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 의심되는 55명 조사한 국가보훈처 내부문서 및 회의록 입수
44명은 활동사실 단 한줄도 없고 해방 엿새 뒤 입대한 이도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그곳을 찾아간 것은 지난 2월 말이다. 중국 정부가 2차대전 승리를 기념해 충칭 도심 한가운데에 세운 ‘해방비’를 뒤로 하고 남쪽으로 300m쯤 걷다 보면 오른쪽으로 ‘웨이위안’(味苑)이라는 식당 간판을 내건 3층짜리 목조건물을 만날 수 있다. 여느 건물과 다름없어 보이는 이 허름한 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식 군대인 광복군 총사령부가 1945년 8월 해방을 맞았다. 지배인의 허락을 받고 건물 2층으로 올라서자 어두컴컴한 복도 너머에서 밀려오는 역한 냄새가 낯선 손님을 맞았다. 임시정부 청사 안내원 박화란(29)씨는 “이 건물은 주변 재개발의 압력을 못 이기고 곧 철거될 것”이라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광복군을 의심하지 말지어다?
광복군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라는 헌법 전문 때문만은 아니다. 좌익들의 독립운동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가 일제 36년을 서술하며 목에 힘을 줄 수 있는 곳은 △3·1운동 △윤봉길·이봉창 의거 △광복군·충칭 임시정부 등 서너 군데밖에 없다. 그 가운데 으뜸은 광복군의 활약이다. 중국군사위원회가 광복군을 중국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 만든 ‘9개 준승’을 철회시키기 위해 임시정부가 노심초사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미국한테서 아직 ‘전시 작전권’을 돌려받지 못한 대한민국 국군의 서글픈 모습과 겹쳐져 묘한 울림을 남긴다. 해방·전쟁·분단·개발독재가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고단한 현대사에서 광복군만큼은 민족의 자긍심으로 남아줬으면 좋겠다는 집단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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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많으면 어두움도 많다고 했던가. 독립운동가 서훈을 둘러싼 ‘잡음’ 한가운데에는 어김없이 광복군이 있었다. 서훈 잡음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가 친일파 서훈, 둘째가 5단계로 나뉜 건국훈장 등급, 셋째가 ‘가짜’ 또는 ‘자격 미달’ 광복군이다. 앞의 두 논란은 그동안 여러 차례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광복군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사실상 금기에 가까웠다.
<한겨레21>이 입수한 국가보훈처 내부문서 ‘광복군 복무 사실 확인’(1991년 12월)을 보면, 수십명의 광복군이 국가보훈처가 정한 서훈 기준에 못 미치는 ‘자격 미달’임을 알 수 있다. 이 문서는 보훈처가 독립유공자들에게 수여하는 건국훈장의 등급을 대한민국장·대통령장·독립장(건국포장과 대통령표창은 건국훈장에 해당되지 않음)의 3단계에서 대한민국장·대통령장·독립장·애국장·애족장의 5단계로 나누는 것을 뼈대로 한 1990년 상훈법 개정 이후에 작성한 것이다. 보훈처는 상훈법 개정 이후 기존의 대통령표창·건국포장 서훈자들을 애국장과 애족장으로 등급을 상향했다. 이 과정에서 공적 내용이 석연치 않은 55명을 상대로 조사를 벌여, 이를 문서로 남겼다. 문서는 광복군 55명의 △인적사항 △본인 주장(본인이 주장하는 공적 내용) △본인 제출자료(입증자료) △확인요망 사항 등을 포함하고 있다.
“입대일 미상, 입대 경로는 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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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단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은 누굴까. <한겨레21>의 추적이 시작됐다. 국가보훈처가 1988년 펴낸 <독립유공자 공훈록>(5권·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살펴보던 취재진의 눈에 이름과 서훈 사실은 있지만, 공적 내용이 단 한줄도 없는 ‘백지’ 광복군(53명)의 이름이 들어왔다. 명단을 대조해보니, 문서에 이름이 오른 44명이 ‘백지’ 광복군과 일치했다. 공적 내용 없이 어떻게 서훈이 가능했을까.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그때는 문교부와 총무처가 업무를 담당했다”며 “모르겠다”고 말했다.
