문경영인에게 넘긴 록펠러·멜런·듀폰·핍스 가문
소유와 경영을 승계하지 않는 대신 신탁으로 엄청난 부의 증식 이뤄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미국의 4대 상속부자 가문은 록펠러, 멜런, 듀폰, 핍스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인텔의 고든 무어, 월마트의 월튼 등이 지난 세기말 즈음에 ‘거부의 사교클럽’에 명함을 내밀었지만, 이들 4대 상속 가문은 부를 기준으로 이미 성골이 된 지 오래다.

인터넷 거품이 터지면서 닷컴 졸부들이 몰락하기 시작한 2000년 현재 듀폰 가문(화학)의 자산 총액은 무려 145억달러였다. 1920년대 초호황기 재무장관을 배출한 멜런가(금융)의 재산은 100억달러였고, 록펠러가(석유)는 엄청난 자산을 사회에 환원했음에도 여전히 85억달러를 가지고 있다. 4대 상속 가문 가운데 끝자리를 차지하는 핍스가의 재산은 70억달러다.

19세기 전반까지는 가족기업 형태

한국의 재벌가처럼 이들은 경영권을 두고 골육상쟁을 벌이지 않는다. 적은 지분으로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계열사와 협력업체를 동원할 필요도 없다. 기업을 물려주기 위해 편법과 불법 수단을 동원하지 않아 정부나 시민단체와 힘을 겨루지 않는다. 정치자금 스캔들로 기업 전체가 시민사회와 시장의 비판 대상이 되는 상황을 초래하지도 않는다. 직원 구조조정에 나설 필요가 없으니 ‘전기톱’ ‘도살자’ 같은 영예롭지 않은 별명을 들을 일도 없다.

대신, 거액을 기부해 세인의 찬사를 받는다. 우아하고 반듯하며 품위 있는 매너를 자랑한다. 초호화 요트를 타고 지구의 아름다움을 즐긴다. 왕가 후손이나 헐리우드 스타처럼 파파라치에 시달리지도 않는다.

재산 규모가 4대 상속 가문보다는 못하지만, 10억달러 이상인 미국 상속 가문은 400여개에 이른다고 한다. 대부분은 소유와 경영이 뒤범벅인 한국 재벌과는 달리 경영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시장의 확대와 기업 규모의 팽창, 일개 가문이 감당하기 힘든 거대 자본 소요 등으로 소유와 경영의 일치에서 분리로 바뀌었다는 게 경영학계의 통념이다. 기업 구조의 거대화 외에도 19세기 말~대공황기의 미국 사회의 첨예한 갈등 때문에 부자들은 경영권을 내놓고 ‘도드라지지 않는 부호’로 잠수했다는 평이다.

미국 부호들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경영권에 욕심을 부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19세기 전반까지 미국 부자들은 ‘가족 기업’ 형태를 유지하면서 대를 이어 경영권을 세습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경영과 소유가 일치했던 당시 미국에서도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게 상식이었다는 점이다. 정치 지형, 경제 구조, 기업 구조, 시장 흐름의 변화와 함께 후손의 무능·허영·낭비 등으로 창업 세대와 2세 확장기를 거친 부자들이 3대쯤에 이르러선 몰락의 길에 들어서는 게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존 핸콕, 앨리어스 더비, 밴 레스레어 등이다. 이들은 건국 초기 또는 미국 산업혁명기인 1860년대 이전에 100만달러 이상의 부를 축적해 미국 내 최고 갑부라는 명성을 얻었지만, 이른바 ‘부자 3대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현재 미국의 거부 명단에서 이들 후손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미국 재계는 현재 진행되는 ‘정보통신 재벌’의 등장을 포함해 다섯 차례 정도 주류 교체를 경험했다. 미국 독립 전 영국에 빌붙어 부를 형성했던 왕당파 부자들이 캐나다 등으로 도망가면서 발생한 ‘부의 공백’은 폭리에 가까운 국제 무역 마진과 선박 투기 등으로 부를 일군 앨리어스 더비와 윌리엄 빙햄 등이 메웠다. 이들은 연방파였고, 당시 조지 워싱턴과 알렉산더 해밀턴이 이끌던 연방정부의 특혜를 누렸다.

20세기초 빈부 갈등에서 얻은 깨달음

재계의 주류 세력은 제퍼슨파 정치세력이 힘을 얻기 시작한 1800년 이후 다시 한번 교체된다. 제퍼슨파 행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무역선 선주에서 금융가로 변신한 스티븐 지라드 등이 대표적인 부자로 등극했다. 이때까지 소유와 경영은 대를 이어 세습됐다.

