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로 둔갑한 친일 경력자들 재심해야” 식지않는 여론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출범, 보수언론과의 대격돌 불가피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독립유공자 서훈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친일파들이 독립유공자로 둔갑했다는 이른바 ‘친일 논란’이다. 모두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다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처음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로 돌아선 사람도 있고, 친일을 하다가 나중에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도 적지 않다. 그래서 친일 연구가들은 ‘친일파’라는 다소 감정적인 표현 대신, ‘친일 전력이 있다’거나 ‘일제에 협력한 경험이 있다’는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친일 행위 밝혀져도 서훈은 그대로
백번 양보해 친일 문제에 대해 “좋은 일도 아닌데 뭘 자꾸 들추려 드냐”는 생각을 수용한다 해도, 친일 경력자들이 독립운동가로 둔갑한 상황 앞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은 1992년에 펴낸 <친일파2>에 포함된 논문 ‘권력에 농락당한 국가서훈·포상제도’에서 “과거 정권이 친일파는 척결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중용함으로써 서훈 질서와 민족 정기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고 썼다.
독립유공자 사이에 ‘독버섯’ 뒤섞인 친일 경력자를 찾아내기 위한 1차 조사는 1980년대 초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였던 고 임종국 선생과 광복회가 나서 진행했다. ‘광복회원친일유공자 명단’이라는 이름으로 작성된 이 문건에는 친일 경력을 가진 23명의 명단이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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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가 이를 이어받아 지난 2004년 2월 ‘독립유공자 가운데 재심이 필요한 사람’들의 명단 20명을 국가보훈처에 제출했다. 이 가운데 3·1운동 민족대표 33인으로 대통령장을 서훈받은 이갑성 등 9명은 ‘조사가 더 필요한 사람’으로, 같은 대통령장이 서훈된 김성수 등 11명은 ‘친일 행위가 뚜렷한 사람’으로 꼽혔다. 국가보훈처는 그동안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1996년 한 차례 서춘·김희선·박연서·장응진·정광조 등 5명의 친일 전력자에 대한 서훈을 박탈하는 데 그쳤다(표 참조).
명단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될까. 2004년 10월7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 자리에서 고진화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1938년 일제가 만든 전시 통제기구인 국민총력조선동맹 이사였으며 신문에 징병 격려문을 냈던 <동아일보> 창업주 김성수를 비롯해 송진우, 윤치영 등 명백하게 친일 반민족 행위가 밝혀진 대상에 대해 서훈을 취소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고 박유철 국가보훈처장에게 따져 물었다. 박 처장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조사 결과가 나오면 법적 절차에 따라 치탈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처장이 말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5월31일 전격 출범했다. 조사 결과에 따라 김성수 등의 서훈이 치탈될 수도 있는데, 이 과정에서 보수 언론과 정권 사이의 대격돌이 불가피해 보인다.
독립투사 동상 제작한 친일 예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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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잔상이 남아 있는 것은 독립유공자 서훈뿐만이 아니다. 서울 남산공원에 가면 자애로운 눈빛으로 서울을 굽어보는 높이 10m짜리 백범 김구 선생 동상을 만날 수 있다. 1969년 8월23일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가 세운 이 동상을 만든 사람은 해방 이후 홍익대와 이화여대 조각과 교수를 지낸 김경승(1915~92)이다. 그는 이 동상 말고도 남산 안중근 의사상(1959), 서울 도산공원 안창호 선생상(1973), 서울 종묘공원 월남 이상재 선생상(1989) 등 독립투사들의 동상을 도맡아 제작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동생 김인승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친일 미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1942년 6월3일치 <매일신보>에서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고, 대동아전쟁 아래서 조각계의 새 길을 개척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해 ‘화필보국’의 진수를 보여줬다.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김경승 제작 동상 △전국 곳곳 문화재에 걸린 박정희 친필 현판 34건(28곳) △최근 철거 논란을 빚은 이당 김은호의 논개 영정 △월전 장우성의 유관순 영정 △서울여대·고려대 등 친일 경력이 있는 설립자를 기념한 동상·기념관 등 수를 헤아리기 힘들다.
해마다 500만명의 관람객이 찾는 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도 청산되지 못한 친일의 아이러니가 압축돼 있다. 이곳엔 동요작가 윤극영과 문인 김동인, 언론인 송진우 등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의 동상과 시비가 유관순·조만식 등 독립열사들의 동상과 나란히 서 있다.
친일 인사들이 독립투사들의 동상과 영정을 제작하거나, 그들을 기념하는 동상이나 직접 쓴 편액이 많은 것은 해방 이후 이들이 정권을 쥐거나 예술계의 ‘좌장’ 역할을 하면서 박정희 군사정권과 밀월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친일 전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무더기 서훈이 이뤄진 것도 같은 이치다. 김경승은 박정희 정권 때 서울신문이 만든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의 전문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대부분의 작품을 자신에게 배당해 직접 제작했다.
1990년대 초 지방자치제 도입으로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이 자기 고장 출신의 예술인들에 대한 무비판적인 기념사업을 벌인 점도 이에 한몫했다. 마산(조두남)·통영(유치환)·밀양(박시춘)·수원(홍난파) 등에서는 이를 막으려는 지역 시민단체들의 ‘전쟁’이 현재 진행 중이다.
특히 문화·예술인들의 친일은 그들의 작품이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데다, “친일은 했어도 뛰어난 재능으로 예술 발전에 공헌했다”는 ‘재능론’이 겹치며 객관적인 평가를 어렵게 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조사한 ‘친일파 상훈 현황’을 보면, 현제명·윤극영·유치진·김기창 등 친일 행적이 뚜렷한 예술인 55명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듬해인 1962년 3·1문화상, 5·16민족상 등 각종 상을 124개나 휩쓴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친일이 먼 옛날의 일이 아닌 일상에서 우리를 얽매고 있는 현실의 문제라는 것을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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