문서를 들추자 보훈처와 광복회가 감추고 싶어했을 내용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을 서훈받은 권영○의 경우 광복군 입대 일자는 1945년 8월19일이다. 해방을 맞은 1945년 8월15일보다 4일 늦게 입대한 셈이다. 김동○의 입대일은 1945년 8월21일이고, 김일○와 전○는 광복군 3지대에 입대했다는 사실을 주장할 뿐,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나 입대 일자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의 문서에는 “연월일 미상 광복군 3지대 입대”라고만 쓰여 있다. 김정○, 이영○은 본인 주장으로는 1945년 6월에 입대했다고 하지만, 어디서 어떤 경로를 통해 입대했는지와 입증 자료들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 밖에 대부분의 서훈자들이 건국훈장의 가장 낮은 등급인 애국장 서훈 기준인 ‘광복군 입대 활동 6개월’의 기준점인 1945년 2월15일 이후 입대자들이었다. 국가보훈처가 1990년 정한 ‘독립유공자 포상실무’를 보면, 광복군의 경우 5등급 ‘애족장’ 이상의 등급을 받으려면 6개월 이상 항일활동을 해야 한다(표 참조).
대부분의 건국훈장과 대통령 표창자들의 등급이 상향 조정된 데 견줘, 문서에 이름이 오른 55명 가운데 4명(1명은 확인 불가)을 뺀 50명의 등급이 존치됐다. 문서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 가운데는 “1941년부터 광복군에 가담했다”는 이도 있다.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애국장이나 애족장 서훈이 가능하다. 보훈처 관계자는 “조사 결과 이들의 서훈 등급을 상향할 수 없어 그대로 놔뒀다”고 말했다. 서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간접 시인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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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출신의 한 인사는 “가짜 논쟁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사람들은 광복군 3지대 출신”이라고 말했다. 총사령부가 있는 충칭에 있었던 1지대나 시안에 거점을 둔 2지대와 달리 3지대는 본부에서 멀리 떨어진 안후이성 푸양에 본부를 둬 본부의 직접 통제가 어려웠다. 광복회 간부 출신인 한 인사는 “서훈 초기에 광복군에 잠시라도 몸담았던 사람들이 너나 없이 3지대장이었던 김학규 장군에게 몰려가 서로 인우보증을 서가며 서훈을 받았다”며 “그런 사람들 가운데 가짜나 자격 미달자가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건에 이름이 오른 54명 가운데 3지대 출신은 41명, 문서만 가지고는 어디서 활동했는지 확인이 불가능한 사람은 7명이었다. 나머지는 1, 2지대와 토교대 등이 1~2명씩 골고루 섞여 있다. 접촉한 광복군 출신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저마다 손사래를 쳤다. 광복회는 <한겨레21>의 거듭된 인터뷰 요청을 거부했다.
1960년대 “백지가 나돈 적이 있다”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은 김삼웅 독립기념관장과 함께 1992년 펴낸 <친일파2>에서 “(전두환) 국보위 시절 정부는 독립유공자들 가운데 가짜가 많다는 진정서를 접수해 대상자 100여명을 조사했는데, 40여명이 가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적었다. 독립유공자 포상 초기인 1960년대 “백지가 나돈 적이 있다”는 것은 독립유공자들 사이에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광복회 간부를 지낸 한 인사가 귀띔했다. 자주 거론되는 부대는 △광복군 3지대 △토교대 △광복군 1지대 3구대(비호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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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군무부장을 지낸 약산 김원봉이 작성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문서> ‘광복군 현세’를 보면, 1945년 3월 현재 광복군의 수는 총사령부 108명, 1지대 89명, 2지대 185명, 3지대 119명, 기타 13명 등을 합쳐 514명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 가운데 중국인의 수는 65명으로 광복군의 실제 인원은 449명이다. 광복 이후 혼란과 전쟁, 분단 등을 겪으면서 희생된 사람들이 많아 실제 대한민국 정부에 포상 신청을 한 사람은 이보다 적은 수였을 것으로 보인다.