1860년대 남북전쟁과 산업혁명을 계기로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한다. 철도의 거부 코르넬리어스 반더빌트와 금융의 거목 J. P. 모건을 비롯해 멜런, 듀폰, 핍스 등이 기존 부호들을 밀어내고 1930년대 초 대공황 시기까지 미국 재계를 지배했다. 이들은 남북전쟁 때 돈으로 병역을 기피한 사실도 있지만, 전쟁통에 누더기 군복을 납품하고 일확천금을 거머쥔 다른 모리배들과는 달리 현대 미국 경제력의 주춧돌을 놓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철도, 석유, 금융, 철강, 화학 분야에서 거대 기업을 일구었다.

이들은 산업혁명과 독점화 시기를 거치면서 본격화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갈등과 씨름해야 했던 세대이기도 하다. 대통령 선거에서 빈자와 부자가 정면으로 대결한 1896년 필라델피아에서는 파리코뮌이 조직됐고, 클리블랜드에서는 부자가 가로등에 교수형을 당하기도 했다. 그해 7월과 8월은 미국 부자들에게 너무나 뜨겁고 두려운 여름이었다.

그해 대선에서 미국 농민과 노동자의 가슴을 흔들어놓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인민당 후보의 열변은 가진 자에 대한 평범한 미국인들의 분노를 짐작하게 한다. “형제들이 금십자가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막겠다.”

브라이언은 그해 선거에서 졌지만, 부자 편이었던 공화당 출신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과 프랭클린 루스벨트처럼 일시적으로나마 ‘부자들을 분쇄할 다른 계급의 감정 폭발’에 기댄 대통령이 등장하는 촉매제가 됐다. 이들은 각종 반독점법의 입법과 강화를 시작으로 재산세와 부유세를 도입해 ‘미국이 붕괴하기 전에’ 법과 제도로 부자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특히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공황 시기의 대선에서 직접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부자들을 공격하면서 평범한 미국인들의 분노를 자극했다. “재력가들이 지배하는 정부도 폭도가 지배하는 정부만큼 위험하다.”

그는 월스트리트를 ‘악의 소굴’, 부자들을 ‘악질 대부호’, ‘돈놀이꾼’ 등으로 표현하며 부자들을 난타했다. 증권법과 은행법을 제정하고 증권거래위원회를 신설해 월스트리트에 개혁의 칼을 겨누었다. 이와 함께 조지프 케네디(케네디 대통령 아버지), 군수 자본가 하워드 휴즈와 윌리엄 블레이클리 등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해 재계의 주류세력을 교체해나갔다.

경영권 상실은 몰락이 아니다

들불처럼 타오르는 평범한 미국인들의 분노에 포위돼 있던 록펠러 등은 혈로를 뚫어야 했다. 일부는 카네기처럼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도 했다. 부호들은 20세기 초에 본격화한 신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외풍에 직접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경영권을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코르넬리어스 반더빌트는 19세기 말 아들 윌리엄에게 철도제국의 경영권을 물려준 것처럼 일부 가문은 2세까지 상속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가문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20세기 들어 3세까지 소유와 경영이 승계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들은 재산마저 최고의 관리자들이 운영하는 신탁에 맡겨버린다. 이 덕분에 ‘4대 상속 가문’의 전체 재산은 1937년 당시 20억~40억달러 수준이었지만, 1990년대 말에는 경영권을 쥐고 있지도 않았고 신규 사업에 진출하지 않았는데도 400억달러대로 늘어날 수 있었다. 엄청난 부의 증식을 이루면서도 사회적·정치적으로 도드라지지 않았다.

상속 가문들은 패밀리 오피스(가문 관리실)를 두고 자산 운용의 방침과 상속 원칙 등을 정한다. ‘자신의 사후에 태어날 미지의 상속자들이 겪을 경제적 어려움까지’ 우려해 대책을 마련하기도 한다. 놀라운 사실 하나는 후손이 늘어나는데도 1인당 상속 재산은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산운용회사인 스테이드 베세머의 광고 카피대로 ‘수세대 동안 지속적인 재산 증식’이 실제 이뤄진 셈이다. 부의 영속화 등 신탁의 부작용을 일단 접어둔다면, 미국 부호의 스토리는 ‘경영권 상실=몰락’쯤으로 여기는 삼성을 비롯한 국내 재벌가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참고문헌: <금융투기의 역사> (에드워드 챈슬러 지음, 국일증권경제연구소 펴냄), <부와 민주주의>(케빈 필립스 지음, 중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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