엉터리 서훈 논란은 지난 일일까. <한겨레21>이 입수한 ‘2002년 1·2차 전원합동회의 회의록’에는 애초 서훈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기포상돼 서훈의 기준과 원칙이 무너지는 광경을 생생히 엿볼 수 있다.
2002년 7월15일 오후 2시 국가보훈처 5층 회의실에서 2차 독립유공자공적심사위원회 전원합동회의가 열렸다. 1945년 2월 광복군 1지대 3구대 1분대에 입대해 활동했다고 주장하는 현준○이 서훈 심사에 올랐다.
김아무개 위원이 “다른 사람들도 이분과 동일한 자료로 기포상됐기 때문에 1심에서 애족장으로 의결했다”고 배경 설명을 하자, 광복회장을 지낸 광복군 출신 원로 독립운동가가 “1지대 3구대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문제의 1지대 3구대는 후난성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로, 한시준 단국대 교수(사학)는 1993년에 펴낸 <한국 광복군 연구>에서 “이들은 8·15 해방 이전에 성립 사실을 1지대 본부나 광복군 총사령부에게 보고하지 못한 것 같다”고 적었다. 문제는 현씨와 똑같이 1지대 3구대 1분대에서 활동한 30명 가운데 28명은 이미 포상됐다는 점이다. 이미 포상된 28명을 치탈하는 것이 옳을까, 서훈받지 못한 두 사람을 추가 서훈하는 것이 옳을까. 결국 현씨의 서훈은 보류됐다.
반대의 예도 있다. 같은 날 회의에서 별도 심사 안건으로 오른 광복회 추천 인사 11명의 서훈을 놓고 다시 한번 위원들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 이들은 임시정부 요인 가족들의 집이 몰려 있던 충칭 외곽 마을 토교에서 훈련받고 경비를 서던 ‘토교대’ 출신으로, 학자 출신의 한 위원은 “이들이 토교에 도착한 시기는 1945년 6월께로 보여 광복군 포상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반대했다.
광복군만 동지의 증언을 자료로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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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원로 광복군 출신 위원들이 “당신이 그 당시 상황을 어떻게 아냐”고 따지고 물으며 “심사 대상에 오른 사람들과 같은 입장에 있었던 30명이 기포상돼 이 사람들도 포상돼야 한다”는 논리를 앞세워 서훈을 주장했다. 결국 심사에 참여했던 한 원로학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면서 서훈이 보류됐다.
광복군 출신자들은 다른 독립운동 계열에 견줘 특혜를 받기도 한다. 2002년 2월1일에 열린 2002년 1회 공적심사위원회에서는 “광복군 출신자에 한하여 직속 상관을 포함한 2명 이상 광복군 동지의 증언을 증거자료로 채택할 수 있도록 하자”는 서훈 기준을 확정했다. 회의를 진행한 위원장은 “광복군 외에 다른 계열의 경우에는 증언을 채택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보훈 유관단체 한 관계자는 “광복군을 둘러싼 포상 논란이 많은 것은 젊은 시절 함께 어려운 시기를 겪은 동료를 위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독립유공자들에게 주는 보상금 등 혜택에 대한 유혹도 작용했을 것이다. 광복군 출신의 한 위원은 “광복군 포상이 문제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원인을 제공한 것이 광복군인 것도 인정한다”며 “그렇지만 활동 공적이 분명한데 포상받지 못한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옛 기록을 보아 당시 사정을 짐작할 뿐인 후세 사람들이 목숨 걸고 일본군을 탈출했던 노병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아마 그러기는 힘들 것이다. 갑작스레 맞은 해방에 백범마저 땅을 쳤다는 일화가 전하듯, 서훈 자격을 채우지 못한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지만 독립유공자 서훈에는 원칙과 기준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무시할 수 없다. 심사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한 위원은 “해방 무렵 20대 초반이었던 광복군 막내 세대가 광복회의 가장 큰 세력이 돼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다”며 “이 때문에 서훈 체계 전반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많다”고 말했다. 온 국민의 존경과 명예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광복군. 그들은 새삼스레 불거진 가짜 서훈 논란을 어떻게 돌파해나갈까. 가짜와 부자격자를 떳떳이 밝혀 명예와 존경을 지켜내는 것은 오로지 그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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